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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40화 (40/106)

40화

“역시. 오늘도 공부를 게을리하고 있지 않구나, 로나르드.”

영애를 모실 사람이 이미 있다고 호언장담한 그가 향한 곳은 바로 황자 궁의 뒷마당으로 난 길이었다.

말에 올라탄 채 위를 올려다보며 말을 건네자, 2층 테라스에 앉아 뭔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에 병약하다 느껴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는 레나드를 내려다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뭘 보고 있는지 이쪽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데 은근슬쩍 손을 놀려 보고 있는 것을 덮어 버렸다.

“모르는 일 하느라 추가로 공부하고 있는 동생 놀리러 오셨습니까.”

뽀얀 피부와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똑 닮은 사내였다.

항상 날카롭고 뾰족한 클로이의 인상까지도 닮은 그는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타입이었지만, 애초에 욕심이 많고 성정이 삐뚤어져 자신에게 이 일을 시킨 레나드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다고 들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일이 있다 하는데…… 내가 보기에 너는 그 일이 잘 어울리는 듯해.”

칭찬인지 아닌지는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말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그에게는 물론 건방지게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겠지만.

“그런데, 형님. 어디 가십니까? 로브에 말까지 타시고…….”

오늘 황태자비 후보들이 모인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신의 행색을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레나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곤란한 듯한 얼굴을 했다.

“오늘 황궁에 중요한 일이 있는데…… 부득이하게 황궁을 비우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를 세우는 것이 보였다. 황궁의 중요한 일에 반응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래서?’ 하는 얼굴로 대꾸도 없이 레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애들이 여럿 모이는 자리에 내가 인사라도 한번 가야 하는데, 못 가게 되었으니 황자인 너라도 가서 인사를 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레나드는 그에게 좋은 형인 척한 적 없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나쁘게 말하거나 험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신하를 대하는 것 같다며 질색을 하는 그였지만 레나드로서는 나름대로의 예우였다. 그나마 동생으로는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선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이었다.

‘선 넘고 까불면…… 그게 황후라도 못 참는다.’

어렸을 적 자신의 엄마를 믿고 자신이 형인 양, 적장자인 양 거들먹거리고 다니던 로나르드의 멱살을 붙들고 으르렁거리듯 속삭여 준 말이었다.

그 말은 멀리 있던 신하들 중 누구도 듣지 못했지만 레나드의 분위기가 매우 살벌했으며, 그 엄청난 위압감을 못 이긴 로나르드가 그 이후로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정이나 욕심까지 바뀔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로나르드는 그를 조심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런데 그가 황궁을 비운다. 그리고 황후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던 그날임을 떠올렸다.

심지어 알아서 자리를 비워 주는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 부탁하는 듯이 말도 남겨 주다니.

로나르드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지금 자기 일을 나한테 떠넘기는 거야?”

“황태자가 없을 때 그 일을 하는 이가 누구겠냐. 귀찮아하지 말고. 자시할 일은 제대로 해 줘야 하는 거야. 알겠어?”

레나드의 의도도 모르고 괜히 가기 싫은 척 신경질을 내는 로나르드와 그런 그를 짐짓 혼내는 척하는 레나드.

나름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모든 것은 레나드의 손바닥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무책임한 황실을 만들지 말고 무책임한 황태자를 만들면 되지.”

“또 대드는군. 나는 간다. 수고해라.”

레나드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말의 배를 두 발로 툭 찼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던 말은 발길질과 당겨지는 고삐에 투레질을 하더니 달리듯이 박차기 시작했다.

로나르드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빠르게 머리를 굴릴 것이다.

“그 자리에 황자님을 보내시다니요.”

세드룬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레나드는 그저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황태자비를 뽑는 자리에 로나르드 황자님이 나온다는 것은, 황태자의 자리에 대한 여지를 주는 것이라 해석되지 않겠습니까.”

세드룬은 걱정이 되는 마음에 한 번 더 물었다.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쉽게 넘길 일도 아니었다. 무언가 뜻이 있는 거라면 답답하게 하지 말고 알려 줬으면 했던 것이다.

말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대화를 편안히 나눌 수 없어서 잠시 질문을 멈추었지만, 세드룬은 머릿속에서 질문을 치울 수가 없었다.

* * *

“그래서 대답은 언제 주실 겁니까?”

신전에 도착하여 말을 마구간지기에게 맡기는 와중에 세드룬이 던진 질문에 레나드는 입을 벌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레나드의 눈이 끈질긴 녀석이라며 욕이라도 할 듯했지만, 꿋꿋한 얼굴로 세드룬은 설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여간 끈질긴 녀석. 황후가 내게 내민 것은 벨파인 공작 영애와 데모트 백작 영애였다.”

“데모트…… 말씀이십니까?”

세드룬이 익히 알고 있는 데모트가 있었기에 그는 제일 먼저 그분부터 떠올렸다. 그래서 의아한 얼굴을 한 것이었다. 그분은 바깥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둘째 영애였기 때문에.

“당연히 첫째 영애가 아니었겠는가.”

그 말에 세드룬은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흑마에게 물 한 모금 허락하지 않은 영애로군요.”

기억력은 좋지만 단순한 세드룬다운 반응이었다. 레나드는 핵심을 콕 짚은 세드룬에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리에겐 그렇지만, 대외적으로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고 이렐린의 꽃을 두 번이나 맡은 여인으로 아주 유명하더군. 심지어 이렐린의 노래를 모두 외우고 있을 만큼 똑똑하다고도 했고.”

세드룬은 으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들이나 영식들 사이에서 도는 이런 핑크빛 가득한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갔을 리가 만무했다.

“그 둘은 지위로 보나 평판으로 보나 아마 영애들 중 가장 조건 좋은 여인들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런데 그 두 사람과 내가 이어지는 것을…… 그 사람이 좋아할 것이냐 하는 거지.”

제국에서 가장 조건이 좋은 영애라 하면 당연히 자신의 아들과 이어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모두 그에게 내밀다니……. 세드룬이 생각하기에도 무언가 이상했다.

“게다가 마지막 히든카드인 것처럼 내놓았던 것이 바로 데모트의 첫째였어. 공작 영애가 아니라.”

그 부분에서 레나드는 슬쩍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황태자비를 결정짓는다는 것은 황제로서의 길을 더욱 공고히 한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자리를 마련했지. 결정을 함부로 내릴 수는 없으니 시간도 벌 겸, 내 모습을 비춰 주고 싶은 거면 그것도 망칠 겸 로나르드를 보내 버렸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바쁜 걸음을 움직여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세드룬이 보기엔 다른 이유보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스릴밖에 안 들어 있는 것 때문인 듯 보였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의뭉스러운 새 황후와 황궁 안에서 함께 살아온 레나드는 눈치를 보는 것에 있어 굉장히 기민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보살필 겨를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 같았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세드룬은 발 빠른 레나드의 뒤를 따라 살짝 뛰듯이 가면서 중얼거렸다. 아스릴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것은 느껴 왔지만, 지금 보니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조차 못 한 채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분이…… 허, 아름답기는 한데…… 허어.”

조금씩 숨이 차기 시작하는 게, 레나드는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저 앞에서 자신의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신전에 오면 그가 제일 먼저 들르는 대신관의 방이었다.

그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꼭 그 방에 들르는 것으로 신전에 왔다는 신고 같은 것을 한 뒤에 아스릴을 불러 달라는 심부름을 신관에게 시킨다.

그러고 나면 자신은 철저히 숨겨야 하는 아스릴과의 시간이 이어진다. 물론 모든 순간에 그가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 그들이 나누는 시간은 매우…… 건조했다.

하지만 분명히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세드룬이라고 남녀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분위기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미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자신의 주인이야 그녀를 살피며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어 하는 의욕이 충만했지만 조금 어설픈 면이 있었고, 아스릴이라는 영애는…… 얼핏 건조한 듯이 보였으나 둘 사이가 어색하지 않게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은 오히려 그녀였다.

그가 헛걸음을 하지 않도록 주변을 잘 살피고, 그가 그녀를 안내하겠다며 앞서 나가면 그 발이 닿는 곳을 살피는 여인이었다.

레나드의 시선이 아주 잠깐 다른 곳을 향하면 어김없이 그녀의 시선은 레나드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대체 왜 피했던 걸까.”

영애가 자신을 피한다고 시무룩하던 레나드가 떠올랐다. 덕분에 백작저의 담을 넘고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말이지.

하지만 세드룬이 지켜본 결과 그녀는 오히려 감정 바보 주인보다 훨씬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그녀를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알아내야 할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것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몫이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우선 그는 신관을 따라서 아스릴에게로 향하는 레나드의 뒤를 재빠르게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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