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래서 지금 하루에 한 번씩 황자님께서 황후 폐하를 찾아가신다고 합니다.”
세드룬은 동쪽으로 떠난 군대의 주둔까지만 지켜보고 이제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러고는 들어오는 길에 황후전에 심어 놓았던 귀에게서 지난 며칠간의 일을 보고받았다.
그의 보고가 마음에 들었는지 레나드가 한쪽 입술을 올려 씨익 웃고 있었다.
그날 로나르드를 영애들의 자리에 보낸 것은 레나드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스테리아 영애에게 이만큼이나 반할 거라는 것까지 예상했던 것일까.
세드룬은 살짝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셋 다 아주 애가 타겠지. 황후는 나한테 연결해 주려던 아스테리아를 자기 아들이 탐내니까 답답할 거고, 로나르드는 그런 황후의 뜻을 알고는 나한테 그녀를 빼앗길까 초조할 거고, 데모트 가문은 나를 못 보고 돌아갔는데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니 애가 타겠지.”
레나드는 책상 앞에 앉아 깃펜을 들고 있으면서도 지금은 웃을 수 있었다. 이제 주둔지에 나간 군대가 예언을 따라 일어날 침공을 막아 공을 세우고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 전까지는 긴장한 채 상황을 살피고 자리를 지켜야 했다.
긴장을 풀고 섣불리 딴짓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었다.
제가 황후의 곁에 눈을 붙여 놓았듯 그녀도 제 곁에 사람을 심어 두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해서 그가 동쪽 경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것을 들키면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내보내 놓은 병력이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는 것까지는 문제가 아닌데, 그녀가 아도피트와 모종의 계약이라도 맺고 우리의 위치를 그들에게 노출시켜 버린다면 그건 그냥 허탕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더 철저히 감시해. 그래 놓고 뒤로 뭔가를 하고 있다면 우리 계획은 끝장이야.”
“알겠습니다.”
세드룬은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레나드는 시선을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고 하루 종일 같이 있다 온 건데…….”
예언에 대해 들은 날,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계획을 세운 그는 바로 돌아와 실행에 옮기는 대신 하루 종일 신전에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며칠 혹은 예언의 실행에 따라 몇 주간 자리를 지켜야 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이제 단순히 그녀의 공격만 막고 있을 게 아니다. 제대로 포기 선언을 듣든가,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한다면 제가 끌어내려지기 전에 그를 끌어내려야지.
이전까지는 그저 제 한 몸 지키면 되는 일이었다. 이 몸만 지키면 세드룬이든 그의 휘하의 기사단과 군대를 다치게 할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생긴 셈이 되었다. 심지어 그녀를 아무런 문제 없이 황실로 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제가 한번 분위기를 보고 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녀는 머리는 좋지만, 은근히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에 미숙한 데가 있어서 지금이 딱 엿보기 좋은 때인 것 같았다.
* * *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클로이는 익, 하고 소리를 내려다가 이를 악물었다.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확 올라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황후의 개인 공간이 아니라 황제의 침실이다. 그녀가 막을 이유가 없었다.
“들어오라 해.”
황후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대답했다. 그리고 침상 옆에 앉아서 빗을 집어 들었다. 본래는 책을 들여다본다거나 바느질을 한다거나 해야 하는데, 그러고 있다가는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될 것만 같았다.
스윽스윽, 자신의 머리카락을 빗는 것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녀는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요, 어서 와요.”
레나드가 들어오며 인사를 올렸지만, 클로이는 그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스윽슥, 빗질을 계속하는 그녀를 보며 레나드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는 걸 보지 못했다.
레나드는 황제의 침실로 들어오면서 바로 알아차렸다. 머리카락을 빗는다는 것은 클로이의 마음이 그다지 평온하지 못하다는 증거였다. 그것을 제가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주체가 안 될 만큼 초조한 일이 있거나 아니면 정말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거나.
후자는 아니길 바란다. 제가 이제껏 싸워 왔던 여자가 그 정도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면 좀 슬퍼질 것 같으니까.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세요.”
클로이는 새침한 목소리로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침대 옆의 작은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아 거의 기계처럼 머리카락을 빗었다.
그녀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레나드는 저벅저벅 걸어가 클로이의 반대편에 서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일어나시긴 할 겁니까. 진정 깨어났을 때의 모습을 제겐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까.
침상에 누워 오늘도 두 눈과 입술을 굳게 닫고 있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순간적으로 착잡해지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든 레나드에게 그런 감상을 일으켰다.
“요 며칠간은 일어나질 못하셨어요. 나도 깨어나신 걸 본 지 좀 오래됐군요.”
열심히 머리카락을 빗고 있던 클로이가 레나드를 힐끔거리더니만 그렇게 말했다. 황제의 침상 앞에서는 언제든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이었으니 아마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일어나십시오, 아버지. 제가 결혼하는 것은 보고…… 가셔야 할 거 아닙니까. 정말 제가 황태자비감을 데려와야만 눈을 뜨실 겁니까?”
항상 간절하게 말하던 것이었다. 결혼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큰아들을 위해서 황제가 항상 바라던 것.
그래서 황후는 아들을 위한답시고 황태자비감 간택을 벌이며 자신이 아들들을 차별하지 않고 레나드까지 잘 챙긴다는 인상을 심어 주려 했다. 그런 퍼포먼스로 포장하여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속내를 한 번 더 감추는 대안이었다.
황태자비감이라는 말에 클로이의 눈이 번뜩였다.
자신이 제안한 영애들의 모임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자기 동생을 보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무슨…… 무슨 황태자비감을 말하는 건가요?”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던 빗이 중간에 멈춰 버렸다. 클로이는 결국 자신의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묻고 말았다.
레나드는 순간 눈을 번뜩였다. 지금 그녀는 황태자비감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확인하려 드는 모습을 보곤 확신했다.
아무래도 아도피트의 침략은, 우리가 계획한 날짜 안에만 일어나 준다면 성공적으로 처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가문이…… 데모트라고 했던가요? 그 가문의 영애였던 것 같은데.”
기묘한 뉘앙스였지만 레나드 또한 거짓말한 것이 아니게 되면서도 클로이를 안심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추천하려 하던 것도 데모트, 지금 로나르드가 반해서 클로이의 계획을 아군의 손으로 뒤틀게 생긴 것도 데모트, 그리고 레나드가 진심으로 황태자비로 삼고 싶은 여인도 데모트였다.
물론 앞의 둘과 뒤의 하나는 다른 인물이지만.
아마 클로이는 또 다른 데모트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꿈틀거리는 그녀의 턱 언저리가 보였다. 씨익 웃으며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레나드는 한발 물러났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최근 바깥의 분위기를 보러 자주 나다녔더니 서류들이 쌓였더군요.”
“그래요. 가 봐요.”
살짝 안심하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정말 이럴 땐 그녀의 약한 멘탈이 고마웠다. 물론 이런 여자한테 휘둘려 온 것은 조금 짜증이 났지만, 정신이 약하다고 다른 것들까지 다 약한 것은 아니니까.
“그럼.”
레나드는 슬쩍 눈길만 던지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뒤돌아 나왔다.
복도를 나가는 길에는 생각지도 못한 로나르드를 만났다.
제가 업무상의 일로 찾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이 크게 없었기 때문에 지난번 저 대신 영애들의 모임 자리에 가도록 부추긴 때 이후로 처음 마주치는 것이었다.
“형님!”
이제까지 잘만 관리하고 있던 레나드의 미간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저놈이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특히나 저렇게 반갑다는 듯이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타입이지만 뭐든 주어지면 그래도 열심히 하는 편이어서 재무를 맡긴 상태였는데…… 이런 부분에도 도움이 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그때 형님이 바깥에 일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 자리에 갈 수 있게 알려 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레나드는 자신의 표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이 녀석 진심이었다. 그것도…… 자신에 대한 태도까지 바뀌게 할 만큼.
아스테리아와 혼인하여 제국 밖으로 나가 주면 그게 최고의 시나리오인데…….
“그래?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지?”
완벽하게 모르쇠 작전을 펼치는 레나드의 모습에 로나르드는 더 신이 나서 마구 떠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제 운명을 만났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여신에 버금가는 영애예요. 아, 형님은 신전에서 봤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렐린의 꽃을 작년에 이어 올해에 두 번째로 맡았다고 하니까요. 이렐린의 꽃에 연속으로 두 번 당선된 영애는 없었다는 것도 아십니까?”
신나게 떠들어 대는 그를 보며 레나드는 휘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열심히 막아야 했다.
“대단한 여인이군. 다음 신전 행사 때 한번 눈여겨보도록 하지.”
“안 됩니다! 그 영애는 제가 찜했으니 절대 보시면 안 됩니다. 나중에 황궁으로 오시면 그때 보십시오.”
완전히 자기가 가질 거라는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아스테리아의 허락만 받아 오면 클로이가 뭐라 하든 자리는 살려 줄 수 있을 텐데.
레나드는 대꾸 대신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