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벌써 신경전이 한창이었다.
황궁 앞으로는 화려한 마차들이 모여들었다. 오늘의 모임이 어떤 것인지 알면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에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아스테리아는 저 앞에 도착한 마차가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어 내리면서 자신감 넘치게 머리카락을 사악 넘겼다. 먼저 내려 기다리고 있던 영애 세 명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슬쩍 그쪽으로 눈길을 주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던 영애들이 입을 가리거나 눈을 피하기 급급했다.
“이렐린의 꽃이야.”
“지난번에 실수했었잖아?”
“그거 아파서 그랬던 거래. 열이 펄펄 끓는데도 올해 첫 신전 행사라 우기고 우겨서 나왔던 거라더라.”
영애들이 속닥이면서 이쪽을 흘깃거리는 것이 다 보이고 다 들렸다. 백작은 기지를 발휘해서 그녀가 굉장한 고열로 제정신이 아닐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둘러대었다.
신전에서도 딱히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었다.
“아스테리아 데모트입니다.”
황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장에게 자신의 이름을 대자 시녀장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 한 분이 오시면 함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막 도착하신 듯하니 잠시만 이쪽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순서가 마지막이라니, 안 봐도 알 듯했다.
자신에 대해 한창 쑥덕거리던 영애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바로 뒤돌아 마지막으로 도착한 영애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벨파인 공작가의 마차 앞에서 옆의 영애들도 눈을 빛냈다.
그곳에서는 수수한 갈색 머리카락에 밀색 눈동자를 가진 시그넬 공작 영애가 내렸다.
그녀를 결코 못생겼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녀가 예쁘냐고 묻는다면 대번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스테리아의 옆에 있는 영애들도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예쁜 얼굴이다 할 수 있겠지만……. 시그넬은 좋게 말해 봐야 수수한 정도?
‘결국은 공작 영애다 이거지.’
벨파인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아무리 날고뛰는 아스테리아라 하더라도 백작 영애일 뿐이니까.
‘하지만 선택받는 일에 있어서 그건 문제가 안 되지.’
실제로 지금 이렇게 함께 초대를 받은 상태이니까. 가문으로만 밀고 나가자 했다면, 이런 자리는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같은 기회라면 오히려 아스테리아에게 훨씬 유리했다.
자신이 옆에 있는 영애들보다 훨씬 낫다는 건, 지나가는 마구간지기가 봐도 알 수 있을 법한 일이었으니까.
“그럼 영애님들, 저를 따라오시죠.”
시녀장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겨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곳은 황후전입니다. 현재 황후 폐하께서는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별궁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하고 계시지만, 이곳에서 특별히 영애님들을 맞이하겠다 하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바란다 꼭 전해 주시게.”
굳이 열을 짓지 않고 무리 지어 따라가는 속에서 시그넬 공작 영애가 그렇게 말을 했다.
아스테리아는 마치 자기 순서를 빼앗긴 것처럼 분해했고, 다른 영애들은 그녀의 예의에 감탄했다.
“걱정을 보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잘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녀장은 가히 우아할 만큼의 예법을 지키며 그녀들을 1층 안쪽으로 안내했다.
황후전은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한 자리로 응접실을 개방했다. 다섯 명의 영애를 모아 이야기를 나누기에 너무 큰 홀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커다란 양 문을 한 번에 열어 주자 안에서는 아주 화려하고 예쁜 꽃들로 꾸며진 멋들어진 응접실이 나타났다.
모두들 아름다운 광경에 설레고 들뜬 마음이 들었으나 애써 갈무리하고 표정을 관리하며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게 단속했다.
그들의 자리는 지정된 곳이 있어서 각자 안내를 받았다.
상석의 자리 하나를 두고 상석의 오른쪽에 시그넬과 다른 영애 하나, 그리고 왼쪽으로 아스테리아와 다른 영애 둘이 순서대로 자리했다.
아스테리아는 두 번째 줄부터 앉아 있는 영애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실 어디의 무슨 영애였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눈앞에서 평온하고 기품 있게 앉아 있는 벨파인의 시그넬. 저 여자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자리를 잡고 바로 응접실을 빠져나간 시녀장이 다시 돌아왔을 때, 시녀장의 뒤로 황후가 나타났다.
황후 폐하께서 오셨다는 말을 시녀가 꺼내기도 전에 아스테리아는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모두들 반가워요. 이렇게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마워요.”
황후는 역시 병환에 시달리고 있는 황제의 병간호 때문인지 약간 피곤한 기색이 묻어나는 얼굴로 나타났다.
하지만 본래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까지 해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모여 있던 영애들은 모두 황후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모두 첫 번째로는 레나드라는 사람을 노리고 이 자리에 왔겠지만, 가문의 입장으로 생각하거나 두 번째로 중요한 이유라고 한다면 과연 ‘황후’라는 이름을 가져야 하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지금은 황태자비로서 후에 황후가 될 자리에 오르면서도 그토록 완벽한 남자를 자신의 반려로 맞이하는 것이다. 몇백 년 동안은 다시없을 최고의 기회가 아닐까?
황후가 이렇게 조용조용히 황태자비 간택에 대한 이야기를 흘리지 않고 대대적으로 모집을 하거나 했다면, 아마 제국 전체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결국은 정보의 승리이고, 정보를 가진 이들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황후가 원하는 황태자비 후보의 자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데모트 백작이 이야기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 기회를 잡아 준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 나머지는 네게 달렸다, 잘하고 와야 한다, 신신당부하던 아빠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올라 아스테리아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희야말로 이렇게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생에 다시없을 자리인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도 매우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다시 또 인사를 올린 것은 시그넬 영애였다.
그녀는 무척 반응이 빨랐고 음성이 온아했으며 그 태도까지 우아해 보였다. 아름답고 고아한 황후의 옆에 있음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그런 힘이 있었다.
“시그넬 님의 말씀대로 저희야말로 이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번은 없을 자리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은 밀리고 싶지 않았다. 황후와 시그넬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면 그곳엔 응당 자신의 자리도 있어야 했다.
시그넬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던 황후의 눈길이 이쪽으로도 향했다. 황후는 조금 더 지그시 아스테리아를 바라보다 생긋, 짧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스테리아는 이것이 마치 어떠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황후가 제게 조금 더 깊은 시선을 준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뭐야 지금 그 눈빛은? 나 설마 황후 폐하가 원래부터 점찍어 둔 사람인 거 아냐?’
설레발은 금지였지만 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었다.
아스테리아는 금방이라도 입술을 헤벌쭉 벌리고 웃을 것 같아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러고는 시녀들이 다가와 따라 주는 차의 향을 맡았다.
“비비란 잎의 차가 아닙니까? 귀한 차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그때 시그넬의 옆에 앉아 있던 영애가 차의 향을 맡더니 아는 척을 했다.
“어머, 바로 알아보는 것을 보니 로자린 영애는 차에 조예가 깊은가 보네.”
황후는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받아쳐 주었다.
잇, 자신은 신전에 관련해서만 배워 왔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조예가 깊지 않았다. 비비란 잎의 차도 이름만 들어 보았을 뿐 어떤 차인지 왜 좋은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홀짝거리며 차를 마시는 사이 여섯 여인의 대화는 깊어져 갔다. 신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황후였기 때문에 아스테리아에게 돌아오는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황후는 중간중간 아스테리아를 향해 한마디씩 말을 던지기도 했다.
“아스테리아 영애는 올해에도 이렐린의 꽃이 되었다지? 제국 역사상 연달아 꽃을 맡았던 영애는 없다고 모두들 아스테리아 영애가 대단하다고 입을 모으더군.”
아스테리아는 확신했다. 자신을 보며 아예 이렐린의 꽃에 대해 언급해 주는 것을 보아 황후의 마음속에는 제가 들어가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작년에 제가 맡은 바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음, 이렇게 아름답고, 이렐린의 노래는 전부 외우고 있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까지 어우러지니, 향후에도 아스테리아 영애를 대신할 만한 꽃은 없겠어.”
“과찬이십니다, 황후 폐하.”
살짝 홍조 띤 얼굴을 기울이며 소매로 가리자 한껏 조신한 모습이 되었다. 아스테리아를 바라보며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는 황후의 얼굴에서 아스테리아는 다시 한번 확신을 느꼈다.
간단한 다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잔과 접시가 조금씩 비워지고 나서까지도 얌전한 호호호, 오가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아, 그래요. 좋아요. 이제는 좀 주인공이 와 줘야지. 그렇죠?”
그때 문득 황후가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앞의 다섯 영애를 조금씩 돌아가며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후의 말과 행동을 보고 다섯 영애들은 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올 것이 왔구나. 옆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그는, 오고 있대?”
황후가 자신의 시녀장을 넌지시 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섯 영애는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시녀장은 확인을 하겠다고 응접실을 나섰다.
“음, 차 더 필요해요? 쿠키도 좀 먹어요.”
황후는 시녀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영애들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긴장감에 굳어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황후 폐하, 제가 인사라도 잠깐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때 응접실 바깥에서부터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