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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48화 (48/106)

48화

「동쪽에서 파도가 밀려온다. 그것은 꼭꼭 숨겨 둔 날개를 펼쳐 굳건하기만 했던 붉은 대지를 뒤흔들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바라보자 그녀가 똑바로 아스릴을 응시해 왔다. 차가운 하얀색이었던 동상에 사람과 비슷한 색깔이 스미듯 배어 나오는 듯하더니 하얀 눈동자에도 푸른색이 돌기 시작했다.

웃는 듯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와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 대신 심각해진 여신의 얼굴이 그렇게 읊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어 있는 넓은 홀을 떠다녔다. 아스릴은 여기저기서 다시 울려 오는 듯한 목소리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잊으면 안 되는 말이라고 알려 주는 듯이 몇 번이고 귓가에 울렸다.

“동쪽…… 파도…… 붉은 대지…….”

아스릴은 이렐린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나 초점을 잃은 듯 응시하며 단어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홀을 휘돌며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하던 목소리는 이렐린의 표정이 바뀌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눈썹을 늘어뜨리고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강 표면이 평온하다 방심하는 순간 강은 파도를 일으켜 붉은 대지를 삼키고, 모든 것이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 것이다.」

목소리는 한 가지를 더 전했다. 슬픈 얼굴로 전하는 이렐린의 목소리에 아스릴의 턱이 파르르 떨리더니 감지도 못하고 있던 눈에서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말 또한 한동안 홀을 웅웅 울렸다. 아까 어디선가 불어오는 듯 들리던 바람 소리에 실려 몇 번이고 붉은 대지에 몰아닥칠 강의 파도에 대해 경고했다.

한 줄기, 또 한 줄기 흘러내린 아스릴의 눈물이 온 볼을 촉촉하게 적셨을 때 이렐린의 생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홀을 휘감으며 목소리를 몇 번이고 전하던 바람 소리도 서서히 잦아들고, 이렐린은 평소의 하얀 동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이렐린을 올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아스릴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하, 하아…….”

가까스로 숨을 내쉰 아스릴은 몸을 파르르 떨다 양팔을 감싸 안았다.

한기가 도는 홀에는 불빛 하나 없었다. 이제 손마저 푸르게 보일 만큼 어두운 이곳에서 이렐린의 동상은 어떻게 그런 생기 넘치는 빛을 뿜어내고 있었을까.

모든 것이 꿈인 것만 같았다. 마치 홀에 넋 놓고 앉아 있다가 잠들어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게 꿈이었든 아니든,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바람에 아직도 입에 맴돌고 있는 그 이야기는 아무것도 명확하게 지칭하지 않았지만, 무얼 말하는지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그냥 정말 꿈이면……. 꿈이 아닌들, 이걸 대체 누구에게 말할 것이며 누가 믿어 줄까.

바들바들 떨리던 몸도,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눈동자도 사악 멈춰 버리고 머리가 점점 돌아가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홀에는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 지금쯤 모두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었다.

이곳에서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이런 것을 들었다고…… 누구한테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렐린은 왜 나에게 이런 걸 들려준 것일까. 나는 지금 이렇게 누구한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로 헤매고 있는데.

아스릴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자신이 지금 꿈을 꾼 것은 아닌지. 이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지 생각이 쳇바퀴를 돌고 있는 사이에도 그녀를 서늘하게 만드는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바람결에 이렐린의 목소리라 믿었던 그 목소리가 흘러 다니는 것만 같았다.

아스릴은 입술을 앙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믿어 주든 아니든 전달은 해야 했다. 누가 됐든 전달을 해야 믿을 사람은 믿어 주고, 실행할 사람은 실행을 해 줄 것이었다.

“대신관님께 가야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면 단연 대신관이었다. 곧바로 레나드에게 전달하기에 앞서 자신이 한 이 체험에 대한 실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도 대신관일 테니까.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이 말을 레나드에게 전달하는 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이 말을 레나드에게 전달할지 전달하지 않을지에 대한 기로가 가장 최종적인 관문이었다.

“이렐린…… 이러려고 나하고 레나드를 자꾸 만나게 한 거 아니야?”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런 생각마저 들어 구시렁거리고 말았다. 성큼성큼 옮기는 발이 신전 본건물을 지나 바깥으로 이어진 회랑을 건너고 있었다.

신학생들이 기거하고 있는 학생 건물이 아닌 그 뒤에 자리하여 본건물과는 바깥 회랑으로 이어져 있는 저 건물에 신관들의 거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 층에 자신이 찾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직접 찾아가도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대신관님이 꼭대기 층에 산다는 이야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로만 들었던 터라 간다고 해서 진짜 거기에 있는지, 만날 수는 있는지, 심지어 꼭대기 층으로는 어떻게 올라갈 수 있는지도 몰랐다.

바깥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나가는 회랑의 곧은 길을 걸어 신관 건물 정문에 다다랐다.

어찌 됐든 부딪쳐야 알 수 있는 것들밖에 없었다. 아스릴은 쾅쾅, 문을 두드린 다음 힘주어 밀었다. 커다란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그 안에서는 따뜻한 훈기가 훅 끼쳐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본건물과 다르게 따뜻한 불빛으로 가득 채워진 홀이 나왔다.

알 수 없는 오한으로 떨고 있던 아스릴마저 따스하게 품어 주는 듯한 온기에 조급하고 초조하기만 하던 마음도 살짝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널찍한 홀에 들어서자 바로 앞에 계단이 보였다. 왼쪽으로는 통로가 있고 문 너머로 무언가 아늑한 공간이 펼쳐지는 것 같았지만, 아스릴이 지금 가야 하는 곳은 거기가 아니었다.

눈앞의 계단으로 바로 발을 올렸다. 더는 고민하는 시간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아무리 고민해 봐야 그 끝은 생각의 시작점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럴 바엔 움직여야 했다.

망설인다는 것은 이전에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쳇바퀴 돌듯 주눅 든 삶을 반복하기만 하던 것과 매한가지다.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은 내려놓고 스스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래야 뭐든 바뀌는 법이니까.

꼭대기가 몇 층인지도 모르는 채 아스릴은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한 4층에서 5층쯤 됐을까. 드디어 층계가 끝이 났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왼쪽을 돌아보자마자 감탄했다. 이곳은 실내이자 실외였다. 왼쪽으로 뻗은 복도는 양옆으로 벽이 반 정도 없었다. 총 네 개의 기둥 사이로 마치 창문을 내려고 했던 듯이 여섯 개의 네모난 공백이 있었다.

그 끝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얼핏 방문이라고 하기에는 커 보였지만, 아스릴은 그곳에 대신관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양옆으로 뚫린 벽으로는 사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숲을 지척에 두고 있는 이곳에 해가 지자 별다른 조명이랄 게 없는 바깥은 완전히 암흑이었다.

용감하게 옮긴 발은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추었다.

똑똑.

한번 마음을 먹으니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안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한동안 안에서 대답 소리가 들리길 기다리며 서 있던 아스릴은 사람이 나오기는커녕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자 다시 한번 노크를 했다.

똑똑똑.

이번에도 반응이 없으면 똑똑이 아니라 쾅쾅이 될 차례였다. 지금의 아스릴이라면 못 할 것도 없을 듯했다.

한 차례 센 바람이 지나가고 나서도 안쪽은 조용했다. 숨을 훅 내쉰 그녀가 이번엔 주먹으로 내려치기 위해 팔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누구지?”

그때였다. 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아스릴이 팔을 들어 올린 채로 굳어 버렸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며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이 사람이 문의 코앞까지 다가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저…… 명예 신녀로 들어와 있는 데모트 백작가의 아스릴……이라고 합니다.”

아스릴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평화로운 신전이지만 사전에 고지하지 않은 약속에 대해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릴의 대답이 울리고 나자 안에서부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끼기이- 나무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한 번 더 문과 아스릴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아아, 그래. 아스릴 영애. 이름을 듣자마자 황태자가 생각난다 했더니, 그때 함께 만났었지.”

백발 머리에 그린 듯한 주름이 멋들어지게 진 얼굴, 눈을 접어 가며 짓는 웃음이 인상 깊었던 대신관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는 어째서 명예 신녀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전혀 관심이 없거나 어쩌면…….

“올 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아니…… 늦었다고 하는 게 맞는 건가. 하여간 복잡하시다니까.”

살짝 푸념을 늘어놓듯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젓는 그를 보며 아스릴은 살짝 두려움을 느꼈다.

여유가 넘치는 그에게서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초월한 어떤 존재를 보는 듯한 기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신관 건물 꼭대기에는…… 신이 살고 계셨던 것인가요.”

그녀가 넋을 놓고 던진 한마디에 크들크들 웃는 것마저도 여유가 가득해 보였다.

그는 웃고 있는 듯 휘어 접혀 있는 눈꺼풀 사이로 아스릴을 관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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