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다행히 4층의 창문 앞으로는 한 사람 정도는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을 법한 평평한 공간이 있었다.
문제는 지금 버티고 있어야 하는 것이 건장한 사내 두 명이라는 것이었다.
“대답이 없군요.”
세드룬이 끄트머리에 간당간당하게 서서 넌지시 말했다. 레나드의 기세로는 눈빛으로 창문을 뚫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이 잠이 들 시간인가?”
“보통은 그렇지만…… 아무도 없는 것일까요.”
그래, 이 방에 지금 없을 수도 있지. 도망가지 못하게 쳐들어온 것이 너무 무모한 선택을 했던 것일까.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영애에게 예의가 아닌가.”
“이미 이런 식으로 방문하는 것 자체가 예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봅니다만.”
세드룬은 그를 겁내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타입이었다. 레나드도 그 부분에선 어느 정도 공감했다.
“그럼 좋아. 들어가서 기다리지.”
이렇게까지 온 거, 오늘은 확실히 결착을 짓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제가 찾으려는 영애가 이 집안에서 굉장히 좋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 같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좋게 표현해서 좋지 않은 위치이지…… 포섭한 하인에게서 전해 듣기로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거의 이 집에서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최근에는 매우 달라졌다고 한다. 그 최근 사이에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이었다.
그녀가 변한 것이지 데모트가의 사람들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그녀는 집안에서 굉장히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두 번째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언니가 아스테리아라는 것이었다. 아스테리아는 제 흑마에게 먹일 물 담을 그릇을 요청한 자신을 매정히 뿌리친 사람이며, 동시에 황태자비 후보에 이름이 올라 있는 여인이었다.
후보가 있는 여인의 집을 직접 방문한 이력을 남기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도 컸다.
아름답기만 한 꽃은 제게 필요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곳이 정말 데모트가의 둘째 영애께서 쓰시는 방입니까?”
세드룬은 창가 자리로 황태자께서 앉을 의자 하나를 옮겨 드리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드룬에게는 그 부분에 대해 공유하지 않았지만 역시 방으로만 봐도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눈치챌 법했다.
“그렇다고 하는군. 신전에서 보았을 때 드레스 화려함의 차이가 단순히 이렐린의 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던 모양이야.”
고개를 끄덕이던 세드룬은 근처에 있던 작은 나무 스툴을 옮겨 와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작은 스툴에 구겨 앉아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 방이라고 했다. 그다음은 도서관. 그래서인지 교육받은 것은 없어도 굉장히 똑똑한 분이라고도 했고.
굉장히 똑똑한 분이라고 평가를 해 준 하인의 태도가 다행이라 여겨지는 한편, ‘교육받은 것은 없어도’라는 부분에서 또 이성이 구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전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여쭤도 되겠습니까.”
세드룬이 진지하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방은 고요했고 방 바깥은 더 고요했다. 스툴에 아슬아슬하게 앉은 커다란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레나드는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라.”
“이렇게 아스릴 영애를 만나서……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세드룬이 하는 질문치고 굉장히 두루뭉술했다. 알고자 하는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이 되는 질문이 아니어서 레나드의 대답도 선뜻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세드룬이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제게 이런 질문을 꺼낸 것인지.
“경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전하의 말이 날뛰었다고 하셨던 그때 말씀이시군요.”
홀로 경계로 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세드룬은 그의 곁을 지킬 수 없다는 부분에 신경을 쓰긴 했어도 혼자 있는 그가 위험에 빠질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검술에도 매우 능해서 어떨 땐 자신의 호위가 필요 없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그때 그래서 발도 제대로 떼기 힘들어하는 말과 함께 돌아온 그를 봤을 땐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만났던 영애라니, 어떤 뜻인 걸까.
“날뛰는 말의 발에 채어 기절한 그녀를 깨어날 때까지 돌봐 주었던 그때, 그녀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순간…… 이상했다. 세상이 변하는 것 같았어.”
여자를 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신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니 제대로 전달도 못 했는데 그녀는 항상 내게서 도망가 버렸다. 제대로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신전에서 이렐린의 꽃 낭송을 대신 한 것으로 보아 굉장히 잘 배우고 자란 여인 같았는데, 조금 깊이 알아보니 이 모양이고…….”
말끝을 흐리며 그는 방 안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그 의미를 못 알아챌 수가 없어 세드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반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단순한 호기심인가. 명확하게는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내가 이대로 이 영애를 모른 척 놔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대답에조차 명확한 결론은 없었지만, 이상한 확신에 차 있었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 단순히 눈만 맞추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알아야 했다.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급속도로 어둠에 잠겼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떠오르고 나서야 달빛이 잠시 그녀의 방으로 들이치기도 했다.
하지만 밤이 새벽으로 가는 시간까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 우선 돌아가셔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조심히 묻는 세드룬에게 레나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생각을 수천 번을 하면서도 세드룬에게서 저 말이 나올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레나드는 스툴에서 일어나 창문을 다시 열었다. 산이든 벽이든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한 법이었지만, 레나드의 신경은 온통 4층의 방에 남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깥을 내다봐 주지는 않을까 하는 괜한 기대는 땅에 발을 디딜 때까지도 계속되었지만, 사람 목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 * *
그날 왜 그녀가 방에 돌아오지 않았는지 레나드는 이틀이 지난 뒤에 알 수 있었다.
“……뭐라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레나드는 허탈하게 다시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그녀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데모트 백작저로 보냈던 첩자였다. 정확하게는 정찰이 주특기인 기사였지만.
그 또한 자신이 전하는 말이 그에게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일지 알고 있었으나 최대한 태연하게 다시 한번 보고했다.
“이틀 전 데모트 백작저로 신관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얼핏 듣기로 아스테리아 영애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스릴 영애에게 제안을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 같았습니다. 가족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그날 신관을 따라서 백작저를 나섰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설명을 들어도 레나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게 어째서 하필 자신이 방문했던 이틀 전이고, 그녀는 어떤 제안을 받았기에 고민도 없이 바로 따라나선 것인가. 잠깐 들렀다 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이후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녀가 어디에 무얼 하러 갔는지 주인들이 관심이 없으니 거기에 고용된 이들이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인가. 기꺼이 용기를 내어 찾아간 곳인데, 바로 그날 미련조차 없이 그곳을 떠나 버렸다니…….
“그럼 거기까지인가. 신전은.”
“신전에 대한 소식은 아직입니다. 새롭게 루트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이 용기 내어 다가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는 적극적인 편이었고, 누가 시키기 전에 스스로 할 일을 찾아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놓치기 십상이었고, 할 수 있었던 일임에도 놓치면 반드시 후회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패배한 느낌, 강한 어떤 힘 때문에 떠밀려 실패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전으로 갈 생각을 하다가 레나드는 가만히 몸에서 힘을 풀었다.
신전은 데모트가에서 했던 방법을 사용할 수 없는 곳이었다. 물론 그녀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방문할 수 있는 방법이야 있었다.
하지만 신전 행사가 끝난 지 오래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황태자를 신전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미지수였다.
“방법은 있는 것인가. 내가 은밀히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그리고 내가 알아보는 것이 그녀라는 것은…… 더더욱 들켜선 안 돼.”
레나드가 단호하게 당부하자 첩자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이 제가 맡은 임무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주의해서 신전의 소식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럼.”
그가 나간 방 안에는 역시나 정적이 내려앉았다. 여러 명이 있는 공간에서의 침묵과 혼자 있는 방에서 흐르는 침묵은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는 그 침묵을 눈치챘을 때 편안히 한숨을 쉴 수 있는 편이라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끝까지, 해 보실 생각이십니까.”
세드룬이 구석에 있던 몸을 빛 아래로 움직여 보이며 레나드에게 물었다. 살짝 멍한 얼굴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레나드는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
“뭘 시작했어야 말이지. 마치 누가 방해하는 것 같아서 더 불타오르는 느낌이 드는군.”
레나드의 미간이 슬쩍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