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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27화 (27/106)

27화

아침에 눈을 뜨다가 아스릴은 순간 이게 꿈인가 하고 생각했다.

눈을 떴는데 주변이 너무 환했던 것이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커다랗기도 했고, 안에서 빛을 받는 것들이 새하얗기도 해서 아스릴은 눈이 부셔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 여기 신전이지…….”

주변을 둘러보다 그제야 깨달았다.

더는 데모트가의 칙칙한 방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곳이 면적은 조금 더 좁을지언정 침대와 티 테이블, 책상까지 갖춰져 있어서 훨씬 예쁘고 아늑했다. 창문도 커다래서 햇빛이 잘 들었고, 두 사람 정도는 서 있을 수 있는 발코니도 있었다.

방 저쪽 끝으로 난 또 하나의 문을 열면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과 욕실이 나왔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스릴은 두 손을 맞잡으며 기뻐했다.

이렐린이 풍요의 여신이라 신전 살림도 넉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런 걸 보니 확실히 와닿는다.

아스릴은 그걸 깨닫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본관을 감싼 이렐린의 힘으로 그곳은 1년 내내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다 들었는데, 그 본관 뒤에 있는 기숙사 근처에도 나무들이 간간이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온도는 겨울이라 주변의 아름다운 언덕을 바라보던 아스릴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팔을 감싼 손으로 마구 비벼 대며 안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시작이다.

죽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보다도 더 확실하게 그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생활하는 것도 모두에게 맞출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옆의 같은 공간을 쓰고 있는 이들은 정식으로 신관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그들에게는 돈을 지급하는 대신 열심히 공부하기 위한 환경을 제공해 주고 커리큘럼을 준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고위 신관이 되어 주면 이렐린의 신전에서는 이득이라고 보는 것이었다.

아스릴은 그냥 자신이 계획한 대로 공부하면 되고, 원하면 학생들의 커리큘럼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그저 영애가 신전으로 들어와 신학을 배운다는 행위 자체를 보여 주기 위해서 생긴 자리가 아닌가 싶었다.

“우선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부터 찾아야겠다.”

자신이 먼저 필요하다 요청하기 전에는 하녀도 선생도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정하기에 따라 달려 있었다.

그래서 아스릴은 혼자 돌아다니기로 했다. 물론 씨씨 같은 하녀가 옆에 있으면 편하겠지만, 씨씨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혼자 해내는 것이 어색한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아스릴은 욕실로 들어가 꼼꼼히 깨끗하게 씻고 나와 가장 심플한 드레스 하나를 꺼내 입었다.

신녀들이 입는 옷도 제공해 준다고 하니까 오늘은 내려가서 제 사이즈를 측정해야겠다. 그러면 적어도 이틀 뒤에 신녀복이 나온다고 했다.

“신녀들의 옷이라니…… 내 드레스보다 예쁘던데.”

아스릴의 옷장에는 드레스가 딱 네 벌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벌은 정성을 들여 빨아 둔 것이었다. 바로 씨씨가 선물해 준 하얀 드레스.

혹시라도 여기에서 나태해지거나 어떤 이유로 흔들리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면 이 드레스를 볼 생각이었다.

씨씨가 이걸 제게 선물해 줬을 때의 마음과 이걸 입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렐린의 노래를 낭송한 경험이 굉장히 크게 남아 있었다.

“내가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던가.”

아스릴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빗질도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게 그렇게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아스테리아가 항상 낭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라도 났을 텐데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자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이곳에서는 조금만 해이해지면 나태해지기 십상이니까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했다.

아스릴은 용기를 내어 방을 나섰다.

아주 이르지도 않고 딱 알맞은 오전 시간인지라 주변은 굉장히 조용했다.

아무래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이들이라면 이른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게 마련이다 보니 비어 있는 방인 것 같았다.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까지도 왠지 경쾌하게 들렸다.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제 안에서 받아들이는 게 다른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죽음을 맞이할 시기가 찾아오겠지만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았다.

살기 위해 악착같이 뭔가를 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짧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 봤기 때문일까.

“아, 오셨어요? 아스릴 영애님이시죠? 라토크 님께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리로 오세요.”

1층까지 내려와 여기저기 살짝 기웃거리면서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풍채가 좋은 아주머니 한 분이 아스릴에게 냉큼 말을 걸었다.

이름부터 불린 바람에 마치 마법에 붙잡혀 버린 듯 홀려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 영애님이신데 어쩜 이렇게 곱게 말씀도 하시고~ 안녕하세요, 영애님. 어제 오셨다더니 좀 편하게 주무셨어요? 전에 사시던 곳보다는 훨씬 안 좋았을 텐데요.”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서 들어간 방은 밖에서 본 것보다 꽤 넓었다. 그 안에는 온갖 옷감이 꽂혀 있는 선반들이 한쪽 벽면에 가득 쌓여 있었고, 한쪽으로는 넓은 테이블과 미싱, 그리고 온갖 도구들이 착착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끌려 들어와 지금 막 빈 공간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아스릴의 어깨를 가로지른 것은 바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줄자였다.

신속한 그녀의 손놀림에 놀랄 틈도 없이 그녀는 아스릴의 팔을 한쪽씩 들어 올려 줄자를 싹 대어 치수를 재고, 팔을 든 채로 허리를 재고는 바로 다리 쪽으로 내려갔다.

“아, 네에……. 제 방보다는 여기가 훨씬 밝고 아늑해서 잘 잤어요.”

그녀가 허리둘레를 잴 때쯤에야 정신을 차린 아스릴이 질문에 술술 대답하자 이번에는 저 아래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정말요? 이전 방이 어떠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환경이 마음에 드신다니 참 다행이네요. 확실히 이렐린께서 풍요의 여신이신지라 자신을 배신하지만 않으면 풍족하게 잘 챙겨 주신대요. 저도 여기서 일한 지 오래됐지만, 처음엔 좀 불편해하시던 영애들도 며칠만 지나면 다들 만족하셨더랬죠.”

말을 하는 와중에 두 다리의 길이까지 모두 잰 이 여성은 불쑥 아스릴의 눈앞으로 솟아올랐다.

은은한 갈색의 머리카락과 연둣빛 눈동자를 지닌 이는 역시 신녀복을 제작한다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 저는 에밀라라고 합니다. 신전 내에서 신녀나 신관들의 옷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에요.”

수더분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열정을 가진 이들의 눈은 언제나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많은 영애들이…… 명예 신녀로서 왔다 갔나요?”

방금 재빠르게 쟀던 숫자들을 놓칠세라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에 잽싸게 글자를 써 내려가는 그녀를 보며 아스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녀의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었다.

“많이 다녀갔지요~ 한 번에 한 분씩 오시긴 하지만 보통 최소 기간인 1년만 지나면 바로 나가시니까 벌써 몇 분이나 뵙고 있는지.”

“자, 됐다!” 하는 소리와 함께 메모도 순식간에 끝이 났다.

이 정도 속도라면 옷을 만들 때 옆에서 같이 보고 있어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것만 재면 끝인가요? 이렇게 재고 나면…… 어떻게 만드시나요?”

호기심이 생긴 아스릴이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더 할 일이 없어진 것으로 보이자 떠나기 전에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밀라는 다행히도 정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책장에서 커다란 종이들을 꺼내 테이블에 나열해 놓으면서도 그녀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을 해 주었다.

“이렇게! 이게 뭔지 아세요? 패턴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먼저 종이에다가 치수를 맞춰서 그려 놓고! 이걸 천에다 대고 그려서 재단하는 거예요.”

“아…….”

아스릴은 자와 펜을 가지고 종이 위에 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리 손이 빠른 에밀라라도 선을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손놀림은 매우 빨랐다.

한 번 선을 그은 곳은 다시 그릴 일이 없었고, 한 번 그을 때는 명확하고 시원하게 삭삭 그었다.

“엄청난 능력자시네요.”

아스릴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나와 버렸다. 그녀의 손놀림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고~ 이걸로 능력자는 무슨! 이만큼 하다 보면 다 이 정도는 하게 돼 있어요.”

에밀라는 손을 저어 가며 대답했지만,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였다. 그 모습에 아스릴은 왠지 제가 흐뭇해지는 것 같았다.

문득 아스릴은 많은 영애들을 만나 보았다던 아까의 말이 떠올랐다.

“모두들 1년 만이면 나가나요? 혹시 더 오래 계셨던 분은 없나요?”

최소 기간이 1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제게 그 시간은 너무 짧았다.

“최대 기간 같은 것은 없는 걸로 알아요. 어머, 영애님께서는 1년보다 더 오래 계시고 싶은 거구나~ 신관들이야 좋지 않을까요? 그쯤 돼서도 더 있고 싶어 하시면 정식 신관 준비 과정을 시작해 보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실지도 모르지요!”

에밀라는 첫 번째 종이에 슥슥 그린 선을 따라서 사각사각 가위질을 시작했다. 가위를 그렇게 놀리고 있으면서 이쪽을 바라보는 에밀라의 화려한 기술에 넋을 놓고 있다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때쯤 되면 제가 이걸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할 수도 있을 테니까.

“고마워요, 에밀라. 신녀복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맡겨만 주세요!”

활기찬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제게 힘내라고 응원을 하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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