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데모트 백작저로의 산책이 허무하게 끝나고 레나드는 다음 날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렸다.
외벽을 타서 찬 바람을 많이 맞은 데다가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한 아스릴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 까닭이었다.
신전으로 간 아스릴을 아무도 모르게 만날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데모트 백작저를 감시하고 있는 이에게서는 아스릴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날 이후로 아스릴이 줄곧 신전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렐린의 꽃으로도 모자라 설마 명예 신녀 자리까지 꿰찬 것인가. 그 집안은 황태자비를 배출할 것이 아니라 이렐린에 독실한 집안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신전과 나쁜 사이인 것도 아니고 하니 이쯤 되면 신전에 관심이 있는 척 접근을 한번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아, 도망 안 가게 해야 하는데.”
두통의 원인은 그것이었다. 자꾸만 생각나게 하더니, 이야기 한번 나누려는 것마저도 이렇게 신경 쓰고 머리를 굴리게 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루 종일 머릿속에 떠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클로이는 이제 영애들을 초대하는 초대장을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그에게 어떤 것을 하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선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영애들을 초대하고 파티를 여는 시간을 벌어 놓았다.
이제 클로이가 그 파티에 열중해 있는 사이 자신은 아스릴을 만나야 했다.
“어떻게 해야…….”
떨리던 푸른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면…… 그것은 상처받은 눈이었다. 대체 그 오두막에서 처음 본 이후로 만난 적도 없는데, 이미 그때 왜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야만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조심스러운 접근이었지만 분명, 뭔가를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부담스러웠던 것인가.”
레나드는 혀를 찼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에 이미 주눅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도 물어보았고, 그녀에게서 뭔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었기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날 뿐이었다.
제가 돌봐 준 여인이라서일까.
“하아, 도무지 모르겠네.”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으려니 세드룬이 기척도 없이 등장했다.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감싸고 괴로워하는 주군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그렇게나 괴로울 만큼 고민되시는 일이라 하면……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전하?”
알 것 같은데…… 모르겠다. 그래서 세드룬은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는 것이 맞을 거다.”
“여성분과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전하답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계시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답게라……. 레나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렇게 고민만 잔뜩 쌓아 놓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백작가의 담이라도 타 넘는 것이 레나드의 성격이었다.
이렇게 애가 탈 거라면 제대로 들이대 봐야겠지.
더 지체할 것도 없었다. 아직 아침 식사가 소화도 되지 않은 시간. 레나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녀를 불렀다.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그를 보고는 옆에서 세드룬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급히 전하의 본모습을 되찾으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미적거려 봐야 미인은 멀리 도망가는 법이지.”
“뭐 여러 번 해 보셨던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세드룬은 충성심과는 별개로 촌철살인의 말이 특기였다. 그의 말에 레나드는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이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마음에 둔 사람을 생각하면서 짜증만 내던 것은 이제 그만해야 했다.
그녀 또한 저를 보면서 그런 부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바란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었지만, 이 사실은 아주 명확했다. 그는 아스릴이라는 여인에게 한눈에 반했으며, 지금 애타도록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른다고 누군가 핀잔을 줄지라도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다.
레나드의 외출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궁을 빠져나간 말 두 필 위에는 레나드와 세드룬만 있었고, 그 단출한 일행은 아주 재빠르게 신전으로 향했다.
* * *
똑똑.
“네, 누구세요.”
아스릴은 방 안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책을 읽고 있다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일어나서 처음으로 내는 목소리라 살짝 잠겨 있었다.
다행히 소리는 제대로 나서 바깥에서 노크한 사람이 바로 대답을 해 왔다.
“에밀라입니다, 아스릴 영애님. 신녀복이 다 만들어져서 가지고 왔어요.”
“아……!”
책에 집중하느라 표정이 없던 아스릴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졌다.
아스릴은 얼른 책상 앞에서 일어나 문을 열기 위해 도도도 달려갔다. 지체 없이 방문을 열자 바깥에는 하얀 옷 더미에도 파묻히지 않고 거뜬히 들고 있는 에밀라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나요? 한번 입어 보시겠어요? 잘 맞는지 보고 싶네요.”
에밀라는 또다시 만나자마자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빠르게 건넸다. 왠지 모르게 신이 난 아스릴이 에밀라를 위해 한 발 물러나며 문을 더욱 활짝 열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영애님!”
에밀라는 씩씩한 대답과 함께 앞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분주히 방 한가운데에 파티션을 설치하고는 신녀복 중 하나를 챙겨 들고 아스릴 쪽을 바라보았다.
“어서 들어오세요. 치수가 빠짐없이 맞는지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아, 들고 온 것이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스릴은 재빨리 방문을 닫고 에밀라가 내밀어 주는 신녀복을 받아 들었다.
“아스릴 님이 입으신다고 생각하니까 여기저기 포인트를 넣고 싶어서 어찌나 근질거리던지. 아스릴 님은 옷을 입혀 놓으면 몸매도 살고 얼굴도 그만큼 살 거 같은 거예요.
하아……. 정말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장식이나 장신구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곤 했었는데! 어쩜 이번에는 어찌나 이거저거 욕심이 나던지. 일이 끝나는 시간마다 이렐린 님께 가서 기도하고 왔다니까요.”
일부러 금욕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하는 신관들에게는 그런 장식과 장신구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아스릴의 신복도 굉장히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스스로 입기에도 크게 불편한 데가 없었다.
여밈이 뒤에 있지 않고 크게 둘러서 끈을 앞으로 당겨 묶는 방식이라서 지금도 속도는 느리지만 혼자서 잘해 나가고 있었다.
“하하. 그렇게 절 봐 주셨다니 고마워요. 화려한 걸 입어 본 적이 없어서……. 아마 저한테는 잘 안 어울릴 거예요.”
아스릴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로 툭 넘어간 끈을 끌어당겨다가 앞으로 잘 여미었다.
장식이 많지는 않지만, 그 디자인이 매우 예쁜 옷이었다. 상체는 꽤 타이트하게 맞고 아래는 여러 갈래의 긴 천이 치마를 이루고 있었다.
장식을 따로 하지 않아도 원단 자체가 살짝 반짝이는 것 같았다. 단순한 하얀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스테리아의 드레스를 가져다 입어서 원단은 좋은 것들을 많이 입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원단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
“어머 어머, 그런!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분에게 그런 것을 아낄 수가 있는 거죠? 정말. 아! 이건 어때요? 제가 개인적으로 드레스를 하나 선물해 드리고 싶어요. 공식적으로 입으실 수는 없겠지만, 명예 신녀께서 꼭 신녀복만 입으시라는 법은 또 없거든요!”
왠지 에밀라가 매우 신이 나 보였다. 뭐 그녀가 즐거우면 저야 좋지만…….
씨씨가 만들어 준 드레스가 떠올랐다. 새로운 재료를 살 수는 없어서 비록 아스테리아의 드레스를 리폼해야 했지만, 처음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드레스라는 점에서 너무 애틋했었다.
그런데 신전의 모든 복장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아주 새로운 드레스를 선물 받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그…… 이런 재료들은 비싼 데다가 에밀라의 노동력이야말로 장신구들만큼 비싼 거잖아요?”
아스릴은 열의 넘치는 에밀라게 제가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는 게 아니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그리고 약간 쑥스러운 마음을 누르면서 파티션 바깥으로 나왔다.
“……어때요?”
살짝 홍조를 띤 얼굴에 금발 벽안, 그리고 마른 듯 굴곡 있는 몸매가 신녀복과 아주 잘 어울렸다. 에밀라는 아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만 손뼉까지 치며 환호했다.
“세상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몸매가 좋으시네요! 이런! 혹시 움직이는 데에 불편함은 없으세요?”
우선 불편한 부분이 없는지부터 묻는데, 둘러보며 살피는 에밀라의 입에서는 연신 어머, 어머,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 아니요.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아스릴은 에밀라의 칭찬에 더더욱 쑥스러워져서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에밀라의 두 눈에 도전 정신이 불타오르고 있는 걸 보고는 이 사람을 다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에밀라는 아스릴을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단정함을 기본으로 챙겨야 했기 때문에 방마다 마련되어 있는 전신 거울 속에서 아스릴은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있었다.
“아…….”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세팅해 드리고 싶어지네요, 정말. 다음번 신전 행사 때 기대해 주세요! 이렐린의 꽃이 주눅 들 정도로 꾸며 드릴 테니까.”
의욕 넘치는 에밀라의 말에 순간 아스릴은 가슴이 뜨끈해졌다.
제가 아스테리아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들은 것만으로도…… 뭔가가 샘솟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