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명백하게도 아도피트 공국의 이야기로군.”
아스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나드는 어렵지 않게 대답을 구했다. 이렐린의 노래를 외우는 것, 그리고 신전을 나가는 것 외에 아스릴이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도서관의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가졌던 것이 바로 이 제국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냥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마을인지, 그리고 마을 이름이 무엇인지 적혀 있는 것이 다인 지도였지만,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기쁨일 때가 있었다.
그 지도에서 아그로드 제국 옆에 제국의 3분의 1 정도 크기쯤 되는 공국이 있는 것을 보았었다. 아도피트. 그들은 아그로드와 강 하나를 경계로 두고 있는 꽤 큰 공국이었다.
그리 척박한 땅은 아니지만 확실히 풍요로운 땅도 아니어서 역사적으로도 아그로드 경계 마을에 대한 침략이 잦았던 터라 동쪽의 파도라고 했을 때 아스릴도 바로 그곳을 떠올릴 정도였다.
“언제라도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보고 지켜보고 있던 차였다. 현재 왕위 쟁탈전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어서 불똥이 언제든 튈 수 있는 상황이야. 위험하긴…… 하지.”
그런데 그는 어딘지 고민에 잠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쳐들어올 것이다, 제국을 뒤흔들 것이다, 하는 말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제가 전해 드린 말이 크게 도움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네요. 괜히 부산을 떨었나요.”
이런 경우는 예언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든지 급작스럽게 덮쳐 오는 어마어마한 일일 경우에 힘을 가진다. 어차피 쳐들어올 것이 예견된 나라였다면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못하는 것 아닐까.
아스릴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레나드가 씨익 웃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별로긴 한데, 그대가 내 곁에 있다는 게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명 같아서 기쁘군.”
지금까지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레나드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억지로 지어 주는 게 아니라 정말 환한 미소라서 오히려 그 미소를 받는 아스릴이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언제든 쳐들어올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하면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는 것이다. 항상 군대를 그곳에 배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인데 말이지.”
대신관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스릴은 그가 하는 말을 유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들었다.
“정확하게 며칠에 올 것인지를 예언해 준 것은 아니지만, 예언이 온 것은 이제 곧 그런 일이 생길 거라는 이야기니까 그들이 쳐들어올 법한 곳 근처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황궁의 어느 누구보다 먼저 내가, 그들을 막는 공을 세우는 것이지.”
아스릴은 그 부분에서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대비 없이 당하지 않을 수 있고,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예언이 쓸모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는데, 레나드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피해를 줄이는 것 외에…… 다른 이점이 있나요?”
아스릴은 고민 없이 바로 물었다. 데모트 백작저에 있을 때야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이가 없으니, 이럴 땐 무얼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도서관을 뒤졌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스릴, 지금은 내가 병환으로 쓰러지신 황제를 대신하여 통치권을 쥐고 있지만, 황제도 아직 살아 계시고, 나는 아직 황태자다. 심지어 내 아래로는 황자도 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가 아닌 그분은 현재 황후이고.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레나드가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릴은 입술을 꼬옥 물었다. 이건 역사서에서 본 것 같은데…… 입에 올려도 되는 말인가 싶어 살짝 주저했다.
“지금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군요. 그래서…… 제가 전하의 곁에 있는 것이 도움이라고 말씀하신 거고요.”
레나드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꺼내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정답을 맞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황제 폐하는 살아 계시고, 그보다도 한참 전에 친히 황태자 책봉을 해 주셨는데, 그걸 어떻게 황후 폐하와 황자 저하께서…… 바꿀 수가 있는 건가요?”
역사서를 섭렵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옛날이야기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이 정말…… 실제로도 가능한 일이란 얘긴가?
걱정을 담고 일렁이는 아스릴의 눈동자를 레나드는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진지한 걱정이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 주었다.
이렇게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하고 그것을 표현해 주는 이가 몇이나 되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곁에 항상 있는 세드룬도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이겠지만, 그는 그저 묵묵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니까.
자신은 걱정이 한가득한데 대답은 없이 어딘가 흐뭇해 보이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레나드를 보며 아스릴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뭔가 잘못 생각했나요?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제대로 생각했다. 반신반의하지 말고 그대로 생각한 것이 답이다.”
잘 아는데, 하고 칭찬의 말을 해 주는데 그게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차라리 아니라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참 부질없네요. 아무리 피가 안 이어졌어도 황후 폐하면 전하의 어머니인데…….”
하고 이야기를 이어 가다 보니 자신의 부모, 데모트 백작 내외가 떠오른 것이다.
그쪽은 피가 안 이어졌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데모트 백작 내외는 자신의 생부와 생모인데 말이다. 아무리 첫째 딸이 귀하다 한들 어떻게 둘째 딸을 이렇게 하인보다도 못하게 키워 왔을까.
세상에는 이런저런 가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걸 배워 가는 과정인가. 그런데 그걸 왜 내가 배워야 하는 걸까, 왜 저렇게 잘난 남자가……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
레나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스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를 지금 무릎 위에 앉혀 품에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자신에 대한 진지한 안타까움과 자신의 삶에 대한 고찰 중인 게 뻔한 얼굴이라서. 그녀가 저를 걱정해 주었듯이 자신도 그녀에 대한 염려를 담아 바라봐 주었다.
“음~ 이 늙은이가 진작 빠져 주었어야 할 것을 잠시 잊었구만.”
그때 분위기를 비집고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나드와 아스릴이 그쪽을 바라보자 그제야 백발의 대신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렇게 가뿐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멋진 세월의 흔적이라고 여겼던 백발과 얼굴의 주름이 기괴해 보이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를 바라보며 살짝 굳은 아스릴을 내려다본 대신관은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고 나자 레나드는 곧바로 아스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던 아스릴이 그 손에 자신의 손을 얹자 그 손을 잡고 살포시 잡아당겼다.
“옆에 와 달라고 말로 하시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작게 중얼거리지만 아스릴은 순순히 일어나 그의 곁에 앉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레나드는 쿡쿡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가 놀라지 않게 허리에 살며시 팔을 둘러 끌어당겼다. 살짝 가까워진 이 거리만큼 설레는 마음이 살랑살랑 일었다.
“그것이 내게 행복한 일은 아니지만…… 역사상 나만 그런 불행을 겪는 것은 아니다. 권력을 갖는 일이라는 것이…… 본래 그런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
평탄하게 황제인 아버지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아 별다른 싸움 없이 황위에 오른 자들도 물론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이 몇 안 될 것이다.
권력이란 언제 어디서든 싸움을 도사리게 하고, 혈연 따위도 무시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는 것이다.
“저…… 아까 군대를 주둔시킬 거라고 하셨는데,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도 가시는 건가요?”
자신이 허리에 감은 팔도, 살짝 제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당기는 힘에도 별다르게 신경 쓰지 않는 아스릴이었지만, 걱정 가득한 질문을 하면서도 그를 올려다보지는 못했다. 살짝 굳은 몸으로 그에게 기울어진 것이 또 그의 입술을 씰룩이게 만들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곳에 나까지 가 있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아마 주둔시킨다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의 반발이 있을 거야. 최대한 아도피트에 발각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아스릴은 그의 말을 느리지 않게, 그가 느끼기에는 꽤나 빠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고독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인 모후가 이미 어렸을 때 별세하여 그런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자라지 못한 그에게 기댈 곳은 황제뿐이었다.
비록 그가 무뚝뚝한 아버지의 전형이기 때문에 가족의 따스함 같은 걸 느껴 본 적은 없어도 말이다.
그런 그가 쓰러졌을 때 괜찮은 척했지만,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긴 싸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결국 제가 해내야 하는 일이라 다짐했다.
경계로 나서기로 했던 때, 마치 기적처럼 자신을 해치려 한 독약을 발견했다. 그걸 놓쳤다면 아마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독에 당해 황궁 내도 아니고 바깥의 숲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허망한 죽음을 피하고서도 경계의 숲에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말이 날뛰게 되었을 때, 아주 잠깐 동안 그는 생각했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인가 하고.
그리고 그때 이 여인을 만났다. 이상하게 끌리는 여자를 이상하게도 끈질기게 쫓았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이 마음에 더하여 놓칠 수 없는 이유 한 가지를 더 찾았다.
“아직 일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미리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살포시 닿아 있는 아스릴의 체온을 느끼면서 그가 따스한 목소리를 내렸다. 그녀의 경직되어 있는 몸이 훅 풀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개가 톡 그의 어깨에 닿아 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