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신성력이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어요?”
너무나도 따스한 햇살에 눈을 잠시 감았다가 아주 깊은 잠의 수렁에 푹 빠질 뻔했던 아스릴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톡 건드리자 눈을 번쩍 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는 나른한 시간. 이때의 햇살은 참 깨끗하면서도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와 방 정리를 마친 아스릴은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수업을 듣다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게 바로 저 신성력 혹은 성력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는데…….
아스릴은 눈을 떠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미카엘을 바라보고 주변을 삭 훑어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제 곁으로 다가와 함께 산책할 것을 제안한 그를 따라 도착한 이곳은 건물 밖 정원이었다.
신전 건물의 미로 같은 내부만 열심히 돌아다니던 차에 미카엘을 따라 나왔더니 신전 건물 바깥으로 매우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너무 험한 길도 아니고 돌아다니기 좋을 정도로만 정돈된 길이 참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중간중간 쉬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 같은 것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게 너무 튀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것이 정말 좋은 점이었다.
이렐린의 노래를 외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렐린을 모시는 이들은 자연을 해치는 것을 싫어했다. 물론 신전에 사계가 없이 1년 내내 온화한 것은 그런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 사계를 해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신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계절은 똑같이 흐르고 있었다.
해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잘 어우러지도록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심이었다.
그 생각이, 그리고 그 생각이 저변에 깔린 이야기들이 아니었다면 그 많은 내용의 이렐린의 노래를 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억지로 외우게 한 것이 시작이었을지언정, 아스릴은 그 내용을 꽤 많이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이렐린의 노래에도 가끔 나오기는 해요. 성력, 이라고…….”
“맞아요. 그런데 그게 책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을 만큼 흔한 능력은 아니에요. 신화에서도 아주 일부만이 그것을 ‘힘’으로서 쓸 수 있었죠.”
그랬다. 수업 시간에 나왔던 신성력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던 것은 그 이유였다.
그렇지만 신학을 배우는 어린 학생들 사이에선 매우 멋진 힘이라는 느낌으로 이것이 꽤나 인기 있는 단어인 모양이었다.
“다들 자신이 그 신성력의 주인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거예요. 멋있잖아요? 신을 모시는 사람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쓸 수 있는 이렐린의 힘이라니.”
미카엘은 두 눈을 예쁘게 휘며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는 이 숲 속을 따뜻하게 녹이는 햇살 같았다. 보고 있으면 편안해져서 또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아스릴은 의자에 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수업을 들으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에 대해 어떻게 하면 남 얘기인 듯, 이론을 배우듯 물어볼 수 있을까에 대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질문할 차례였다.
“엄청 소수의 사람이 가지는 거라면…… 신성력이라는 건 엄청 대단한 힘이겠네요?”
수업 내용의 연장이기도 해서 그녀의 질문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손끝에 머물던 그 뜨거운 열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요. 엄청난 힘이에요. 보이지도 않고 오로지 느껴지기만 한다는 그것은 사람의 감각으로는 쉽게 쫓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요. 다만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걸 뜨겁게 쓰고 싶다 하면 열감이 느껴지게 하거나 실제 눈으로 보기에 불꽃에 가까운 걸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죠.”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대단하다 싶은 순간 또다시 그녀의 손바닥으로 진한 열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람을 치료해 주기도 하나요?”
불멸에 가까운 개념을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신을 모시는 오랜 역사 안에는 나의 신이 불멸하기 때문에 그 힘을 나눠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물론 아스릴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불멸에 대한 건 아니었다.
다만 따뜻하게 열이 오르고 기운이 흐르는 듯하던 제 손이 한 남자의 몸에서 독을 몰아내는 것 같았던 그 느낌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의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거나 부러진 뼈를 붙게 하는 방법은 없다고 들었어요. 다만…… 그 힘이 따로 붙잡을 수 있는 독특한 것이 있다면,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요. 예를 들면, 독에 당해 피부에 퍼지고 피에 녹아든 독을 신성력으로 몰아내 주는 것이죠.”
아스릴은 잠깐 어깨를 흠칫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확실하게 그녀가 경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어디가 아픈 거야…… 어디가…….’
이번이 아닌 지난번의 생. 아스릴이 처음 만난 레나드는 곧 죽을 것처럼 아픈 상태였다.
레나드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아까보다 훨씬 진정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채 시익시익 일정한 호흡을 내기 시작했다.
‘아파…….’
‘에? 예? 아파요?’
중얼거리는 그의 작은 목소리를 잡아챈 아스릴은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아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톡 대었다.
아스릴은 그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려 하다가 맞닿은 이마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맞닿은 맨살이 점점 열기를 더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마로 뭔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서운 느낌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기운 같은 게 흘러 들어오고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드는 것 같았다.
‘독에…… 당하셨군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은…….’
아스릴은 말끝을 흐렸다. 이마에 피어오르는 뜨거운 기운, 이걸 믿고 움직여 봐도 될까 하는 아주 위험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아니, 이대로 두면 레나드가 죽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저기, 독이 엄청 빨리 퍼지고 있어서, 나름…… 조치를 취해 보려고 해요. 괜찮……아요?’
그때 레나드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으나 오뚝한 코와 선이 분명한 입술을 가리지는 못했다.
눈을 뜨면 참 잘생긴 얼굴이 될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웃는 얼굴을 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스릴은 그의 이마에 천천히 제 손바닥을 얹어 보았다.
그런 것을 생각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는 순간 마음에 아주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처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워 있는 레나드는 어딘가가 조이는 듯한 압박을 느끼는지 이따금씩 숨을 멈추는 것 같았다.
자꾸만 마음이 급해지려고 해서 아스릴은 마른침을 삼켜 가며 맞닿아 있는 손과 이마의 감각에 집중했다.
뭔가를 넣어야 하나? 아니야. 이걸 빼내야 하겠지? 아니, 밀어 넣어서 빠져나가게 해야겠다.
실체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스릴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했다. 이 손바닥을 통해 뭔가를 막 집어넣어서 레나드의 몸 안에 있을 독기를 바깥으로 빼내는 상상을 계속했다.
그것이…… 이상한 부분이었다. 그 힘을 내가 느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것.
레나드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느라, 그리고 뒤집어진 시간을 다시 보내느라 잊고 있었던 선명한 기억이 완전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상상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열기는 그녀의 몸 어딘가를 흐르고 흐르다가 손바닥을 통해서 그의 몸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떠난 힘이 그의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안에서도 제가 상상한 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면서 계속해서 열기를 넣어 주었다.
‘큽……!’
그의 몸이 어느 순간부터 움찔거린다 싶더니, 레나드가 약하게 기침을 할 기세를 보였다.
이거다. 레나드는 지금 이걸 토해 내야 하는 거야. 그게 독인지도 모르는 아스릴은 그걸 너무도 자연스럽게 알아채 버렸다.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 주었다.
뜨끈한 열기가 손을 따라 그에게로 흐르기를 수 분째,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를 느끼며 지치지도 않고 힘을 쏟고 있을 때였다.
“쿨럭! 큭, 하악! 쿨럭쿨럭!”
갑자기 레나드가 격하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선명한 붉은색이 아니라 아주 검붉은 색이었다.
독이…… 독이 빠져나왔어……!
아스릴은 그를 지켜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아까 아물었던 입술이 다시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지만,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입 아래가 피투성이가 된 레나드는 조금 지나자 기침도 멎고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아스릴은 그것까지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하, 하악. 하아…….’
‘괜찮아요? 이제 좀 정신이…….’
어, 어라…… 이게 아닌데. 눈을 뜨는 그를 바라보며 이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점멸하듯 깜빡깜빡하더니만 아스릴의 몸은 그대로 옆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
그것이 그녀가 지금 떠올리려 애쓰는 기억이었다.
신성력 혹은 성력이라고 불린다는 그 어떤 힘.
이렐린을 모시는 전설 속 등장인물들에게조차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 힘…….
그런데 미카엘이 설명해 주는 내용 가운데 정말 그 힘이 있었다.
“설마…….”
내가 사용했던 그것이 설마 성력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제가 뭐라고 신의 힘을 갖는다는 말인가. 그런 대단한 존재였다면 20년의 삶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시간을 거스른다는 어마어마한 경험을 하긴 했지만 그런, 그런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