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레나드는 그날도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있었다. 예언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으로는 계획을 다 세운 것인지 식당 주방으로 가 차와 디저트를 구한 레나드는 아스릴과 함께 신전 건물 바깥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준비해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늦은 점심 식사를 누군가 그 테이블로 가져다준 덕분에 그 자리에서 계속 먹고 차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궁금한 것도 많아…….”
그녀도 그랬지만.
그는 제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대화를 매끄럽게 한다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더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것들을 물어보고 대답을 하고 나자 그녀도 그에게 질문하는 것이 편해졌다. 단순히 말을 많이 나누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 제 마음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와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인지 그는 제게 데모트 백작가에 대해서 물었고,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있는 그대로를 전달했다.
다시 돌아갈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사람이건 제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제는 정말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이 이렐린의 신전과 사람들, 그리고 레나드가 그녀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 사람들, 데모트의 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기왕이면…… 이 성을 버리고 싶은데.”
“성을요? 데모트라는 성 말인가요?”
중얼거리고 있다가 들려오는 대답에 아스릴은 흠칫 놀랐다.
바깥의 숲 어딘가에 앉아 멍하니 있는 것도 좋지만 그냥 그렇게 시간을 때우기만 하는 것은 별로였다.
기왕 이렐린의 사랑을 받게 된 거, 그녀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예배하는 이들 앞에서 들었던 소리와 얼마 전에 들은 목소리가 이렐린의 것이라는 것은 알았으니, 이제 이전 생에서 레나드를 치료했던 힘이 진짜 신성력인지, 지금도 쓸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예언은 언제 올지 모르고 제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도움이 되고 싶으면 그 힘을 쓸 수 있어야 했다.
실제로 레나드가 군대의 주둔을 결정하자 대신관이 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신관 한 명을 군대에 합류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마 그들이 출발하면 그 사이에 섞여 동쪽으로 나갈 것이다.
“그럼 결혼을 하시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성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아스릴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쩜, 이렇게 옆에 사람을 두고 딴생각만 하는지…….
“아, 미안해요. 뭐라고 했어요?
곁에 있는 것은 미카엘이었다. 수업을 함께 듣기 위해 강의실에 나란히 앉아 있는 중이었다. 지금 시간에 무슨 수업을 하는지도 모르고, 수업에 간다는 미카엘을 따라 들어온 길인 것이다.
그는 오늘도 반짝거릴 만큼 멋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을 버리고 싶다면 결혼을 하시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혼자 생각하는 도중에 괜히 끼어든 것일까요?”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수업은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생각이 말로 샜는지, 아까 내가 생각했던 것의 답을 그가 말해 주고 있었다.
“아아…… 제가 생각을 입으로 뱉었나 봐요. 예,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결혼……하면, 성이 바뀌겠군요.”
겨우 상념을 벗어난 그녀는 미카엘을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약간 걱정하고 있었던지 그가 좀 더 크게 웃었다.
“성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해 본 것인데…… 사정에 따라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군요.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는 것이 간혹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런 경우라면 남자보다는 여성분들이 유리하겠습니다.”
결혼을 하면…….
몸과 정신은 온전하게 데모트가를 떠나왔지만, 그녀는 아직 아스릴 데모트였다. 신전에 들어오고부터는 되도록 아스릴이라고 이름으로만 소개하고 있지만, 명예 신녀는 귀족 영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함부로 성을 버릴 수도 없었다.
“이렐린께서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분이라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벌써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이들이 있을 정도라고 하는군요.”
신학생은 어린 10대들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3분의 1이 온전한 성인이었기 때문에 미카엘의 말에 아스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미카엘도 성인이었지.
“미카엘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나요?”
그의 나이도 고작 스물둘이라고 했다. 레나드보다 세 살 어린 그는 이제 막 영애들에게 신랑감으로서 인기 있을 법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음…… 신전에 들어오기 전까진 제가 결혼을 알 수 있을까 싶었어요.”
“아? 그래요? 왤까요. 미카엘 엄청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아스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그는 또 눈을 사악 접으며 웃어 보였다.
“제가 인기가 많은 것과는 상관없이, 제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게 문제였던 거 같아요.”
“아아…….”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라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매우 잘해 주겠다 생각하던 아스릴은 의외의 면을 본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하는 일은…… 제가 말하긴 뭐하지만 좋은 것이니까.
레나드를 한창 사랑했을 때엔 그 허름한 오두막에서 만나도 즐거웠다. 경계와 우스 호수를 함께 거닐고 오두막에서 깊은 키스를 나누던 그 순간들이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결혼. 역시 결혼은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해야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역시 로맨티시스트가 될 법한 남자였다.
“맞는 말씀이에요. 미카엘에게도 그런 여자가 얼른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역시 그녀의 말에 미소가 살짝 사라지는 걸로 보아 그런 여자는 아직 못 만난 모양이었다.
“자, 여러분. 늦어서 미안합니다. 바로 수업 시작해 볼까요?”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신관이 경쾌한 목소리를 내며 강의실로 들어왔다. 그도 그녀도 앞을 바라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지만 아스릴은 다시금 상념에 빠져들었다.
미카엘이 결혼 적령기라면, 레나드는 한창 결혼할 나이인데.
그래서 그렇게 황후가 열심히 황태자비를 알아보았던 것인가…….
그러고 보니 그렇게 사이도 안 좋고, 자기 아들을 황태자로 올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면서 어째서 황태자비 간택을 스스로 서둘렀던 거지?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음에도 아스릴은 집중을 하지 못했다.
이전의 삶이라고 달랐을 리 없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 황후라면, 이전의 삶에서 그에게 독약을 먹인 것도…… 그녀라는 얘기가 된다.
‘맙소사…….’
그를 끌어내리고 자신의 아들을 올린다, 라는 가정을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죽일 거라는 생각은 여태 못 하고 있던 것일까.
그의 고독한 싸움은 단지 자리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과도 직결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별로긴 한데, 그대가 내 곁에 있다는 게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명 같아서 기쁘군.’
그가 그렇게 말할 때만 해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별로라 했던 그의 말에 집중했었다. 예언을 듣고 전달해 주는 사람이 자기 곁에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것은 자칫 아스릴을 도구로 생각한다는 뜻으로 와전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런 뜻으로 오해할 수 있음에도 그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힘까지 주는 사람이라는 것에 감격해서.
‘성을 버리고 싶다면 결혼을 하시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미카엘이 해 준 말이 순간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선 간혹 사랑이 아닌 권력이 결혼의 기본이 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가 속한 황실은 후자에 속했다.
나는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아스릴은 내세울 이름이 없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만 할까.
“이렐린께서 가장 중요시하신 것은 결국은 사랑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어진다고 여겨지는 가족에게조차 사랑이 없다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리고 마니까요.”
문득 신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 그녀의 생각에서 단어 하나를 콕 집어낸 것 같은 강의에 정신이 후욱 그쪽으로 쏠려 버렸다.
“사랑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도 하나의 약속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약속과 사랑이라는 약속이 일직선을 이뤄야지 서로 상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거, 바람피우면 안 된다는 뜻인 거죠?”
아하하하 웃음소리가 한바탕 지나갔다. 지금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것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 사람과 사람 간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아우르고 있었다.
즐겁게 나누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아스릴은 아주 잠시 방황을 했다. 정리하고 나온 가족과의 마지막 끈, ‘데모트’라는 성씨와 사랑하는 남자 레나드, 그리고 결혼을 하기에는 너무 높은 벽 아그로드의 황실.
신전에서 평생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나드를 향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마음까지 받아들이기로 하니, 문제가 또 생겼다.
레나드를 사랑함에 있어서 벽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죽음을 피한다고 한들 그다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휴…….”
난데없는 한숨이 새어 나와 아스릴은 주변 눈치를 살짝 보다 이번에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옆에서 미카엘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