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스릴이 그렇게 나오자 미카엘은 꼬리 내린 개가 되어 물러났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아스릴은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인가 싶은 생각에 말도 안 걸고 놔두었더니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도 떼지 않고 있었다.
레나드는 역시나 구겨지는 미간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애틋한데 내가 갈라놔서 미안하군. 다음에는 셋이서 함께하도록 할까.”
레나드가 말을 툭 내뱉자 아스릴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어째선지 복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단단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생각 없이 던진 제안인데 저렇게나 깊게 고민하고 있는 거야……?
“휴…….”
그러더니 그녀가 갑자기 깊은 한숨을 푹 내쉬는 게 아닌가. 그것은 매우 답답했던 응어리를 토해 내는 것 같은 소리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레나드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비꼬지 마세요. 그렇게 할 마음 없으시잖아요.”
“그러는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말한 것인가. 나와 함께 있는 일은 내가 억지로 대신관에게 부탁한 것일 뿐 그대에게 주어진 사명 같은 것도 아닌데.”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그녀의 언사에는 거침이 없었다. 친근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의 당당함 같은 것이었다.
이번에도 툭, 그의 유치했던 말을 꼬집고 지나가는 그녀의 반응에 레나드 또한 말로 받아쳐 버렸다.
사실은 그게 기분 좋았으면서도.
“정말…… 전하는 자기감정만 내보일 생각 마시고 다른 사람의 감정도 좀 살펴보셔야 해요.”
아스릴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가 살짝 젖어 있었다.
레나드는 하마터면 그 눈을 감기고 그 위에 입술을 내릴 뻔했다.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이토록 젖어 드는 순간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이토록 다채롭고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다 보니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오늘은 신전이 아닌 그대에게 집중해 볼 날이군.”
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스릴은 못 이기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이 복잡하고도 미묘하고 예민한 관계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황태자는 오늘도 그녀에게 직진하고 있었다.
“신전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군. 우리도 항상 신전으로 들어오는 그 입구만 통과해 2층으로 바로 올라갔기 때문에 주변을 둘러볼 일이 크게 없었지.”
두 사람은 아까 앉아 있던 테이블을 떠나 숲의 좀 더 깊은 곳까지 함께 걸었다.
“그렇죠? 저도 미카엘이 데려와 줘서 알게 됐어요. 신전은 미로 같은 구조 때문에 숲 속에 있으려면 중정을 찾거나 아예 뒷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쪽보다는 이쪽이 좀 더 자연스럽고 널찍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면 이곳으로 모셔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또 다른 형태의 테이블과 의자 딱 두 개가 놓인 곳으로 온 레나드는 그녀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나를 생각해 주었다니, 좋은 현상이다. 항상 그대의 머릿속이 나로 가득했으면…… 좋겠군.”
레나드는 문득 그렇게 말했다.
아스릴은 저 나무 너머에서 반짝이고 있을 해를 바라보려고 고개를 젖히던 차에 다가온 직구에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의 안내를 굳이 그대로 잡은 것을 알고 있겠지?”
“아, 예, 그거야말로…….”
도망치는 자신을 잡기 위해서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애석하게도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고 그를 단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제 마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눈을 맞춰 주지 않는다 서운해했다.
심지어 그는 이번 생에서는 그녀에게 청혼은커녕 감정에 대한 말을 매우 아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매번 질투나 하고 그러면서. 아스릴은 어떤 말을 던져도 받아칠 수 있는 단단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나서야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거야 물론 내가 그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이다.”
아스릴은 그냥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이 정도의 말은 여러 번 들어 와서인지 면역력 같은 게 생겼다. 대신관에 앞에서도 말했을 것이고, 그가 제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미카엘의 앞에서도 그 말을 했다.
“예, 그렇죠. 덕분에 저도 신전 구경을 제대로 하고 있어서 재밌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신전을 구경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레나드는 이 알 수 없는 끌림과 불안함과 치미는 화와 두근거림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녀와 함께 그 이유를 터득하고 싶은 것이었고, 아스릴은 도저히 묻어지지가 않는 마음을 달래고 있는 것이었다.
아스릴이 살짝 체념한 듯 대답을 하고 나서 시선을 돌려 버리는 건 거기까지만 대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처음에는 그 퉁명스러움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제가 어떤 존재인데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은 아쉬워하지도 않는 것인가.
하지만 왠지 그 이면의 어떤 것이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그녀의 퉁명스러움 뒤에……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자꾸 집착하고 있는 거뿐이었다.
“전하…….”
“아!”
레나드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방금 또 퉁명스러운 말을 던지고 고개를 돌려 버린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일렁거리는 의미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사람 마음을 가르쳐 주는 강의가 있다면 미카엘과 함께라도 들으러가서 배우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야…….
커다란 한 손에 폭 담기는 작은 얼굴은 피하지도 않고 닿아 있었다. 심지어 그 손에 살짝 고개를 기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정확하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만나는 족족 말로 싸우고 서로 상처를 입히고 있었지만, 사실 삐뚤어지게 말해도 그 안에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제가 그렇듯, 그녀의 마음 구석에도 격렬한 미움보다는……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일렁임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아스릴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미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어떤 것이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스릴.”
레나드는 홀린 듯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단 세 음절 만에 끝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어깨가 경직되어 버렸다.
아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스릴이라는 부름에 그를 향해 있던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전에는 이 또한 기분 나빠하는 반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아픔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토록 미묘하고도 복잡할 지경이라 레나드는 살펴보고 맞춰 보고…… 그러는 것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그것은 제 성미에 맞지 않았다.
대답하는 것조차 잊은 채 자신에게 박혀 있는 두 눈동자로 대답을 대신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경계의 숲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뭔가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면 지금은 어엿한 백작 영애의 면모를 갖추고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미카엘뿐 아니라 신학생 중 여럿이 그녀에게 그렇고 그런 눈길을 보내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작정을 하고 고백하려 든다고 해도 그녀는 꿈쩍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황태자의 앞에서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면면들이 제가 알고 있던 영애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중에서 제일 크게 달랐던 것은 역시나 저를 보면 도망부터 치던 그 습관이겠지만.
“좋아한다, 아스릴. 어쩌면……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서 복잡한 고민은 그만 때려치우기로 했다.
본래 머리 쓰는 일은 곧잘 하고는 했다. 눈치도 빠른 그는 클로이와의 알력 다툼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런 방면은 눈치가 빠삭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무 소용 없는 사람을 만나고 만 것이다. 그것이 이런 감정……. 한 여성으로서 그녀를 마음에 담고, 그리고 곁에 함께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몸으로도 담고 싶은 마음이 단단한 철옹성이었던 그를 무너뜨리고 만 것이었다.
아스릴의 푸른 눈동자가 전에 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푸른색을 더 짙게 만드는 눈물까지.
레나드는 그녀의 반응을 보면서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받고 있었다.
그녀의 한 꺼풀, 그녀의 두꺼운 담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대의 반응을 살피고 생각하고 따져 보려 했던 것은 다 부질없었다. 나는 그쪽으로는 전혀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어.”
레나드는 당장 뒷걸음질 칠 것 같은 그녀의 허리에 가볍게 팔을 둘렀다. 뒤로 물러나지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게 그녀를 가두었다.
“이제는 그냥 이야기할 것이다. 당당하게. 내가 그대를 좋아하고 있음을, 이 마음을 발전시킬 생각임을, 아스릴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것을.”
레나드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내렸다.
놀라서 살짝 벌어진 입술이 아까부터 그의 시선을 잡아채고 있었다.
오두막에서의 밤이 떠올랐다. 살짝 마른 듯했던 입술이 지금은 촉촉하게 그의 입술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짙은 키스가 되기까지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