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쯤 되자 아스릴은 더 도망가는 것도 무리라는 판단을 했다.
죽는 것도 달관한 마당에 무슨 상관이야.
두 남녀가 서로 깊은 관계가 되려면 혼자만 몰아붙여선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레나드가 혹시나 저를 진짜 좋아해서 이렇게 붙잡아 두려고 하는 것이라고 해도 자신만 넘어가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아스릴은 의자에 편하게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아 온 남자들 중 데모트 백작 이상으로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아스테리아와 아스릴 모두 이만한 미모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 데모트 부부의 알아주는 외모 덕이었다.
그래서 사실 아스릴은 남자를 볼 때 넋을 놔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이 남자를 처음 보고 정신을 놓은 듯 그의 움직임에 반항 없이 따라갔던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스릴은 고집 있게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지금은 되돌아온 거니까 이전의 삶은 없는 것이다. 그때의 감정도 없다.
단지 두 번 마주쳤을 뿐인…… 높고 높으신 분일 뿐이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니 듣겠습니다.”
갑자기 바뀐 그녀의 태도에도 레나드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약간 애틋한 듯, 애절한 듯했던 그의 눈썹이 살짝 굳어 있었다.
“무례하게 느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한다만…… 그날, 그러니까 오두막에서 기절한 그대를 지켜보고 있으면서 나는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걸 먼저 설명하지 못하고…… 음, 갑작스럽게 다가가려 했다.”
잔뜩 몸을 굳힌 채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아스릴은 생각지 못한 단어에 쿡,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가 분명히 오두막에서의 일을 꺼낼 것이다. 그가 입맞춤의 ‘입’ 자라도 꺼내면 그날의 감촉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있던 터였다.
레나드는 갑자기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그녀를 보면서 역시 그녀가 화가 나 있는 부분이 이것이었다고 확신했다.
“그게…… 벌써 몇 달 전 이야기입니다.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전하께서도…….”
또 발을 빼려는 그녀를 보면서 레나드의 얼굴이 굳었다.
레나드는 잠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쭉 뻗은 기다란 팔 끝에 손바닥을 위로 올린 커다란 손을 펼쳐 보였다.
“아니,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대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내 마음이 너무 서툴렀던 행동으로 인해 오해받는 것이 싫어서…… 이리도 끈질기게 구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의 말에는 무언가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얼렁뚱땅 시작했던 만남이 게 자연스레 이어졌던 것처럼, 그냥 오두막을 찾는 것으로 서로를 바라보기를 원한다는 걸 알아채야 했다. 아스릴은 그것이 제게 찾아온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꾸준히 오두막을 찾아와 주는 레나드를 보며 자연스럽게 그도 자신을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와 지금은 뭔가 달랐다. 조금씩 달라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오해……라니요. 저는 황태자 전하를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아스릴은 얼떨떨하게 말을 꺼냈다. 그가 내밀고 있는 손에 시선이 가 있었다.
저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아스릴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 삶에서…… 그가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들 저를 차가운 곳에 그냥 놔뒀는데, 제가 따뜻할 수 있는 건 아스테리아를 위한 일을 할 때뿐이었는데.
그가 내밀어 준 저 손이 다시 그때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제 오른손이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의 배필이 될 분을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유력한 벨파인 공작가의 영애도, 데모트의…… 첫째 영애도 모두 그 후보에 있다죠?”
레나드가 부드럽게 내밀고 있던 손이 살짝 떨렸다. 그의 얼굴이 아닌 손을 보고 있던 아스릴은 그 떨림을 알아보았다.
들켜서일까? 아니면 제가 너무 이른 정보를 흘린 걸까.
결국 지금 저 마음이 진짜 자신에 대한 호감이라고 해도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관계를 굳이 잇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을 황궁이나 황태자비가 될 가문에서 모를 리가 없으니까. 첫 번째의 삶에서 자신을 죽여야만 했던 사람은…… 자신을 황태자에게서 떼어 내야만 하는 사람이었을 테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묻지 않겠다. 그대가 말한 오해와 황태자비 간택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해 다오.”
그는 참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푸른 눈동자가 살짝 일렁이는 것이 햇살 아래 물결치는 새파란 우스 호수의 수면 같았다.
자꾸 자신의 입으로 지난날을 말하라는 것만 같아서 아스릴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은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아니면 눈물 따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입술을 깨무는 걸로는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막지 못할 듯해 두 손을 아래로 내려 꼬옥 쥐었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완강히 대화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건 방법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있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작전을 변경하는 수밖에.
“아스릴 영애, 나는…….”
똑똑.
레나드가 몸을 훌쩍 앞으로 당기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을 얼쩡거리는 초조한 발소리를 듣고는 있었지만, 제 명령을 무시하고 이렇게 문을 두드릴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저, 황태자 전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대신관께서 당도하신지라…….”
벌떡.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아스릴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버렸다. 그러고는 풀썩 꺾일 듯이 허리를 숙였다.
“대신관께서 오신다고 하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안히…… 돌아가세요.”
아스릴은 끝내 떨리는 목소리를 남기고 발을 움직였다. 서둘러 움직이는 그 걸음이 삐거덕대는 것 같아 위태로워 보였지만, 레나드는 그저 그 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벌컥 문을 열어젖힌 아스릴은 그 앞에서 조심스럽게 쥔 주먹으로 다시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 신관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가 쥔 주먹이 아스릴의 이마로 떨어질 듯이 코앞에 있었지만, 아스릴의 몸은 전혀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코앞에 나타난 영애가 멈칫거림도 없이 그를 피해 사라져 버리자, 화들짝 놀란 신관이 비명을 지르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코, 깜짝이야! 하아, 후우. 아니, 무슨 문을 이렇게 갑자기……. 하유……. 다행히 이야기가 끝이 나셨나 봅……니다.”
신관은 발까지 구르며 호들갑을 떨다 눈을 들어 올리곤 그대로 굳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소파에서 일어난 채 이쪽을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것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푸른 눈은 더 이상 수면이 반짝이는 깊은 호수가 아니었다.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조용한 푸른 불꽃이었다.
“대신관이……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나?”
“예, 예?”
그 푸른 불꽃이 바로 자신을 덮칠 것만 같은 느낌에 계속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 그에게 레나드가 말을 던졌다. 툭 뱉은 그 말에 데기라도 한 양 신관이 화들짝 놀랐다.
“대신관이…… 지금 말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극비라도…… 내게 말해야 한다고 했는가?”
“저, 저…… 무슨 말씀이신지. 그, 그렇게 엄청난 일은 없습니다만…….”
눈치 없는 신관은 그의 의중을 눈치채지 못하고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겨우 낸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으나 레나드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엄청난 일도 없는데…… 내가 내린 명령을 어겨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아스릴 영애를 대할 때뿐 아니라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만 해도 매우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신관들에게 예를 지켜 주었던 황태자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외형마저 같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무서운 기운을 잔뜩 내뿜고 있었다.
“그, 그것이…… 황태자 전하께서 신전에 방문하신 목적이…… 대신관님……이실 것…….”
대답해도 큰일이 날 것 같고, 대답을 하지 않아도 큰일이 날 것 같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신관의 목소리는 점차 떨리고 작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나드의 화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되었는데. 자주 이렇게 부딪쳐 가며 마음을 얻기엔 너무 위험한데…….
그녀는 황태자비 간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물론 황후가 그 정도의 추천서를 받았으면 귀족가의 여인들에게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터였다.
하지만 정확히 누가 황후의 마음에 차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부분에서는 살짝 충격이었다.
자신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그래서인 것일까.
“멍청하긴. 그걸 왜 말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 그것은 당연히 황태자 전하께서…….”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신관이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알고 대꾸를 했다. 하지만 바로 그를 노려보는 푸른 불꽃에 다급히 입술을 꾸욱 깨물고는 허리를 숙였다.
“나는, 분명히 그녀와 이야기를 하겠다 하면서, 누구도 들이지 말고, 심지어 차조차 들이지 말라 하였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신관은 급기야 어깨를 덜덜 떨었다. 하필이면 잘못 걸리는 바람에 심기가 매우 불편한 황태자를 건드리고 만 것이다.
자신의 안일함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는 떨리는 어깨 사이로 목을 좀 더 움츠렸다.
“기, 긴히 할 이야기가…….”
“긴히 하는 이야기는 대신관과도 나눌 수 있다. 그때 차를 내오지 말라 했던가.”
“아, 아닙니다. 그것이…….”
“후우.”
신관이 말을 하는 도중에 레나드의 한숨이 말 그대로 터져 나왔다. 신관은 이제 더 떨어질 심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