56화
데모트 백작은 마차가 정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멈추자 창문을 열고 앞을 내다보았다. 저 앞에서 정문을 막고 있는 화려한 마차를 본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서 내리겠다.”
“아, 예…….”
마부도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 데모트의 말에 토 달지 않고 후딱 달려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는 데모트는 미간이 완전히 일그러진 상태였다.
저택 안에서 누군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뒤돌아 나오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데모트는 순간 빳빳하게 고개를 든 채로 지나가 버릴 뻔했지만, 눈을 감아 인사를 받아 주어야 했다.
그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정문 앞을 막아선 마차에 올라탔다. 화려한 마차는 유려하게 저택 앞을 돌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울상인 백작 부인과 자신의 딸인 아스테리아가 서 있었다.
“여보…….”
백작 부인은 숫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들의 손에는 선물들이 각각 한 개씩 들려 있었고, 발치에 커다란 상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크기로 보아 또 두 개는 보석, 발치의 두 개는 드레스와 구두 정도 될 듯했다.
데모트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황궁인가.”
“같은 황궁이라고 보내는 사람이 달라야 말이죠! 오늘도 황자가 보냈어요, 황자가!”
“흑…….”
백작 부인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고, 이를 악물고 있던 아스테리아는 기어이 분노에 찬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니 황태자비 후보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들떠서 다녀온 것이 이제 일주일이 됐나 넘었나. 분명 황태자비라고 했는데 다녀온 당일 아스테리아는 황태자 대신 황자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굉장히 관심을 보이면서 계속 쳐다보고 질문도 자기만 보고 했다고.
여기까지 들었을 때 데모트는 어딘가 싸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 뭔가가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황후가 자신을 향해 많은 칭찬을 해 주었다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이전부터 레나드를 만나고 싶다고, 황태자비 간택이 이뤄지고 있단 말을 어디서 듣고 왔는지 황태자비 후보에 올려 달라고 떼를 쓰던 아스테리아였다.
클로이의 아들은 황자였지만 황자비가 아닌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된 자리였으니까, 황태자비도 들이기 전에 황자비를 택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데모트를 불편하게 했던 싸한 느낌이 자꾸 현실화되려고 했다.
그 이후로 황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선물이 도착했고 그것은 하필이면 레나드도 황후도 아닌 황자, 로나르드가 보내는 것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니, 황태자는 어디 가고 황자가 선물을 보내고 난리냐고! 아빠! 이거 당장 돌려보내 줘요!”
이러다가 정말 레나드가 아닌 로나르드의 비가 될까 봐 아스테리아는 히스테릭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난번에는 선물을 가져온 시종이 보는 앞에서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백작 부인이 식겁하여 나섰던 적이 있었다.
“아빠, 이러다가 저 황태자비 아니고 황자비 되는 거 아니죠? 레나드 전하여야 한다고요. 황자비든 황태자비든 그건 다 됐고, 레나드 전하 아니면 안 된다고요!”
기어이 아스테리아는 떼를 쓰기 시작했다. 레나드가 멋있는 것은 데모트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보든 여자가 보든 레나드 쪽이 훨씬 남자답게 잘생겼고, 심지어 검술 실력이 출중한 데다 똑똑하기까지 했다.
로나르드가 멍청하다는 것도 아니고 못생겼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뭐 이럴 때 잠깐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도 좀 안타깝긴 하지만, 그가 알기로 레나드가 황자라는 이유로 궁에서 내쫓지도 않고 그의 능력에 맞춘 중요한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 정도면 황자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같은 것들을 많이도 피해 간 것이다.
부모의 입장으로 봤을 때, 그것을 황후가 견디고 있다는 것이 약간 신기하긴 했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거였다면 지금 이 선물들부터 못 오게 막았겠지……. 하, 벨파인 공작저에 슬쩍 알아보니 그쪽에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 같더구나. 결국 너 아니면 벨파인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흑, 흑…….”
“아휴, 선물이라도 좀 적당한 걸 보내든가. 어쩜, 이렇게 보석이며 드레스며 구두며 하나도 안 예쁜 게 없지!”
얼핏 들으면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없는 투정이었지만 백작 부인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스스로 골랐는지 누군가 골라 줬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심을 사로잡는 센스가 있다는 것에서 데모트는 슬쩍 로나르드가 불쌍하게까지 여겨졌다.
아스테리아가 레나드에게 빠져 있지만 않았어도 황자비도 되고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실 데모트 같은 경우엔 이쯤 되고 보니 레나드보다는 로나르드와 혼인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왠지 황후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과연 레나드를 황태자로서 끝까지 잘 보필할 것인가.
제가 보기에 그녀는…… 그것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 몰라. 보지 마!”
“어차피 돌려주지도 못할 거 그냥 써.”
“그거 하고 나가면 영애들이 다 알아볼 거 아냐!”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본다고 그러니? 황궁에 갈 때만 조심하면 될 거 아니겠어?”
화를 내던 백작 부인을 녹일 만큼, 짜증이 나 있는 데모트마저 눈길을 줄 만큼 예쁘고 화려한 것들을 두고 아스테리아는 갈등에 빠졌다가 이내 휙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예쁘고 비싼 것에 사족을 못 쓰는데 저렇게까지 외면하는 걸 보면 데모트가 생각하는 방향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쯧, 뭐가 이렇게 골치 아픈 겐가.”
“황태자 전하를 만날 방법 같은 건 없을까요? 황태자 전하도 우리 아스테리아를 직접 만나면 생각이 바뀌실 텐데…….”
계단 위로 쿵쾅대며 사라진 아스테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작 부인이 데모트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미간을 팍 구기긴 했지만 데모트에게도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은 있었다.
“로나르드 황자는…… 그렇게 별로였다 하던가?”
데모트는 내내 입에만 맴돌던 말을 기어이 꺼냈다. 사실 아스테리아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으나 그가 보낸 선물 하나에 이토록 치를 떠는 걸 보면 그런 뉘앙스조차 풍기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황자가 어땠다는 말은 하지도 않아요. 그냥 그 자리에서 다른 영애들도 있는데 자기만 쳐다보고 말 걸었던 것에 짜증을 내고, 다른 영애들이 자신을 제외시켜도 되겠다고 생각하면 어쩌냐 화내고, 황태자가 자기를 동생한테 양보하면 어쩌냐 짜증을 부리는 거죠.”
사람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상대가 레나드인 것이다. 데모트는 고개를 저었다.
“부인 말마따나…… 레나드를 직접 만나게 해 주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군.”
곤란한 듯이 이마를 찌푸리면서도 데모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최근에 신전에서 자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진짜예요? 부인들은 소식들은 빠른데 진짜인지 아닌지 가려내기가 쉽지가 않아요.”
“신전? 황태자가?”
데모트는 반문했지만 백작 부인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 신전에 아스릴이 있잖아요. 걔 통해서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황태자가 거기에 오는지 안 오는지, 오면은 언제 언제 오는지, 그런 정보 알아 두면 아스테리아가 가서 딱 만날 수도 있잖아요!”
속없는 소리를 하는 부인을 보며 데모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은 아무 생각 없이 집안에서 그녀를 하녀처럼 대하곤 했다. 그녀도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데모트 백작가에서는 그것이 일반적인 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스릴은 제 발로 그것을 뿌리치고 떠났다. 그것도 단 몇 시간 만에 자신의 모든 짐을 가지고 집을 나간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마음이 아니라면, 그렇게 갈 수는 없었다.
“신전에 자주 간단 말이 나오는 데엔 이유가 있겠지. 신전 쪽 인맥 찾아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꼭 좀 해 줘요, 여보. 아스테리아 저러다가 화병 나서 죽을 거 같아요.”
백작 부인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데모트는 그런 두 여자의 욕심에 동참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만 기다려 봐. 신전에 자주 오는 게 진짜면 아스테리아에게 기회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데모트는 아스릴이라는 이름은 싹 지우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아스테리아한테 가 볼게요. 어휴…… 이거 오늘 하루 꼬박 밥 안 먹게 생겼네.”
혀를 차며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을 보며 데모트마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사를 불러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신전에 보낼 편지를 작성하게 하고 인편으로 그것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만 쓰면 되겠습니까.”
“길게 써 봐야 구구절절하기만 해. 어차피 그렇게만 쓰면 이쪽에서 바라는 목적이 뭔지 그들도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집사는 지시를 다 듣고 난 다음 자리를 떠났다.
아스테리아가 1년 동안 이렐린의 꽃을 해 오면서 데모트에겐 당연하게도 신전의 인맥이 생겼다. 뭐 그녀가 꽃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기도 했고.
이렇게 다른 방면으로도 써먹을 수 있게 될지 예상은 못 했지만, 역시 인맥은 쌓아 둘수록 나쁘지 않은 것을 알겠다.
순간 2층 위에서 빽, 하고 소리치듯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 떼쓰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속상하고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저렇게 부인을 힘들게 하고 주변인들을 힘들게 할 만큼 감정 컨트롤을 못 하는 아스테리아를 보면 아스릴이 떠오르긴 했다.
화려한 언니의 뒤에서 그림자 역할을 참 잘해 주던 아이였는데.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데모트는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피곤해서 어디든 들어가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