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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26화 (26/106)

26화

아직 아스릴이 떠나기 전, 그녀가 백작저를 떠날 준비를 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토크는 순식간에 결정을 내리고 짐까지 싸는 아스릴의 대범함에 한 번, 그리고 말도 안 되게 간소한 짐에 두 번 놀랐다.

“정말…… 이렇게 떠나셔도 괜찮겠습니까.”

떠날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부리나케 자신의 짐을 정리해 내려온 라토크는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준비하는 데에 며칠 걸리거나 아니면 몇 달 뒤에 오겠다는 대답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지라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아, 신관님께 쉴 시간을 좀 드려야 했을까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다정한 말을 건네는 묘한 영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라토크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신전에서는 영애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함께 돌아가면 다들 기뻐할 겁니다.”

그는 걱정 말라는 듯이 말하고는 그녀가 직접 짐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뒤에는 그녀의 부모가 서 있었고, 나이가 좀 있는 하녀가 살짝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좀 더 아스릴과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라토크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신전 가시는 길까지는 하녀가 동행을 해도 좋습니다. 명예 신녀시기 때문에 지위를 내려놓아야 하시는 것도 아니고요. 편지는 언제든 자유롭게 주고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녀가 동행해도 좋다는 말에 아스릴은 정확히 씨씨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뒤에 있는 백작 내외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주인께서도 그렇게 하길 바라실 겁니다.”

“아, 그래, 그렇지. 씨씨가 다녀와 주면 되겠군. 마차를 가져오도록 하겠네.”

데모트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을 씨씨가 짚어 준 덕에 딸을 멀리 보내면서 하녀 하나 안 붙여 주는 매정한 아버지를 면할 수 있었다.

하인을 통해 마차를 가져오게 하는 그 틈에 씨씨는 얼른 다가와 아스릴이 들고 있던 낡은 트렁크를 받아 들었다.

제가 들고 있기에도 문제없을 만큼 무겁진 않았지만, 굳이 가져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마음이 급해 씨씨에게 인사하는 걸 놓친 것이다. 씨씨가 빠르게 따라와 주지 않았다면 아마 마차가 떠나고 난 뒤에 아차, 하고 떠올라 가는 내내 무릎을 칠 뻔했다.

마차는 금방 도착했고 라토크는 자신의 마차에, 아스릴과 씨씨는 백작가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떠나는 순간에도 아스릴은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얼마 전에 신전 행사에 나서듯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가씨, 서운하지만 서운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씨씨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말했다. 둘만 있는 곳에서 그녀는 언제나 아스릴에게 제대로 된 아가씨 대접을 해 주었다.

시간을 되돌려 와서도 같았고, 오히려 그녀의 변화를 가장 많이 지지해 준 사람이었다.

“아, 헤르딘에게 인사를 못 하고 왔어요. 그에게도 제가 인사 못 남겨 미안해한다고, 고마워한다고 꼭 전해 줘요.”

“네. 헤르딘, 정말 좋은 녀석이죠.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엄청 좋아할 겁니다.”

은은한 미소를 짓는 씨씨를 보며 잠깐 회상에 젖었다.

그래도 데모트를 떠나는 데에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있었다. 자신을 도와준 씨씨와 헤르딘.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서 홀가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을 떠올려 보자니 아쉬움이 남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신전까지는 시간이 그리 오래 소요되지는 않았다. 다만 돌아가는 길이 어두울 것 같아서 씨씨가 걱정되었다.

신전 행사 때는 걸어 올라갔던 길을 마차를 타고 올라와 본관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 커다란 건물 한가운데서 레나드를 만났던 것까지도 떠올랐다.

신전이 황제의 직속 기관처럼 속해 있기는 하지만 직접 나서서 관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행사만 잘 피한다면, 아스릴은 데모트가로부터도 독립하고, 레나드와 마주칠 확률마저 줄어들 것이다.

어쩜, 이렇게 운이 없는 건가 했는데 이번 명예 신녀로 원망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죽을 운명은 건너갔고, 제가 그렇게 바라던 탈출까지 이루었다.

본관을 지나간 마차는 거대한 건물 뒤로 자리한 예쁜 3층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본관만큼이나 크지만 한 가지의 용도로서 커다란 공간을 품고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작은 공감을 한없이 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은 신관들의 생활 공간입니다. 명예 신녀께서도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안으로 들어오셔도 상관없으니 짐을 들고 따라오세요.”

라토크가 마차를 멈추어 세운 뒤 문을 열고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끝까지 씨씨가 자신의 손으로 짐을 옮기며 배웅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사람들이 많이 생활하겠네요. 아가씨…… 괜찮으시겠어요?”

짐을 들고 내려 아스릴과 나란히 걷던 씨씨는 건물을 휘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신관들이 한꺼번에 살고 있는 곳이라면 부딪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백작저 안에서도 하인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이 없던 아스릴이었기 때문에 씨씨는 걱정이 되었다.

“이럴 때 보면 씨씨가 내 엄마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가씨의 엄마라니, 당치도 않죠.”

“왜요? 엄밀히 말하면 내 부모는 백작 내외가 아니라 씨씨가 맞죠.”

두 사람이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며 뒤따라가던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3층까지 올라간 다음에야 어느 한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스윽 돌아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난 방문이 있었고 각각 주인의 취향대로 너무 과하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수수하게 이름만 새긴 나무를 달아 놓은 곳도 있고, 그림으로 예쁜 리스를 그려 놓은 방도 있었다.

“왠지 아카데미 같은 느낌이네요. 공부하러 모인 또래들과 만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어요.”

정말 딸의 아카데미 입학에 맞춰서 기숙사를 보러 온 엄마 같은 말에 아스릴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웃음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씨씨가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고개를 끄덕였다.

“씨씨가 있어 줘서 너무 든든했어요. 씨씨가 없었다면 옷도 입기 힘들었을 거고, 매 끼니 챙겨 먹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씨씨가 짐을 내려놓자 아스릴은 그녀의 양손을 붙들었다. 정말 말로만이 아니라 씨씨만큼은 가족과 떨어지는 느낌이 강하게 났다.

숙식과 비용에 눈이 멀어서 순식간에 이곳으로 오겠다 결정했을 때에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 때문에 아스릴은 아주 잠깐 후회를 했다.

“아가씨께선 저를 아쉬워하시면 안 돼요. 아가씨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사랑도 듬뿍 받으셔야 해요. 아시겠죠?”

씨씨는 잡힌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스릴은 그녀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지려는 것을 애써 환하게 웃으며 가라앉히려 했다.

“씨씨는 글을 읽을 줄 아니까 편지 보낼게요. 꼭 봐 줘야 해요. 알았죠?”

“그럼요. 아까 들어 보니까 자잘한 거라면 선물도 넣을 수 있다고 해요.”

“무슨 선물이에요. 차암. 그런 거 안 보내 줘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몸 건강히 거기 있어요. 또 봐요, 우리.”

“다음 신전 행사 때 어쩌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쵸?”

씨씨가 자꾸만 이렇게 나오니 아스릴은 결국 눈에서 눈물을 한두 방울 또르르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렇게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나마 저도 그녀에게 나쁘게 대한 적 없고 항상 친근하게 대해 왔다는 것에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이것이 아스릴과의 마지막 연인 것 같아 쉽게 손을 놓지 못했다.

“조심해서 돌아가요. 나중에 꼭 다시 봐요.”

“끝나도…… 안 돌아오실 거죠?”

명예 신녀가 시간적 제한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을 들은 바가 없었다. 평생 공부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녀는 평생 있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기한이 있는 거라면 얼른 여기서 살아 나갈 방법에 대해 찾아야 했다.

한마디로 다시 데모트에 돌아갈 계획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안 돌아가요. 만약 있는 곳이 바뀌게 되면 언제나 연락할게요. 씨씨는 데모트에 그대로 있을 테니까.”

변함없는 것이 있다는 게 좋을 수도 있구나.

데모트가에는 아무런 볼일도 없었지만 씨씨 때문에라도 그들이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살다 살다 데모트가에 그런 바람을 갖게 되다니.

씨씨는 한껏 아쉬움을 쏟아 내고는 깔끔하게 돌아서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자신은 없어서 아스릴은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용할 방은 데모트가에 있던 방보다 훨씬 밝고 깨끗했다. 폭우가 몰아치는 밤이더라도 조명을 켜고 앉아 있으면 매우 포근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하얀색이 주가 되는 방 안은 화려하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우선 짐을 풀어 몇 안 되는 드레스를 옷장에 걸었고, 항상 애지중지 챙겨 다니는, 펜과 잉크가 든 손가방도 꺼내 작은 책상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자잘한 소품까지 쓸 만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재미까지 있었다.

“인사는 잘하셨습니까.”

그때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라토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문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려 애쓰던 아스릴은 얼른 문 앞으로 달려갔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냈습니다.”

아스릴이 살짝 고개를 까닥이자 그도 같은 제스처를 보였다. 간단한 인사 뒤에 라토크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이제 내일부터 아스릴 영애가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뭐든 열심히 하겠단 각오를 다진 아스릴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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