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데모트가는 아침부터 유난히 부산을 떨어 댔다. 다른 이들도 아닌 백작 부인이 새벽부터 일어나 하녀들을 닦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너무 순식간에 나가 버린 아스릴을 그리워하거나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필요한 것은 1년에 딱 네 번. 지금 당장은 아스테리아도 그녀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황태자비를 찾는다는 소식이 풍문으로 귀에 들려와 혹시나 하고 추천서를 넣어 보았던 것이었는데, 이런 소식이 들려오다니!
백작 부인은 자신의 촉에 스스로 찬사를 보내며 드레스를 관리하는 씨씨를 찾아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예, 마님. 어제 아스테리아 아가씨께서 고르신 드레스들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기로 모두 가져와 볼까요?”
씨씨는 역시 부르자마자 달려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채고 먼저 보고를 했다.
휴, 정말. 씨씨가 일은 역시 잘한다니까. 백작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차분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씨씨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씨씨, 왜 항상 아스테리아를 부를 때 그냥 아가씨라고 안 하고 꼭 이름을 붙여?”
예전부터 대화를 하다 보면 문득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다른 하인들한테서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유독 씨씨와 대화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백작 부인의 가벼운 질문과 다르게 씨씨는 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백작 부인이 음? 하는 소리를 내자 그제야 씨씨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다시 열었다.
“그래도 데모트가의 아가씨가 두 분이라는 생각에 항상 이름과 함께 말하는 것이 습관처럼 된 것 같습니다.”
뭔가 비장한 대답이라도 나오려나 싶어 주목하고 있던 백작 부인은 어깨를 툭 떨어뜨렸다.
“뭐야, 난 또. 하여튼 씨씨는 깐깐하다니까? 그런 애 이제 없으니까 편하게 불러도 돼. 자, 얼른 가서 드레스 가져다줘. 난 얘 좀 깨우러 올라가야겠어.”
얘는 엄마만 마음 급하지! 하고 투덜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급히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씨씨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는 어제 손본 아스테리아의 드레스를 가져오기 위해 움직였다.
“아스테리아? 너 아직도 자고 있…… 어머? 일어났네?”
백작 부인은 아스테리아가 아직도 자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눈을 뜬 채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멈칫하는 것도 잠시.
“얘는! 아침부터 준비할 게 많다고 했어, 안 했어. 응? 빨리 일어나서 향유 목욕부터 해야지. 빨리 안 일어나?”
움직일 생각이 아직도 없는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 백작 부인은 손을 잡아채 올리며 그녀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당겼다.
“아, 알았어, 엄마. 가면 되잖아.”
아스테리아는 살짝 신경질을 내며 몸을 움직였다. 잠을 설친 머리가 띵하니 울렸지만 그걸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백작 부인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욕실에는 마치 폭포처럼 느껴질 듯이 요란하게 욕조에 물이 채워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그녀를 욕조에 앉히고는 물을 잠그고 그 안에 향유를 뿌렸다. 손으로 휘휘 저으며 향을 퍼뜨린 그들은 각각 아스테리아의 어깨와 다리를 붙들고 매끈한 살결을 문질러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어서 준비하고 내려와. 응? 드레스도 골라야 하니까. 알았지?”
어째 저보다 더 들뜨고 급해 보이는 백작 부인의 기세에 아스테리아는 그저 꾸욱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황실에 가서 정식으로 황태자비 후보가 된다는 것에 들떠서 바로 생각을 못 했던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아니, 거기에 황태자 전하를 보러 갔던 거긴 한데, 왜 그딴 모양으로 나타나선……!
다시 생각하고 두 번, 세 번, 열 번을 생각해도 억울할 뿐이었다.
누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저같이 행동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흙투성이 약식 갑옷을 입고 흑마를 끌고 나타나서는, 그것도 미쳐서 날뛰다 쓰러져선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움찔대는 말을 붙잡으려 애쓰는 남자라니…….
무서워서라도 도망치는 게 맞지 않냐고!
신전에서 다시 마주친 황태자는 그 일을 들먹이며 자신에게 경멸에 찬 눈빛을 보냈었다.
아, 자존심 상해, 정말!
그녀는 나른한 향유의 향에 금방 잠들 듯 꾸벅이다가 하녀들의 움직임에 퍼뜩 깨기를 반복하다가 하녀들이 몸을 닦아 줄 때쯤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누가누가 올지는 모르지만 제가 거기서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겠다.
밤새 그의 미움을 더 살까 걱정하면서 잠을 설쳤던 것까지 짜증이 나는 경지에 이르자 아스테리아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런다고 내가 황태자비 자리를 놓칠 것 같아? 레나드 황태자를 다른 여자가 차지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가장 촘촘한 빗으로 가져와. 내 머릿결을 확실히 살려야겠어.”
아름다운 광택을 자랑하는 그녀의 금발 머리는 영애들도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이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 덕에 이렐린의 꽃에 더 적합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던지라 머리카락은 그녀의 자랑이었다.
“예, 아가씨. 방으로 돌아가셔서 드레스 고르시는 사이에 준비하겠습니다.”
하녀 한 명과 함께 욕실을 나선 그녀는 비장한 눈을 빛내며 걸어갔다.
* * *
“최근 신전으로 자주 출타를 하십니다.”
세드룬은 오늘도 외출 준비를 하는 레나드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넌지시 던졌다. 매일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2~3일에 한 번씩은 신전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의 외출이 매우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본래 황제도 그에게 신전과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이 박이도록 강조해 왔기 때문에 누구도 거기에 딴지를 걸 수가 없었다.
물론 세드룬은 달랐지만.
“이렇게 계속 비우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분이 언제 어디에 또 그러한 함정을 심어 두실지 모릅니다. 폐하께서 계신 방을 못 나오시는 척하지만 얼마든지 자유롭게 드나들고 계신다는 거,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가 건네는 말은 레나드 또한 항상 걱정하던 일이었다.
절대 궁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가 눈이 되어 사방을 지키고 있어야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몸이 축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고, 클로이가 하려는 것은 뭐든 앞질러야만 했다.
“그 정도 구멍이 있어야지……. 그분도 궁지에 너무 몰려 버리시면 극단적으로, 나올 수 있는 법이다. 이럴 땐 조금씩 풀어 주어서 자기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 줘야 다루기가 쉬워지는 법이지.”
레나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이미 외출을 위한 복장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 황태자비 후보 영애 연회를 기획하셨던 것입니까.”
아하하! 집무실 안에 경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간을 꽉 채우는 커다란 웃음소리에 세드룬의 눈썹이 움찔댔다.
“기획, 기획이라…… 그렇지. 이건 내가 기획한 일이지. 안 그러면 황후는 두고두고 명단을 그의 앞에 들이밀어 대며 한 사람을 고르라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날 또한 그랬다. 계속해서 그녀가 원하는 방향이 누구인지는 특정 짓지 못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날 그녀의 손에서 두 개의 추천서가 추려졌다. 벨파인 공작의 영애와 데모트 백작의 영애, 둘이었다.
하지만 둘을 그의 앞에 들이미는 순간 레나드는 역시나 아스릴이 떠오르고 말았다.
자신의 곁을 평생 지킬 사람. 황태자비.
황태자인 자신의 곁을 지키고 후에 제가 황제가 될 때 황후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올라갈 사람.
한 사람을 고르라면 단연 그 여인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끌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예쁘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야 황실에서 마주쳤던 모든 귀족 영애들이 그러하겠지만 그녀는 특별했다.
크게 꾸미지 않았음에도 눈동자는 어여쁘게 반짝였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금발의 선과 결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향유로 목욕을 하거나 짙은 향낭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은은하고 끌리는 향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스릴이었다.
“오늘은 스스로 발목 잡히셨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신전 가시는 건 내일로 미루셔야 하겠습니다.”
세드룬이 은근히 쌤통이다 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자 레나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전하?”
그 미소가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세드룬이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레나드는 시선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시종장!”
그의 부름에 시종장이 즉각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음. 신전에 다녀오겠다.”
“에, 예?”
“하오나, 전하.”
시종장과 세드룬 모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그가 황태자비 후보들의 연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준비를 하고 나가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터였다. 영애들을 따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이런 식으로 모으는 일이라 황태자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래서 지금 시종장은 시종들을 시켜 목욕물과 예복 준비를 서두르라 지시한 참이었다.
하지만 놀란 그들의 얼굴에도 아랑곳없이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난 그는 로브를 찾아 둘렀다. 말을 타고 신전으로 달리기 위한 준비를 하는 그를 보며 세드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시종장은 애써 한숨을 삼켰다.
“그리 걱정할 거 없어. 영애들을 예우 있게 모실 사람을 따로 준비했으니.”
그들의 체념 어린 눈동자들이야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레나드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로브 자락을 펄럭이는 훤칠한 그림자는 빠르게 황태자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