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하아, 하아, 하아…….”
아스릴은 숨을 다급히 몰아쉬며 벽을 짚어 휘청이는 다리를 지탱했다. 빠르게 걷는 것만으로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너무 좋은 타이밍에 나타나 준 신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판이었다.
당장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마음이야 딱 4개월짜리에 불과하니까, 그것도 거슬러 올라가 없어진 시간이 되었으니까 금방 정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여겼다.
그걸 이기지 못하고 숲으로 가서 오두막에서 그를 봤었으면서, 처음 중정에서 만났을 때도 심장이 쿵, 떨어졌으면서,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호흡을 다 정리하고 났더니 이렇게 도망치고 있는 자신이 조금 한심해졌다.
이미 2개월을 살아 냈지만, 다시 시간이 돌아간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4개월 만에 끝날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인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 같았던 존재를 단 4개월 만이라도 스스로 반짝이는 다이아처럼 살아 보라는 의미에서인지.
“정말 4개월 만에 끝날 목숨 구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나 말 것이지.”
시간도 돌려줘 놓고는, 대체 왜 다시 그를 만나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명예 신녀님이시죠?”
자신이 어디로 뛰쳐나온지도 모르고 열심히 다리가 터질 때까지 걸어온 아스릴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너무나 극적인 반응에 덩달아 깜짝 놀란 남자 신학생이 초록 눈동자가 다 보이도록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미, 미안합니다. 명예 신녀…… 맞습니다.”
아스릴은 겨우 대답을 하면서 숨을 다시 한번 골랐다. 그리고 그를 향해 돌아서고는 눈을 맞추었다.
눈이 마주쳤던 것 때문에 제 키와 엇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가 자신을 보기 위해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목을 젖혀 그를 바라보자 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와, 레나드보다 클까? 얼추 비슷할 거 같아…….
순간적으로 레나드와 비교를 하고 있던 아스릴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런 표정의 변화를 신학생은 부드럽게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저는 미카엘 파비오스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 중 하나입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영애의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초록빛 눈동자가 사르륵 사라지며 그는 아주 해사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밀색 머리카락과 더불어 온화한 미소가 매우 따뜻한 사람이었다.
“……네, 실례했습니다. 저는 아스릴 데모트……라고 합니다.”
이 이름만큼은 떼고 올 수가 없었다. 제가 영애로 있으려면 반드시 이고 있어야 하는 이름……. 아스릴은 이름을 말하는 데에 잠시 멈칫했던 것을 깨닫고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곳은 정말 미로 같아서, 간혹 길을 잃어버립니다.”
아스릴의 이름까지 들은 미카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둘러보는 모양새가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통로가 살짝…… 미로처럼 이어져 있죠. 시작점에서 함부로 꺾지 말고 직진해야 대체적으로 길을 잘 찾을 수 있어요.”
홀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의 입구가 둥글게 나 있는 탓에 길을 믿고 직진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스릴은 한번 직진하면 끝까지 가고야 마는 성미라서, 정확하게는 길이 끝날 때까지 그저 한 곳만 보는 사람이라서 길을 잃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다니다 보면 종종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이 길 어딘가에는 학생들이 아니라 신관들이 머무는 곳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던데.”
어디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을까.
아스릴은 중얼거리는 그를 그저 빤히 올려다보았다.
레나드 외에 처음 만나는 또래의 남자였다. 백작저의 하인 중에도 젊은 남자는 헤르딘뿐이었다. 젊다고 해도 대략 서른 살은 넘었겠지만.
그제야 아스릴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도 그냥 막 뛰쳐나와 걸어오느라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라, 영애께서도 길을 잃으셨던 겁니까? 이거 곤란하군요.”
미카엘은 아무래도 길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을 만나 길 안내를 받으려고 인사를 했던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홀 아니면 학생들의 건물 쪽으로 안내를 해 줄 수 있었겠지만, 하필 오늘, 지금은 아니었다.
자, 생각해 보자. 아스릴은 그의 눈에서 시선을 돌려 그 뒤로 난 길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직진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망치는 순간에도 방향을 꺾지는 않고 그대로 직진만 한 것 같았다.
누구나 도망칠 땐 그렇게 하려나.
아무튼 이 길로 쭉 간다면, 중정에서 멀지 않은 응접실이 나올 것이었다.
우선 저 방향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길을 찾고 있는 듯한 모습을 미카엘이 지그시 관찰했다.
처음에는 허둥대더니 몇 마디 걸어 주고 웃어 주자 굉장히 빠르게 진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이면에 매우 복잡한 것을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일종의 방어기제……?
그녀는 사방으로 나 있는 네 개의 통로를 하나씩 지그시 바라보더니 마지막으로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가시고자 하는 곳이…… 학생 건물인가요?”
기숙사와 강의실 외의 공간들이 모여 있는 학생 건물, 그곳엔 아스릴의 방이 있어서 함께 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자신의 방을 찾아갔듯이 금방 그 길을 찾아냈다.
“맞습니다. 혹시 길을 찾으신 건가요? 길을 정말 잘 찾으시는군요.”
미카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또 한 차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마치 칭찬처럼 들렸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 이렐린의 노래를, 그 엄청난 크기와 두께의 책을 외웠을 때조차 한 번도 그런 뉘앙스의 말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뭔가 잘하는 것이 생길 수가 없었고, 단 하나 내보일 만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뿐이었는데…… 아무도 대단하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낭송할 것을 거침없이 종이에 써 내려갈 때도 신기하다는 듯, 칭찬을 담아 바라봐 준 적 없었다.
누군가에게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 것은 새로운 기분이었다. 레나드를 봤을 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심장과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네. 알아낸 거 같아요. 정확한 길잡이는 아니겠지만…… 따라오셔도 좋아요.”
어차피 가는 길이 같았기 때문에 딱히 데려다주겠다 하는 말은 쓰지 않았다. 뭐 대단하다고, 뭐 확실하다고 제가 뭐라도 해 주는 것처럼 말하는 게 어쭙잖다고 생각한 것이다.
간혹 그를 레나드와 비교하는 자신을 보며 흠칫거리기는 했지만, 아까까지 어깨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긴장하며 뛰쳐나왔던 것은 이제 겉으로는 사라지고 없었다.
군데군데 학생들이 돌아다닐 법도 한데 매우 조용했다.
예배가 끝나고 중정에 갔다가 레나드에게 붙잡혀 있었던 것이니까.
“아, 혹시 저녁은 드셨나요?”
먹었을 리가 없잖아.
아스릴은 학생들이 안 보이는 이유가 지금이 저녁 식사 시간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허기가 느껴진다 생각한 순간에 미카엘이 그렇게 물어 온 것이다.
앞장서 걷고 있던 아스릴은 의아함을 두 눈에 담고 그를 돌아보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벌써 지났나요?”
아스릴은 이름은 달라도 같이 배우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식사도 그들와 같은 시간에 하고 있었다. 혼자 가서 먹을 수도 있다고는 했지만 그럼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두 번 일하게 되니까.
그게 얼마나 효율적이지 못한지 알고 있었다.
딱히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니까.
대신에 이런 식으로 대단하지 않은 것에나마 도움을 좀 주고 싶었다. 비록 큰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아, 저희랑 같은 식사 시간에 드십니까? 어디 따로 드시는 곳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미카엘은 살짝 놀라는 듯하더니 또 눈을 휘어 가며 밝게 웃어 주었다.
“아…… 학생분들 시간에 같이 먹고 있어요. 이쪽……에서 음식 냄새가 강하게 나는 거 보니 맞게 가고 있나 봐요.”
“오, 정말이네? 후각도 굉장히 좋으시네요!”
미카엘은 다시 앞을 돌아보며 발을 옮기는 그녀를 따라 찬찬히 걷기 시작했다. 정말 걸음을 반복할수록 음식의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왔다.
그렇게 얼마 걷지 않아 길의 끄트머리에 당도했을 때, 드디어 익숙한 지금까지와 다른 배경이 펼쳐졌다. 학생 건물에 돌아온 것을 확인한 미카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지도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고 싶을 지경입니다. 덕분에 늦지 않게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녁이 걱정이었던 모양이구나. 아스릴은 그를 보면서 살랑살랑 고개를 끄덕였다.
꾸르륵.
“아…….”
그때 자신의 배에서도 그의 말과 같은 신호가 울렸다.
“아스릴 영애, 아직 저녁 안 드신 거면 함께 드시겠습니까?”
미카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스릴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티를 안 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두 눈을 들어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요. 저도 밥을 먹어야 하니까……. 함께 먹자고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함께 밥 먹어 주는 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예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스릴에게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씨씨마저도 그녀와 밥을 먹어 주지는 않았으니까.
유일하게 레나드만…….
“……영애?”
“아, 아닙니다. 어서 가시죠.”
또 레나드. 아스릴은 단호한 걸음으로 앞장서 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