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태연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떨림은 조금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바로 어색하게 포크를 내려놓을 수는 없어서 레나드는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대는 식사를 마친 것인가. 적게 먹은 것 같은데…….”
아스릴은 그 말에 대꾸도 없이 가만히 포크를 들어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조금씩 입에 넣고 한도 끝도 없이 씹다가 삼키는 것을 보니 제가 다 마음이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자신은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서서히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온몸으로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은 그녀를 보는 게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동안 신전에 무심해서 이제라도 신경을 좀 써 보려고 한다. 신관들도 신학생들도 모두 뭔가를 부탁하기에 실례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더군. 그대가 그 역할을 해 주기 아주 적절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스릴은 느리게 움직이던 것마저 멈칫해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들어서 단순히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 뒤를 걱정하는 반응을 레나드는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저는 신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외로 덤덤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레나드는 결심했다. 저런 반응조차 그냥 넘기지 못하고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때문에.
우스 호수 오두막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어져 오던 이 감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없던 이야기라도 만들어서 그녀를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저 덤덤한 얼굴에서 미소를 끌어내고 싶었다. 그때 오두막에서 느꼈던 입술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명예 신녀가 되어 달라는 건 신전에서 먼저 부탁했다고 들었다.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이유로 수락했는가.”
레나드는 잔뜩 퍼 온 음식들을 꼭꼭 씹어서 꼬박꼬박 먹으면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던 레나드로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지만, 자신을 도와달라 부탁하는 입장으로 만들어 두었으니 확인해 봐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저…… 언니 때문에 신과 신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그녀는 결국 포크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처음 가져와 두었던 음식의 대부분을 먹은 상태였다.
레나드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자신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음식이 어느 정도 남았음에도 일어나는 그를 아스릴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럼, 아까 그 얘기를 조금 더 해 볼 겸 잠시 산책을 좀 하겠는가.”
“……벌써 배가 다 차신 건가요?”
그녀가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살짝 어리둥절한 레나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대가 다 먹은 것 같기에 식사를 마쳤다. 문제라도……?”
“아무리 풍요의 신의 신전이라지만…… 가져온 음식은 다 먹어야 하지 않나요? 다 버려질 것이잖아요.”
아, 레나드는 마음이 급했던 자신을 탓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단순히 무서워서 자신을 피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이 조곤조곤 나누는 이야기를 바로 근처의 사람들이 귀를 활짝 열고 엿듣다가 화들짝 놀라서는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의 행동에 반박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문제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어느새 그의 한 손에는 이미 포크가 다시 들려 있었다.
“그대의 말이 맞다. 명예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렐린의 신녀답군.”
그러고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어이없게도 그런 그를 보면서 아스릴이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알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인 듯했다.
레나드의 식사는 다시 한번 끝이 났다. 이번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음식을 확인시켜 주듯 가만히 있는 그를 보던 아스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게 잘 드셨네요.”
“그래. 맛있게 잘 먹었다.”
아스릴은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꾸욱 눌렀다.
그를 피하려고 했던 것은 살기 위함이었다. 실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상처받을 마음을 살리기 위해.
하지만 아무리 4개월 전으로 돌아와 기어이 신전으로 도망 나오는 것에 성공해 가족들에게서 해방은 되었을지언정 이 남자는 떨궈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이 남자인데 그를 떨칠 수 없다니…….
식당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타난 그를 확인한 아스릴은 결국 반쯤 내려놓았다. 악착같이 그를 뿌리치려고 했던 마음을 단념하는 순간이었다.
아까 신관을 대하던 태도가 꽤 많이 무서워 보였기 때문에 미카엘이 괜히 대들거나 말리다가 한 소리 듣지 않도록 보내 버렸다. 그는 이제 막 저를 알게 된 죄밖에 없으니까.
약간의 신경전이 오갈 땐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큰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이제 일어나 볼까.”
레나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스릴도 그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란히 움직이는 그들에게 학생들과 몇 있는 신관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들 함부로 말도 못 붙이는 황태자에게 아까부터 틱틱거리며 대답하고 있는 한 영애의 태도에 긴장해서 시선이 쉽사리 떨어질 줄을 몰랐다.
레나드는 단번에 문을 향해 나아갔다. 기다란 다리에 비하면 엄청 좁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아스릴이 거리를 두고 붙어 따라갔다.
황태자가 들어왔던 바로 그 문이었다.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아 거의 닫혀 있던 문인 걸로 기억하는데……. 부술 듯이 문을 열고 나타난 곳이 영 엉뚱한 곳이라 다들 거기에서도 놀란 것 같았다.
무조건 밀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충분히 이해했다.
오두막은 솔직히 그의 목숨을 구하겠다고 찾아간 자리였지만, 신전의 중정에서 맞닥뜨린 두 번의 만남은 정말…… 신의 농간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후에 정말 신녀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자신에게 다가온 첫 번째 위기인 듯싶었다.
아스릴은 그래서 조용히 그가 하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아직도 두근대는 마음을 숨기기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이대로는 저도 레나드도 쳇바퀴만 돌겠다 싶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냥 쭉 직진하는 그를, 아스릴은 주변을 돌아볼 겨를 없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사실은 정말 자신을 좋아해 줬는데…… 사람들이 저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걸까. 아스테리아와 아스릴…….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가 아스테리아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은 분명했으니까.
난 그때의 초라한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주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호수의 물결이 반가워 물을 들여다보았을 때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게 기억이 나서.
지금이야 그래도 말짱해 보이는 정도는 될 터이지만 그때엔 비교 대상도 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여전히 멋지네……. 신전에서도 이만한 사람을 본 적이 없네.’
그의 단단한 등과 넓은 어깨를 바라보면서 아스릴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뒷모습마저 멋있는 사람……. 신전에도 그와 대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미카엘 정도쯤……? 인상은 많이 달랐지만, 그도 정말 멋있다고 느꼈었다.
신학생이 되려는 이유는 뭘까. 그의 얼굴 정도면 바깥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을 텐데.
“이곳이다.”
아스릴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멈춰 선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그 등에 이마를 부딪힐 뻔했다. 가까스로 코앞에 등을 둔 채 멈춰 선 아스릴이 한 보 뒤로 물러나 커다란 몸으로 가려진 도착지를 바라보았다.
나무로 된 양 문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어디냐고 물어보려던 아스릴은 그가 문을 두드리자 입을 꾸욱 다물었다.
“안에 있는가.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데.”
그의 하대가 어색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하대를 하는 게 맞는 위치이시니.
이제껏 그렇게 침착하던 아스릴은 곧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아아. 황태자? 날 만나러 왔는가. 대신관이라면 안에 있다오.”
자신을 대신관이라 부르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레나드는 대신관이 안에 있다는 문을 열었다. 아스릴은 아직 만나 보지도 못한 대신관이었다. 명예 신녀는 대신관이 관여하는 일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저녁은 맛있게 먹었는가. 우리 학생 건물 식당이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하지.”
“어딜 가나 다 음식 맛이 유명하다 했던 것 같은데.”
“암. 그렇고말고. 사실 풍요의 여신이 지켜보고 있다는데 음식이 맛이 없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
“……그 논리를 잘 모르겠군.”
두 사람은 레나드가 안에 들어서자마자 가볍게 몇 마디를 후루룩 나누었다. 계급 같은 것을 떠나 굉장히 막역한 사이인 듯 느껴지는 대화였지만, 아스릴은 긴장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넓은 어깨에 살짝 가려져 있던 대신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의 주름이 인상 깊은 사람…….
아스릴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지만, 대신관은 레나드의 하대에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자연스럽고도 짓궂게 말을 받아쳤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늘 두 사람이 만났고, 같이 맛있게 식사를 했다는 것이군.”
아스릴은 레나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지만, 도저히 그의 곁에 앉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하게 이야기를 하니 오히려 저와는 더 동떨어진 세계의 사람 같았다. 그래서 더 멀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쪽은 신의 사자, 한쪽은 제국의 수호자라니.
아스릴은 소파에 마주 앉은 그들을 확인하고 레나드가 앉아 있는 소파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