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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47화 (47/106)

47화

“그럼, 또 오겠다.”

신전의 정문에서 레나드는 아스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아스릴의 눈동자는 그의 어깨 너머를 방황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매일 올 수 있으면 좋겠지만…….”

“황태자 전하의 본분은 신전이 아니라 황궁에 있지 않나요?”

그러면서도 끝까지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자신을 걱정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레나드는 그런 아스릴의 말까지 귀엽게만 보였다.

레나드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녀의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정말로 제게 존재하는 것인가 싶었던 그 마음은 말로 옮겨 놓고 보니 강력한 힘을 가지고 레나드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벌써부터 자신의 심장을 이 여인이 움켜쥐고 있는 듯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자신의 마음은 이렇게까지 뒤흔들어 놓고 왜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밀어내고만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황궁으로 데려갈 궁리를 하면 되는 것인가.”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은 레나드가 아주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평온한 호수처럼 빨려들 듯한 매혹적인 빛을 내뿜다가 레나드가 그려낸 진심이 담긴 말에 파동을 일으켰다. 매끈한 수면 위로 마치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레나드는 그 순간이 심장이 조이는 듯이 좋았다. 제가 믿을 것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결국은 그에게 마음을 열어 줄 날을 기대해 볼 만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럼.”

레나드는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에 키스를 남기고는 휙 뒤돌아 가 버렸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넋 나간 듯이 바라보고 있던 아스릴은 문득 뒤를 돌았다.

무슨 정신으로 레나드를 배웅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그의 입술이 제게 닿아 왔을 때부터 아스릴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입술 위에 살짝 얹었다. 이게 첫 키스도 아닌데, 그와 입술이 닿을 때마다 아스릴은 무장해제가 되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래서 그래. 내가…… 그냥 키스에 약한 걸지도…….”

맙소사, 그렇다고 이걸 실험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실험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 아스릴은 자신의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마구 저었다. 키스에 약한 건 사실이지만, 그를 사랑했던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단 몇 달이었지만 말이다.

“지난번보다 오래 걸렸지만…… 더 적극적이 되어 버렸어.”

그는 직접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 거의 매일 그녀를 만나러 오두막에 들렀고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

특별할 것 없던 그 만남이 왜 그렇게 소중했을까. 그 당시에는 그저 깊은 제 마음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다시 돌아와 생각해 보니 그것이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소중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 반해 이번의 레나드는 달랐다. 독에 당하지 않았던 것부터 이전과 달랐지만, 아스릴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그는 행동으로는 저돌적일 만큼 아스릴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지 모를 만큼 처음부터 아스릴과 가까워지는 것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제가 무슨 마음을 품고 왔는지도 모르면서.

그러더니 기어이 이전 생에서도 한 적 없던 사랑 고백까지 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랑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그의 눈빛에 아스릴은 자신이 결국 흔들리리란 것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터덜터덜 신전 건물로 걸어 들어온 그녀는 정문을 지나 불 꺼진 홀로 들어섰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 버렸다. 숲을 살짝 나온 길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어서 머무는 내내 시간이 흘러 어두워지고 저녁 시간이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두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개인 기도를 할 사람들은 개인 기도실을 이용할 테고 아니면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이후의 시간에 이 홀로 돌아올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아스릴은 홀 중간 어디쯤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을 들어 쭉 훑어 올라가자, 고개를 젖힐 즈음에 여신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펄럭이는 천과 머리카락의 섬세함까지 살려 여신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은 동상은 그 시대의 천재 작가가 거의 한 달간 매달려 만든 역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자라고 했다.

역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신을 제대로 모시는 사람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거겠지.

잠깐 딴 길로 샜던 생각이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그 여신상을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을 이렇게 4개월 전의 시간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었다. 천재 마법사가 온다고 해도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그들의 능력 밖이었다.

“왜죠……?”

아스릴은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치는 듯이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제게 왜 이런 시간을 주시는 거죠.”

물론 지금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에는 감사했다. 변하리라 마음먹고 스스로 움직이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도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레나드와 엮이는 일의 최후에는 목숨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당연하게도 피해야 했던 황태자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그녀를 사랑했다. 열렬한 푸른 눈동자는 붉은 불꽃보다도 더 뜨겁다는 푸른 풀꽃을 내며 타올랐다.

그가 달라졌다는 것에 제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뭐가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 그때는 대체 왜 자신이 죽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살라고 다시 주신 목숨이 맞나요? 아니면 목숨을 피할 순 없지만 지난 4개월, 다르게 살아 보라고 주신 것이었나요?”

죽음을 피하기 위해 레나드를 피해 왔지만,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자신의 마음 또한 풀어놓아 보자 했지만……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릴 때면 그 마음이 다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결국 아스릴은 여신을 올려다보던 눈을 내렸다.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깊은 줄 몰랐다. 당연히 목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이 마음이 모두 떨어져 나가야 옳았다. 고민조차 없어야 했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은 결국은…… 목숨을 이겨 버리고 말았다.

“그게 정말 당신의 뜻일지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결국 저는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나 봐요.”

결국 긴긴 혼돈을 지나 이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곧대로 죽음을 맞이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어떠한 노력에도 그가 제게 다가왔듯, 어떠한 노력에도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끝에 후회하지 않도록…… 더는 밀어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후우웅-

아스릴이 마음속으로 곧은 다짐을 하는 순간, 문득 바람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몇 개나 되는 통로들로 통하는 문은 모두 닫혀 있는 상태였다.

바람이 통할 길 없는 홀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아스릴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여신상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질 듯이 홀의 의자들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과 다시 한번 마주쳤다.

후우웅-

또, 그 바람 소리다. 홀을 향해 달려오는 듯한 그 소리에 아스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다시 들어 이렐린의 두 눈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나의 아이여.」

목소리다. 이 목소리…… 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어.

아스릴은 기억해 냈다. 명예 신녀로 들어와 처음 신학생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러 왔을 때, 그들을 넘어다보는 좁은 통로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뭔가 안타까워하는 듯도, 꾸짖는 듯도 했던 목소리.

‘그녀’가 한 말이 무엇인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소름이 끼쳤던 그날의 경험, 그 느낌만은 선명했다.

기회가 어쩌고 도망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나의 아이여, 내 안쓰러운 아이. 드디어 도망가지 않기로 결심을 내렸구나. 단단한 마음이 느껴지는구나.」

아스릴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떨리는 두 눈동자에 그보다 심하게 턱이 떨리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어긋나 버린 시선을 다시금 옮겨 이렐린의 여신상을 바라보았다. 마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지금 내가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어떻게 이렐린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것일까.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위압감이 쏟아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소름이 돋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압도당하여 꼼짝 못 하게 묶여 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는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왜 자꾸 도망만 가고 있는 거야……?’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하던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기회, 도망……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 내용이야 불 보듯 뻔했다.

역시 제게 시간을 되돌려 준 것은 이렐린이었다. 신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납득이 가지만…… 그것이 기회였다는 것일까, 제가 도망간 것이라면 레나드밖에 없는데.

아스릴은 갑작스러운 일에 침착하게 생각을 하려 했지만 결국 흐트러져 버려 다시금 이렐린의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생생한 머리카락과 옷 주름의 표현이라는 설명은 많이 듣고 눈으로도 봐 왔지만…… 지금은 정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게 아니라면…… 나는 지금 이렐린, 아그로드 제국을 건국했다는 창조신의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아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아스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이제 입술 끝을 끌어 올려 아스릴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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