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다른 곳도 아닌 신전이었다. 자신의 집도 아니고 황궁도 아니고 우스 호수 곁에 있는 낡은 오두막도 아니었다. 어떻게…….
아스릴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보고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백작저를 떠나오면서 사실 이 뒤의 일들은 모두 잘라 내고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 다시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그거 하나면 되었으니까.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 없는데. 특히 4개월을 거슬러 올라온 이후로는 절대 무의미한 존재가 되지는 말자, 하고 다짐했지만……. 이 사람 앞에서만큼은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고만 싶었다.
눈이 마주친 이상 그를 투명인간 취급할 수는 없었다. 아스릴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올려야만 했다.
“……명예 신녀가 되었다는 얘길 들었네. 축하할 일인 것 같군.”
아스릴은 그가 꺼내는 말에 놀라고 말았다. 명예 신녀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에선 전혀 오간 적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스 호수에서 만난 이후로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어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명예 신녀가 된 것은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정말 누군가 그녀의 곁에 하루도 빠짐없이 붙어 있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몸은 좀 괜찮은 것인가.”
“예, 괜찮습니다.”
아스릴은 이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짤막한 대답과 어긋나는 시선, 경직된 몸. 한 번 더 질문을 던지려던 그가 잠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스릴은 그를 절대 쳐다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저 여기를 빨리 벗어나는 것밖에 없었다.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군.”
티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아스릴은 그녀가 나아갈 방향에 있는 문을 보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지금 제가 가던 길이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참 다정한 사람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건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다정함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생각하고 보니 속이 더 착잡해졌다.
“황실과 신전 간에 관계가 아주 좋은 것은 알고 있겠지. 평소에도 자주 드나드는 편인데 오늘 이렇게 우연히 그대를 만나게 되었군.”
심지어 이 말에는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황실과 신전이 사이가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협력 관계라고 보아도 좋았다. 황제 대신 거의 모든 통치를 하고 있는 레나드가 신전에 자주 들른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이렐린의 꽃을 둔 가족들 안에서 살다 보니 여러 정보를 알게 되는데, 적어도 황태자가 신전에 자주 들른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 자주 신전에 들르겠다는 선전포고 같은 것일까.
그건 매우 곤란했다. 이제야 겨우 내 안식처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가 들락거리고, 부딪치고 그런다면…… 여기에서 지내는 게 이유가 있을까.
이곳에서 신녀로 남을까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고민해 보던 것마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저는 명예 신녀로서 1년이 지나면 이곳을 떠날 예정입니다.”
“1년이면 그동안 자주 마주치겠군.”
“오늘 이 길은 처음 왔을 뿐입니다. 아마 이후로는 별로 찾을 일이 없을 것 같네요.”
이 정도면 그녀에게 관심을 표하는 황태자를 아스릴이 대놓고 피하고 있는 것이 티가 날 정도였다.
기어이 황태자의 질문이 멈추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표정을 알고 있다.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억누를 때 짓는 그런 얼굴.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멋있다는 것.
어떨 때는 정말 그의 얼굴만 바라볼 때가 있을 정도였다.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운 얼굴이라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전부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 아스릴에게 눈앞의 남자는 그저 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대는…… 정말 나를 놓칠 생각인가.”
짤막짤막한 회피성 대답에 한참 말이 없던 그는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었다. 조금 더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려던 아까와 다르게 정면 돌파를 해 버린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전해질 만큼. 그녀는 당황해 고개를 돌려 그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그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얼른 시선을 돌려 버렸다. 레나드를 마주 본 채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제가 놓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가진 적이 없는데.
제가 쥔 적도 없었고, 그가 제게 무언가를 얘기한 적도 없었다. 지난번엔 어땠지? 그가 제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이라도 있었던가.
분위기에 휩쓸렸고 그게 자연스럽다는 듯이 따라갔다. 그리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없을 사랑을 만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차갑게 식어 가는 아스릴을 계속해서 빤히 보고 있던 레나드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일렁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는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런 흔들리지 않는 레나드의 반응에 오히려 아스릴이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여길, 이 사람의 앞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황태자 전하. 잠시 바깥으로 나가셨다 싶었더니 여기 계셨군요!”
그때 레나드의 뒤쪽에서 신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이곳의 계급에 대해 빠삭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저 사람이라면 꽤 높은 직급의 신관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스릴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저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키려 애썼다.
이제 신관이 나왔으니 황태자를 데리고 들어갈 터였다. 그럼 그녀는 조용히 인사만 건네고 바로 뒤돌아 나가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말씀하신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저희 신전에서…….”
신관은 아까 하던 대화인 듯 말을 이어 하면서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러면 황태자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따라올 것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나드는 그를 따라가는 대신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단호한 무게감에 신관이 살짝 당황하며 발을 멈추었다.
“어떤…… 무슨 일이시죠, 황태자 전하?”
그가 레나드를 올려다보더니 문득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는 아는 걸까, 왠지 꿈틀거리는 미간이 자신에게 무슨 상황인지를 묻는 것 같았다.
“이쪽에 있는 영애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는 잠시 미루도록 하지.”
레나드는 심지어 자신과의 이야기 때문에 신관을 물리려 했다.
아스릴이 경악하는 얼굴로 손을 내젓는 사이,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 분명한 신관은 새삼스럽게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아! 명예 신녀로 오셨다는 데모트가의 둘째 영애시군요. 제가 좀 노안이라. 하하하!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그것부터 하셔야지요. 이야기는 어디서 나누실 겁니까?”
그는 매우 약삭빠른 사람이었다. 그런 탓에 아스릴의 애타는 속마음도 모르고 아예 편안히 대화할 자리까지 마련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이제 도망가려야 도망갈 수도 없는 감옥에 갇히게 생겼다. 아스릴은 두 사람이 장소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사이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맹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결국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모양인지 신관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나드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가지.”
레나드는 나직하게 그녀에게 권유했다. 억지로 가자 하지 않았지만,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듯한 목소리에 아스릴은 조용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관과 레나드, 그리고 아스릴. 숨 막히는 열차가 도착한 곳은 바깥쪽 정원으로 창문이 난 큼직한 방이었다. 그 방의 문을 열어 준 신관은 마음에 드냐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으나 둘 중 누구도 그에게 반응을 던져 줄 겨를이 없었다.
“그, 그럼 차라도…….”
“아니, 아무것도 필요 없네. 다과도 가져올 필요 없어. 그대가 나가고 나면 이 방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그대도…… 이 방에 누가 있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하지.”
당장이라도 차를 우려내어 가져올 것 같은 그를 붙들고 레나드는 차분하게 을렀다. 목소리 톤이 높지 않고 상스러운 말을 섞지도 않아도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스릴이 난감해하며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신관이 자리를 뜨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젠 그만 도망가고…… 내 이야기를 좀 들어 줄 수 없겠는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목소리. 둘뿐인 곳에서 방을 가득 채우는 그의 목소리가 아스릴의 심장을 울렸다.
아스릴은 감정을 감춘 채 최대한 태연하게 몸을 돌려 고개를 들어 올리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법한 높이에 있는 그의 두 눈을 올려다보았다.
아스릴은 입술을 악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허탈한 느낌에 잠시 말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