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황후 폐하, 로나르드 황자께서 오셨습니다.”
시녀장의 보고에 황제의 침대 곁에서 머리카락을 빗고 있던 클로이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하…… 정말이지.”
한숨부터 내쉰 그녀는 곧 표정과 마음을 갈무리했다. 생전 자신을 먼저 찾아오는 법이 없던 로나르드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왠지 선했기 때문이다.
“옆방으로 데려와요.”
“예, 알겠습니다.”
곱게 나가지 않는 목소리에 시녀장은 칼같이 대답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후는 침대 위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요. 알아도…… 하, 원망스러운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줘요.”
먼 곳을 떠나와 아그로드의 황후가 되었다는 것에 심취한 그때는 전혀 이런 상황들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비어 있는 자리에 안전하게 정착하고 살아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만 낳고 일찍이 타계한 황후 정도는, 시간이 더 지나면 금방 황제의 마음에서 쫓아내고 제가 그 안에서 살면 된다고 여긴 것이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몇 년 모시지 않은 이전 황후보다는 자신과 오랫동안 지낸 이들은 자신을 아그로드의 황후로서 대접했다.
하지만 단 두 사람, 황제와 황태자만이 그렇지 못했다.
황태자야 자기 어머니를 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다잡고 넘길 수 있었다. 그녀부터가 그간 그에게 진짜 아들처럼 마음을 쏟은 적은 없으니까.
준 적이 없으니 바라면 안 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황제는 달랐다. 똑같이 아들을 낳았고, 심지어 제가 곁을 더 오래 지켰는데…… 그에겐 언제나 전 황후의 그림자가 있었다.
레나드가 황태자가 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시기를 지나 그 자리에 욕심을 품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아그로드에선 내내 찾을 수 없었던 클로이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어머니.”
로나르드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자 얼굴에 반가운 미소를 띠고는 바라보았다.
클로이는 또 한숨이 절로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냥 보자면, 로나르드는 충분히 잘난 남자였다. 잘생겼고, 머리도 똑똑하고, 황제와 황후에게서 태어난 황자였다. 전혀 꿇릴 것이 없는 남자였지만 비교 대상이 나빴다.
레나드는 황제가 그리워 마지않는 전 황후의 아들인 데다가 뭐 하나 잘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전 황후를 향해 있던 황제의 눈이 황태자에게로 옮겨 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클로이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클로이는 로나르드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따라 사랑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클로이의 눈빛이 냉담했다.
“무슨 일이니?”
그리고 그녀의 이런 반응에 로나르드는 살짝 흠칫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 미소를 되찾고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지난번 영애들의 모임에서 제가 형님 대신 들어갔었잖습니까? 황태자비 후보를 만나는 자리였다고 들었는데……. 크흠, 그 혹시 후보가 결정이 되었나 싶어서…….”
로나르드는 떠보듯이 물어 왔다. 그가 결국 무엇을 원해서 저런 말을 꺼내는지 알고 있는 클로이로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말 그대로 그 영애들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걸 황자가 궁금해하지?”
자신이 지금 원하는 것이 그다지 얻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로나르드는 그녀의 냉랭한 반응에 잠시 넋이 나갔다.
“다섯 명이 전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중에 한 명 정도는 탐내도 되는 거 아닌가요?”
로나르드는 얼핏 예의 있고 소심하게 보이는 한편, 조금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거나 생각했던 것과 어긋나 버리거나 하면 바로 발끈해 버리는 면이 있었다. 여유와 자신감이 부족한 그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지금도 클로이의 냉담한 반응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것을 바로 버리고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클로이는 찡해지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 계획이 있는 것인데 어쩌자고 그 자리에 나타나서는 영애들에게 불쾌감만 주고……!”
이럴 때 클로이는 똑같이 속내를 감추지 않고 아주 직설적으로 말해 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해서 꼬투리를 잡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클로이의 날카로운 말에 깨갱, 하고 꼬리를 말 줄 알았던 로나르드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클로이는 그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가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는 본능적으로 그의 다음 말을 경계했다.
“왜죠? 불쾌감이라니, 황태자 대신에 황자가 나와 준 걸 가지고 대체 누가 불쾌해하는 겁니까?”
자신이 레나드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와 비교당하는 것을 질색하는 로나르드였다. 그동안은 그나마 그런 자신을 위해 뒤에서 고군분투하고 자신을 먼저 챙겨 주는 사람이 클로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대드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클로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레나드와 그의 간극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건 누가 더 잘났고 못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에 대한 예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들어와서 매우 공정하게나마 하고 나갔다면 모를까. 거기서 한 영애에게 그렇게 노골적인 반응을 보이다니, 이 어미를 욕보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영애들이 너나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느냔 말이다.”
클로이는 오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의 일은 곱씹을수록 화가 났기 때문에. 모임을 마치고 부랴부랴 영애들의 가문으로 황실의 세공사가 만든 브로치를 선물로 보내 주었다.
혹시나 그 일로 인해 기분이 상했을까 싶은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며 밤에 잠까지 설쳤던 것이다.
그랬는데 와서 사과는 하지 못할망정 왜 불쾌하냐니, 이게 지금 자신에게 와서 할 투정이냔 말이다.
생각지 못한 클로이의 반응에 로나르드는 얼굴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어머니는 엄하게 가르치는 경우는 있었어도 결국 그의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느낄 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그런데도 로나르드의 뿔난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눈앞에 자꾸만 아른거리는 아스테리아의 모습 때문이었다. 처음 그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내내 그의 눈은 아스테리아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그 아름다운 금발 머리하며 자수정을 닮아 반짝거리는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까지 어디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던 그 부드러운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각인이 된 듯 떨어지지를 않았다.
어딜 간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날 황궁을 떠나 준 바쁜 레나드에게 고마워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레나드가 그날 황궁에 남아 있었다면 아스테리아를 볼 일이 없었을 테니까.
“더는 거기에 관심 가지지 말고 너는 지금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해라. 지금 그거만큼 너한테 좋은 기회가…….”
“아스테리아 영애, 저 주세요!”
클로이가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딱 잘라 내려던 것을 로나르드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호한 얼굴과 목소리에 클로이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씩씩거리고 있는 그는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만 같은 격한 반응이었다.
“로나르드……?”
“지금까지 항상 형님이 먼저였고, 형님만 원하는 것을 제대로 가졌잖습니까. 거기 공작 영애도 있던데, 그 영애가 황태자비로 가장 좋은 거 아닙니까? 저도…… 저도 가지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자에 대한 소유욕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아들의 모습마저 클로이에겐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도 이제 제대로 사랑을 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것이 왜 하필 아스테리아인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자신을 향해서 씩씩대고 있는 괘씸한 아들을 바라보며 클로이는 이를 까득 물었다. 사랑을 알게 된 것과 지금 상황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랑은 모두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잘 들어라, 로나르드. 아스테리아는 레나드의 것이야.”
“어머니……!”
클로이의 말에 로나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다 결정된 듯이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마치 아스테리아를 물건 다루듯이 말하는 것에 놀라서였다.
로나르드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클로이는 두 눈을 더 부릅떴다.
“진짜 황태자비감은 벨파인 공작가의 시그넬 영애다. 그녀는 똑똑하고 집안 배경도 좋아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진짜 황태자비감이라니. 어머니, 설마…….”
로나르드는 그제야 클로이의 계획이 무엇인지 감이 잡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더욱 그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너도 그나마 머리가 좀 돌아가는 모양이니 다행이구나. 레나드의 황태자비로는 아스테리아가 될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는 너로 바뀌겠지. 그때 진짜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시그넬 영애다.”
그럼 아스테리아 영애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클로이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레나드의 부인이 어떻게 될지를 말해 줄까 봐, 그게 두려워졌다.
“제가…… 제가 아스테리아 영애를 마음에 두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흥,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영애를 들여야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지 않아. 새엄마라서 혼사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이 반드시 돌아올 거란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그의 어머니가 마냥 착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그녀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모자는 서로의 낯선 모습을 확인하며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날카로운 그것은 아직 타협점을 찾지 못해 서로에게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