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째는 확실하게-49화 (49/106)

49화

“이런 시간에 갑작스럽게…… 약속도 없이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의 등장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아스릴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신관은 마치 탈처럼 변함없이 미소 짓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옷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그는 문을 활짝 연 채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관님, 의논드릴 것이 있는데 자리를 옮길까요, 아니면 여기서 그냥 얘기를 해도 될까요?”

아스릴은 그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늘하게 스치고 가는 바람과 부드럽게 웃고 있는 대신관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가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 준다면 좋을 텐데, 중급 이상의 신관도 아닌 일개 영애 주제에 대신관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러는 것이냐 무시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그녀의 발목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럼 그럼, 안으로 들어오시게.”

하지만 대신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알아서 잘 따라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는 듯한 굉장히 편안한 행동이었다.

아스릴은 아직 활짝 열려 있는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문 안이 하나의 방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안에는 응접실처럼 벽난로와 소파가 놓여 있었다. 마치 신관 건물 꼭대기 층에 아담한 저택 하나를 올려놓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대신관은 활활 불이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릴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 옆으로 나와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난로의 장작을 건드려 안 타는 부분을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있는 그는 정면으로 앉아 있지 않았지만, 그 편이 더 좋았다.

왠지 그녀에게 말을 꺼낼, 좀 더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제가 올 것을 알고 계셨나요?”

아스릴은 회랑을 지나고 계단을 타고 올라오면서 대신관에게 제일 먼저 꺼낼 말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했었다. 결정했던 그 말을 삼키고 질문부터 했다.

대신관이 이곳을 찾아온 자신을 향해 꺼낸 말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홀에서 경험한 것이 누군가에게 꺼낼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먼저 들었기 때문에 아스릴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질문을 받은 대신관은 씨익 웃으면서 그녀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경직된 자세가 아니라 정말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무언가 상담을 하러 온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찾아왔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심장이 살짝 풀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렐린 님은 아니지만 신을 모시는 자로서 보내 온 시간이 50년이나 되다 보니 아무래도 느끼고 보는 것들이 좀 남다르긴 하지. 알지 모르겠지만 이렐린 님은 땅 위의 인간들과 힘을 나누고 소통하기를 좋아하시거든.”

대신관은 인자한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이 평화롭게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땅 위의 인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제게도 이런 기회를 준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레나드를 선택했어도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살 수도 있는 것일까…….

“제 어떤 면을 보셨기에…… 이렇게 찾아올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신 거예요?”

대신관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다시 입을 열어 그를 채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제가 이런 예언 같은 말을 듣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4개월의 시간을 거슬러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일까.

대신관은 자꾸만 급해지려는 아스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아스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에게는 이렐린 님의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내가 볼 수 있는 것이거든. 이미 황태자와 처음 만났을 때, 알고 있었다. 이 영애가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여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어려운 말에 아스릴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 그것은 제가 레나드의 독을 밀어낼 때 썼던 신성력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확인하고 싶은 것도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이런 힘과 새 삶과 예언 같은 것들이 앞으로의 제 삶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등등…….

하지만 그것을 다 풀어 가기엔 밤이 깊었다. 지금 이 이야기를 건넨다고 대신관이 말을 타고 황궁까지 날아갈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끈다고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여쭙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무례하게 올라온 것은…….”

막상 말을 꺼내려니 다시금 멈칫했다. 제발 내가 하는 말이 그에게 미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제가 방금까지 본건물 홀에 있었어요, 대신관님.”

아스릴이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대신관은 지그시 그녀를 응시했다. 미동도 없이, 그대로 앉아서 표정마저 한결같았다. 그가 자신의 말을 경청하자 아스릴은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그 전까지 황태자 전하와 있다가 배웅을 해 드린 뒤에 홀로 들어갔어요. 사람도 없고 문도 닫혀 있고…… 이렐린 님의 동상 아래에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음, 문이란 문은 다 닫혀 있었을 텐데.”

그녀의 말에 대신관이 적절한 추임새 같은 말을 던졌다. 그가 말한 그대로였다.

“네, 맞아요. 그럼에도 바람이 일었어요. 후우웅, 소리를 내면서.”

그때부터 아스릴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리로 전해지는 바람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고 있던 동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얗기만 한 돌덩이가…… 마치 사람처럼 색을 띠기 시작했어요. 피부는 핏기가 도는 연한 살굿빛이 되고, 머리카락은 눈부신 금발이 되어 반짝이면서 물결쳤어요. 하늘하늘한 옷자락까지 그 바람에 나부끼는 듯이…….”

그녀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대신관의 눈이 살짝 커졌다. 흥미로움이 넘치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니까 아스릴은 일단 자신이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대신관은 눈동자만 빛낼 뿐 여전히 아무런 말도 더하지 않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안타까운 얼굴을 한 이렐린 님이…… 몇 번이고 들려주었어요.”

아스릴이 그 목소리까지 흉내 낼 순 없겠지만, 몇 번이고 반복을 해 준 덕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말을 전달할 수 있었다.

명색이 이렐린의 노래를 전부 외우고 있는 머리인지라 그녀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 들은 대신관은 계속해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것도, 깊이 생각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이상했다. 미묘하게 감도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거야 원. 예언을 내리시다니. 이렐린 님이 이번엔 욕심이 조금 지나치셨던 것 같군. 아니면 그만큼 바쁜 일이거나.”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태연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그 내용에는 꽤 위험한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제 말…… 믿어 주시는 건가요?”

아스릴은 그의 분위기를 보고 실감했지만 한 번 더 물었다.

지금 자신이 말을 하고도 너무 허황한 것은 아닐까, 그가 미간을 찌푸리면 어쩌나, 미친 사람 취급 받으며 신전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온갖 걱정을 다 했다.

제 질문에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대신관의 반응까지 그냥 모든 것이 지금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이렐린 님은 이 아그로드 제국을 사랑하시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매우 좋아하시지. 신성력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겠지?”

왜 갑자기 신성력 이야기가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아스릴은 혼자 흠칫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렐린 님은 일부 인간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일부 나누어 주거나 기회를 주거나 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는 해. 참, 사람들을 잘 돌봐 주는 ‘인간적인’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힘, 기회, 목소리. 아스릴은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그 세 가지를 입에 담았다.

그사이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대신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고개를 꺾어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주름이 멋들어지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영애가 그런 사람인가 보군. 한번 정확하게 알아보러 가지 않을 텐가.”

그는 마치 소풍을 가자고 말하는 듯이 가볍게 제안했다. 아스릴이 긴장하는 것을 풀어 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곁의 누구와도 상관없이 자신이 그런 이야기들에 흥미를 느끼고 즐기고 있는 것인지…….

아스릴은 그를 따라 일어났다. 정확하게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비장한 얼굴로 그를 따라 일어나는 아스릴을 향해 또 한 번 안심이 될 듯한 편안한 미소를 지어 준 대신관은 백발과 주름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방을 나와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에도 아스릴은 그와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발을 재게 놀려야 했다.

대신관은 이미 신관 건물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인지도 몰랐다. 신을 만나면 물어보리라, 두 번째로 레나드를 얻을 기회를 받았는데…… 정말 제가 그것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온전한 행복을 바라도 되는지에 대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