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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29화 (29/106)

29화

역대 황족 중 가장 미남으로 알려진 레나드는 특히나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더욱 빛이 났다.

어디서나 웃고 다니는 이는 아니었으나 공식 석상에서 레나드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좌중을 살피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황궁에서 행사가 생겨 그가 모습을 드러내 주기를 바라곤 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오늘은 미소가 전혀 없었다. 짜증이 있다거나 긴장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철저하게 표정을 숨긴 채 살짝 앞을 응시한 채로 그저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발이 향한 곳은 바로 그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본궁에서 뒤로 이어져 있는 황후의 궁이었다. 몸이 아파 쉬고 있는 황제가 있는 별채와도 이어진 황후의 궁에서 그를 호출한 것이다.

“오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후의 시녀장은 그가 나타나면 언제든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래. 기다리고 계셨겠지. 전면에 나서고 싶어도 우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게 유리하니까. 여러 면에서.

시녀장이 열어 주는 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안에서는 황후가 안경을 쓴 채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에서 자신을 부른 이유를 조금은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짝 한숨이 나오려 가슴이 들썩이는 것을 내리누르곤 그녀가 앉은 널따란 테이블에서 의자를 하나 빼내어 앉았다.

“폐하를 돌보시느라 바쁘시면서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보고 계십니까. 얼굴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이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잔뜩 어필시킨 후에 이제 다른 이야기들을 시작할 것이었다.

“어. 왔어요? 음…… 눈앞이 핑 도는 것 같네.”

자신의 목소리에 그제야 그가 온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든 황후는 안경을 고쳐 쓰며 두 눈을 깜빡깜빡해 보였다.

뭐라고 좀 더 독려해 주는 말을 원했겠지만 그걸 레나드가 쉽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나드는 슬쩍 클로이가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을 넘어다보았다. 추천서들과 각종 편지들의 묶음이 쌓여 있었다.

딱 봐도 저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감이 왔다.

“흠, 아무리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황후로서 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계속해서 보고 있답니다.”

황후는 보고 있던 것을 레나드의 앞에 내려놓으며 은근한 눈빛을 건넸다. 정자세로 앉아 있던 레나드의 푸른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추천서라는 글씨가 아주 화려하게 들어간 종이에는 한 여인의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시그넬 벨파인. 벨파인 공작가의 영애인 모양이었다.

그것을 읽고 나서도 레나드의 얼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안경 너머로 바라보고 있던 클로이는 피식 입꼬리에 웃음을 담았다.

“황태자비를 간택하는 일 또한 쉬운 것이 아니네요, 정말. 이 영애도 좋아 보이고, 저 영애도 좋아 보이고……. 황태자가 워낙에 완벽한 지라 어느 영애를 데려와도 부족해 보이는 거 같고. 복잡하네요?”

지친 기색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니 그것이 묘하게 처연해 보였다.

클로이도 알아주는 미인이었다. 나름 자부심이 넘쳤던 클로이는 전 황후를 굉장히 누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차기 황후가 되었을 때 이미 전 황후는 죽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질투했었다.

하지만 레나드만 보아도 짐작이 가능하듯, 전 황후는 최고의 미녀였다. 게다가 병환으로 명을 달리한 그녀에 대한 제국민들의 그리움까지 더해져서 그 아성을 클로이가 넘어서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들을 위해 레나드를 미워하고 그 자리를 뺏어 오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이렇게나 레나드를 시기하고 있는 것은 전 황후로부터 시작된 질투였다.

“그렇게나 힘드시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제게 황태자비를 들이라 압박하는 것은 황후 폐하뿐이시니까요.”

황제가 몸져누운 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 레나드에게 황태자비를 종용하는 것은 황제의 서거를 준비하라는 뜻과 얼추 비슷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다들 눈치만 보고 레나드에게는 직접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많은 추천서와 편지가 도착하는 것을 보면 다들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레나드 전하의 비가 된다니 영애들이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걸요. 호호호.”

진짜 그녀의 아들이라고 해도 꽤 귀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웃으면서 나름 분류를 해 놓은 듯했던 종이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 여기 있군요.”

그녀가 가벼운 말과 함께 종이 하나를 새롭게 내밀었다. 아까와 같은 추천서, 그리고 그 아래에 쓰여 있는 이름은…….

“아스테리아 데모트…….”

레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어 버렸다.

여기서 이 이름을 맞닥뜨릴 줄이야……. 생각도 못 했던 이름에 잠시 놀랐던 것이다.

그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그냥 지나칠 클로이가 아니었다. 그의 반응을 본 그녀는 씨익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잡기 바빴다.

“역시 황태자도 알고 있었군요. 현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고 하는 데모트 백작의 첫째 영애예요. 이렐린의 꽃으로서 지난해를 무사히 마무리해 놓고도 올해에 또 이렐린의 꽃으로 선정되었다죠? 다들 그 영애의 미모를 칭송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황태자비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것 같은데요?”

레나드는 잠깐 흔들렸던 마음을 잡고 클로이의 기색을 살폈다. 이상하게 그녀의 말이 진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공작 영애의 추천서를 내밀 때만 해도 이쪽의 반응을 먼저 살피는 기색이었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안 들어 하는지.

하지만 아스테리아의 추천서를 내밀면서 클로이는 이쪽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듯이 진심으로 칭찬을 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녀를 선택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떠오르는 의심을 감춘 채 그는 다시 추천서를 들여다보는 듯이 움직였다.

황태자비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최고의 반려라……. 클로이의 말에서 어쩐지 어폐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황태자비가 어울리는 여자…… 내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 좋은 것은…… 황태자가 자신의 아들일 때구나.

레나드는 비상하게 돌아가는 머리로 최적의 답을 찾았다. 대담하기 짝이 없는 클로이는 제가 이 여인을 택하든 택하지 않든 자신이 이득이 될 상황을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다.

‘속도를 좀 내겠다는 뜻이군. 어떻게 맞춰 줘야 할까…….’

클로이는 이제 아주 여유로운 얼굴이 되었다. 안경까지 내려놓는 것으로, 자신이 이 영애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어필했다.

뭐…… 클로이의 바람대로 이 영애를 로나르드에게 주는 것은 상관없었다.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먼저, 제대로 알고 있었으니까.

“글쎄요. 저는 일단 황제 폐하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만으로도 지금 충분한 것 같습니다. 국혼을 준비하는 일은 황후 폐하도 저도 아직은 좀 버겁지 않겠습니까? 추천서 읽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피곤해하시는데.”

역시 만만치 않은 레나드의 대응에 클로이는 웃고 있는 입술이 뒤틀리지 않도록 더 환하게 웃어 보여야 했다.

이 능구렁이 같은 놈은 황제처럼 여자에게 다정하게 군다거나 예쁜 여자 같은 것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다루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좀 꾀어내 보려고 했는데 쉽게 넘어오질 않는다. 신전 행사에서 여러 번 보았을 그녀의 얼굴을 모를 리는 없고. 이렐린의 꽃으로서 얼마나 완벽한 여인인지 소문을 못 들었을 리도 없고…….

하여간 속 시원하게 따라와 준 적이 없어, 정말. 순간 진짜로 지친 기색을 내보인 클로이는 아쉬움이 철철 묻어나는 손놀림으로 추천서를 거두어 갔다.

“뭐 영애들을 한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이렇게 추천서만 받아 보아서야 어떤 분들인지 알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레나드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클로이는 하마터면 얼빠진 목소리로 뭐? 하고 반문할 뻔했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비쳤을까 괜스레 마른기침을 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영애들이요? 어머 어쩜, 황태자께서도 슬슬 다른 이들의 바람에 귀 기울일 생각이 들었나 보네요. 그거 정말 좋은 방향이에요. 호호. 남자들은 물론 황태자비를 들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려 하죠. 대신 부인들을 시켜 이렇게나 원하는 마음을 어필하고 있던 거랍니다. 아주 잘 헤아려 주셨어요.”

클로이는 있는 대로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며 분주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결혼하기 싫어하는 아들의 허락을 받아 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레나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예쁘기만 한 여자가 아니었다. 단순히 질투심이 많은 여자도 아니었다. 아니, 단순한 질투만으로도 여자가 어디까지 무서워지는지를 클로이를 보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후에 아스릴이 제 여자가 되었을 때 아스테리아가 보일 질투에 대해 미리 가늠해 봐야 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제가 아스릴을 무조건 제 옆에 있을 여자라 가정하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아챘다.

“좋아요. 우선 아까 봤던 그 영애들은 포함하는 것으로 하고……. 어떤 영애들을 더 오라고 할까? 다들 같은 마음으로 추천서를 보냈을 걸 생각하니 함부로 고를 수가 없겠어요.”

즐거워하는 클로이를 바라보면서 레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다른 고민이 아주 깊게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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