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신전에 들어와서 신녀복을 맞추는 작업이 가장 먼저인 것은 에밀라를 통해서 이러한 에너지와 응원을 얻어 가라는 뜻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에게서 좋은 기운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가 만든 신녀복을 입으면 더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두 달 뒤에 내가 살아 있다는 가정하의 이야기네.”
자꾸만 까먹고 있는데, 본래 제 삶은 몇 달밖에 없는 셈이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기는 했지만, 그 4개월 뒤에 살아남기 위해서 한 일은 없었다.
‘레나드…….’
그를 피했던 일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먼저 제 마음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니까.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몇 달이 너무 허무하게 사라졌고, 하필 그것이 사라지게 만든 게 아스테리아였으니.
이제 레나드는 자신을 볼 일이 없어졌고 아스테리아와도 평생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젠 죽든 말든 상관이 없다.
에밀라의 의상실을 나와 길을 따라 쭉 이어진 방들을 지나쳐 걷던 그녀는 건물 한쪽에서 문 대신 앞으로 쭉 복도가 뻗어 있는 공간을 발견했다.
이곳은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앞뒤 양옆 구분이 어려웠다. 이 복도가 중심이 되어 방향을 잡아 줄 것 같은데…… 이게 본관으로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건물 뒤쪽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근데…… 왜 가고 싶은 거 같지.”
아스릴은 그 끝이 어두운 복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신전 내부를 탐색하고 싶었던 욕심에 매우 부합하는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의욕이 없는 건지 호기심이 많은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아스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 복도에 발을 들였다.
라토크가 전하는 말 중에서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복도도 어디선가 볕이 들어와 길을 밝히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멀어서 어두워 보이나 싶었던 복도의 끝이 막상 걷기 시작하니까 바로 보였다.
그곳은 바깥이었다. 그리고……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중정……이잖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신전 행사의 날이 떠오른 것이다.
그가 그때 나왔던 통로가 여기였구나……. 예비 신관들이 사용하는 건물에서 그는 뭘 하고 나오는 길이었을까.
반대편으로는 그때 아스릴이 나왔을 통로가 보였다. 그가 여기에 서서…… 저쪽에서 나오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했던가, 나를 보자 어떻게 했더라…….
여러 가지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 보고 싶다.”
하고 소리를 내 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이 뱉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려 버린 아스릴은 자신의 입을 텁 막아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진짜로 보고 싶어졌다 한들 꺼내선 안 되는 감정이었다. 이제는 진짜 모든 것을 놓고, 데모트도 아닌 그냥 아스릴로 살고 싶었다.
다시 마음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중정을 지나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딱 한 번이라고 해도 여기에 와 본 적이 있기에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아스릴은 곧게 뻗은 복도를 끝까지 따라가지 않고 중간에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깐 동안 또 어딜 도망가느냐는 얼굴로 자신을 보던 레나드의 눈빛이 떠올랐다. 제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날을 들쑤시던 그 눈빛.
수시로 떠오른다. 그의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그 눈동자가. 짧은 시간 동안 짧은 만남이었던 만큼 그냥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타박타박 발을 옮기면서도 그날이 떠올랐다.
당분간 본관에는 오지 않는 것이 좋을까? 중정을 발견한 뒤에 이 복도를 걷고 있으려니 자꾸만 그날의 레나드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무의식적으로 보고 싶다고 중얼거릴 뻔했던 아스릴은 입술을 꾸욱 다물어 버렸다.
그때였다. 어째 복도가 좀 길다는 생각이 든다 했더니 저 통로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홀이다.”
얼핏 들어도 예배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 방향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신전 행사에만 와 봤기 때문에 정식 예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세세한 행사에까지 자신을 데려간 적은 없었다.
이렐린의 꽃으로서 아스테리아는 큰 예배에도 자주 참여했었지만 그때에야말로 말 그대로 ‘꽃’으로서 참석했던 것이라 낭송도 필요 없었으니까.
내 필요는 정말 딱 그것밖에 없었다. 조금 슬픈 일이었다.
복도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아스릴은 혹시 누군가의 눈에 띌까 싶어서 벽에 찰싹 붙은 채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이쪽은 본관의 후문 쪽으로, 신관들이 드나드는 통로 중 하나일 테니까 까딱하면 예배에 참여한 귀족들의 눈에 띄어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역시 밖을 내다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각자 원하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두 손을 모아 테이블 위에 얹어 두고는 눈을 들어 신관이 서 있는 단상보다 조금 더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관이 서서 예배를 이어 나가는 단상 위쪽으로는 이렐린의 반신상이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이 아래로 팔을 뻗은 역동적인 느낌의 반신상은 언제 어디서고 땅 위의 것들을 내려다보고 살펴보는 그녀의 베풂과 아량을 표현한 것이었다.
“어…… 여기 통로가 있네.”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아스릴은 옆으로 난 좁은 통로를 발견했다.
아마 홀을 따라 둥글게 둘러져 있는 통로가 아닐까?
누구도 그녀의 움직임을 제한하지 않으니 궁금한 것이 더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알고 싶어도 체념하던 때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20년의 시간 동안 내 몸에 박여 있던 것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아서 사라져 주는 것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아스릴은 망설이지 않고 좁은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함께 풍요의 하늘 아래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이렐린께서 우리에게 내린 단 하나의 숙제이며, 함께 나누는 삶을 위하여 풍요를 주셨습니다.”
신관의 목소리가 편안하게 홀을 울리고 있었다. 좁은 통로로는 웅웅거리는 울림이 더해져 발음이 조금 뭉개졌지만, 그의 설교는 꽤 듣기 좋은 소리를 입어 더 좋은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스릴의 추측대로, 이 길은 홀을 빙 둘러서 나 있었다. 중간중간 홀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었고, 막힘없이 사람들이 출입하는 정문까지 나 있었다.
정문으로 나가는 문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홀로 나갈 수 있는 통로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신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스테리아를 쫓아서 왔던지라 신관이 있는 방향에서 바라보던 홀은 방향만 바꿨더니 전혀 다른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특히나 저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듯한 이렐린의 반신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살짝 벌어진 입을 다시 다물 수가 없었다.
질감이 느껴지는 머리카락의 흩날림과 얼굴에 온화하게 퍼져 있는 미소, 그리고 금방이라도 내 손에 닿아 올 듯이 뻗어 내린 손의 역동적인 움직임까지…….
“이렐린께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를 사랑하시고, 기회를 붙잡을 힘이 없는 자에게는 힘을 주시기도 합니다. 성실과 나눔을 실행할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이렐린의 축복을 언제나 누구에게나 내릴 것입니다.”
「기회를 붙잡을 힘…… 그게 필요했던 것이지.」
입을 벌린 채 동상을 바라보고 있던 아스릴은 문득 설교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 휙 뒤를 돌아보았다.
홀 입구의 바로 뒤는 벽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정문으로 나가는 문이, 왼쪽으로는 그녀가 지나쳐 온 좁은 통로가 다였다.
은은한 여성의 목소리가 통로를 울리는 것이 아니라 아스릴의 온몸을 울렸다.
“뭐지…….”
잠시 당황했던 아스릴은 주변을 돌아보는 것을 멈추고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설교가 끝나고 신녀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단상에 올랐다.
이렐린의 음성이라 불리는 이 꾀꼬리 같은 합창단의 노랫소리는 아스릴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신전 행사 때는 그것을 이렐린의 꽃이 낭송하는 것으로 대체하기 때문에 그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들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들뜬 아스릴은 방금 심장을 쿵 떨어뜨렸던 소리도 잊어버리고 그들의 입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울리고 바로 그녀들의 목소리가 홀을 가득 채우고 휘돌기 시작했다. 아아아, 하는 소리만으로 화음을 쌓아 가고 소리를 내는 것들이 하나같이 너무 아름다웠다.
고음으로 올라가면서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하나도 없고 마치 벨벳 위를 쓰다듬는 것처럼 목소리가 손바닥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는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왜 자꾸 도망만 가고 있는 거야……?」
그때였다. 아름답게 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노랫소리마저 뚫고 고운 목소리가 아스릴의 온몸을 울렸다.
이게 뭐야……. 이 목소리 뭐야.
노랫소리로 부드럽게 풀려 있던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친근하게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안정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아스릴은 합창단의 노랫소리 대신 다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정확히 제가 어디에서 소리가 들리길 기대하면서 귀를 쫑긋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제게 부드럽게 말을 걸어 주던 그 목소리는 더는 울리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진 그녀가 다시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는 사이 합창단의 노래가 끝나고 예배도 끝이 나 버렸다.
아스릴은 바깥을 보고 있던 몸을 돌려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쫓아올 것 같은 두려움을 안은 발길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