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신녀복을 갖춰 입은 아스릴은 흥분한 에밀라가 무언가에 불타오르며 빠져나간 뒤 그대로 방을 나섰다.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예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면서 강의를 들으러 이동하거나 예배를 위해 이동하는 모습들을 멀찌감치서 바라본 적이 많았지만, 정작 인사 한번 제대로 나눠 본 적 없었다.
예배는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되고, 마음만 먹으면 말을 시킬 수도 있으니까 한번 가 볼까. 그래도 명색이 명예 신녀인데, 예배에 자주 참여하는 것이 보기 좋을 것 같았다.
아직은 준비와 적응의 기간이라고 하는데, 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까 방에서 읽고 있던 것도 바로 이곳 신전에 있는 도서관에서 찾은 신학서였다. 대충 훑어보니 공부를 하기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가볍게 읽기 좋은 것이어서 빌려 왔다.
데모트 백작저에서는 그나마 도서관만은 허락받아 들어가서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은 어색하게 기웃거리는 그녀를 사서가 아주 환한 얼굴로 초대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사서와 좀 친해져야겠다. 좋은 책을 추천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주 잠시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야 장서가 그렇게 많은 게 아니니까 평생 살면서 다 못 읽겠나 하는 생각에 그냥 잡히는 대로 읽어 보곤 했는데, 신전의 도서관은 그 규모부터가 달랐다. 전문 사서가 있는 것도 새로웠는데, 그 사서가 심지어 두 명이라고 했다.
데모트라는 우물 안에서 책으로 세상을 알아 가고 있긴 했지만, 역시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 풍부하지는 않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의 딴생각이었을 뿐, 그녀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홀로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홀은 매우 조용했다. 아스릴은 홀로 향하는 학생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합류해서 적당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귀족으로서도 아니고 학생으로서도 아닌 명예 신녀라는 애매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귀족이기도 하고 학생이기도 한 사람이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될 것 같다는 이상하게 긍정적인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모르는 사람의 인사에 살짝 긴장했던 여자아이가 그녀를 향해 화답했다.
그 작은 일이 뭔지 모를 뿌듯함을 주어 아스릴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앞을 보았다. 이제 한 걸음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길이 생긴 것처럼 성실히만 해 나가면 뭐든 또 길이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생긴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앞을 보느라 아스릴은 인사를 받아 준 아이가 자신을 보고서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늘의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들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의 가슴속으로 이렐린 님을 초대하세요.”
단상에는 언제 왔는지 신관 한 명이 서 있었다.
저 말은 예배의 시작이었다. 고요히 건네듯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리면 모두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집중을 시작했다.
깊은 명상에 잠기듯 고요의 파도가 퍼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난 뒤에야 아스릴도 두 눈을 감았다.
직접 참여하는 예배는 굉장히 묘한 느낌을 주었다. 이렐린의 노래를 달달 외우고 그 낭송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이해한다는 등의 칭찬을 들었지만, 이제야 정말 이렐린이라는 신을 믿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설교의 내용이 이해가 되다 보니 예배가 재미있었다. 이 정도라면 정말 명예 신녀의 기간이 끝나고도 이곳 신전에 남아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저에 있을 때는 삯바느질에 농작에 해 본 적도 없는 일들만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어쩌면 이쪽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배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학생들은 각각 신관들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약간의 상담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처음 곁에 있던 학생에게 인사를 건넨 이후로 예배가 바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끝나는 시간을 이용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볼까 생각했는데, 분위기상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혹여 자신이 있는 게 방해가 될까 아스릴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쪽 길로 가 보자.”
아스릴은 홀을 둘러싼 길을 탐방하던 중에 홀로 문이 나 있는 경우, 반대편으로도 길이 쭈욱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었다. 신전의 구조도 익힐 겸 한 군데씩 쭉 가 보기로 했다.
이곳은 홀이 있는 본 건물과 학생들의 기숙사가 있는 건물 사이의 길이 매우 복잡했지만 혹여 길을 잃는다 해도 사람 하나쯤 만나면 금방 해결될 일이니까 겁을 먹지도 않았다.
“어…… 어라?”
처음 시작이야 어디서나 같은 복도라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기, 그 길이었다. 중정으로 가는 길.
그곳이 참 예쁘기는 했지만, 다시 가기에는 매우 용기가 필요할 거 같아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이 길들 중 하나는 중정으로 향할 거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냥…… 오늘은 이곳에 가야 할 운명인 모양이었다. 정말 삶은 반복과 변화의 시간인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이 길을 걷게 되겠지만 그 사람을 만나는 대신 다른 일이 일어나겠지. 차라리 그런 일이 일어나 주는 게 제게는 더 좋은 일일까.
한 사람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에 더 집중하면서 걸었다.
길은 백작저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신전이라고 크게 꾸며 놓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벽지가 다르고 너비가 좀 넓은 정도였다.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듯한 복도를 지나가는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기억 속 길은 처음 가는 것이어서 길게 느껴졌던 걸까.
중정에 금방 도착한 아스릴은 전처럼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넓지 않은 중정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좁기는 하지만 햇살이 들이치는 모양이 아주 아름다운 신들의 영역으로 산책을 나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걸 보니, 저도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것은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반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백작 부인과 아스테리아 역시 이 모습을 본다면 아주 마음에 들어 할 것이었다.
그래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있었다고 이럴 때 제일 먼저 생각이 난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피식, 하고 가볍게 웃고 나니 쓸데없는 생각은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아직도 바깥은 추위가 가시지 않았겠지만, 이 안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이 아름다운 걸 다음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오늘 잘 봐 둬야겠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적어도 1년은 원할 때마다 볼 수 있을 것 같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떠날 날이 정해져 있고 그 전에 자신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곳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가능성만으로도 이미 즐거웠다.
좋은 기억이 있었던 곳도 아닌데, 이상하게 긍정적인 기분이 샘솟는 것 같았다.
이제 곧 아스테리아가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터였다. 시간은 점차 지나고 그 시기가 가까워졌다. 이렐린의 꽃이 문제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땐 자신도 그녀를 따라 이곳에 올 수 없을 테니까.
그날의 기억도 잊고 왠지 모르게 설레어서 아스릴은 종종걸음을 걸었다.
통로 끝에서 멈춰 서 있었던 아스릴이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쏟아지는 빛에 몸을 녹인다는 기분으로 안으로 들어서자, 예전 그대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그 싱그러움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정말, 다시 봐도 너무 아름다워……!”
신전은 대체적으로 많은 것들이 아름다웠지만 희한하게 이곳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을 모르게 여기에 작은 의자 하나만 가져다 놓고 앉아서 가만히 햇살을 받고 앉아 있으면 어떨까.
통로로서의 길도 있었지만 길을 벗어나 중정으로 내려가면 풀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통로에 서서 주변을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서 있던 아스릴은 왠지 옆얼굴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사람의 시선 같은데. 심지어 사람의 시선이라고 느낀 그것은 계속해서 그녀에게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이 느낌…… 왠지 알 것 같아.
아스릴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 채 살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도 사라지지 않는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쩜, 이 사람은 피하려야 피해지지도 않는 것인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것들에는 제가 원하는 걸 너무 잘 들어주는 것 같았는데……. 적어도 레나드에 한해서는 그게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스릴이 돌아본 곳에는 레나드가 거짓말처럼 서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정원에 내리는 햇살만큼이나 눈이 부시게 멋진 모습으로 또 이 공간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