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저…….”
열심히 앞만 보고 말을 몰고 있던 레나드의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길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을 타고 있던 레나드는 그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목청을 살짝 높였다.
“말하라.”
“어디를 가시기에…… 이렇게 말을 타고 황궁을 나오셨습니까? 심지어 해가 이렇게나 떠 있는 한낮에 정문으로 나오신 것도 아니고 이렇게 숲을 우회하면서까지…….”
심지어 이 길로 가다 보면 데모트 백작의 저택에 당도한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이신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가서 보아야겠다. 정작 그녀와는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못했으니까.”
그의 해답은 자고로 단순했다.
직접 부딪쳐 보는 것.
사실 그것 말고는 해답이 없어 보였다.
이러한 감정을 주변에 물어볼 수도 없었고 말이다.
사랑은커녕 증오마저 없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세드룬. 자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황후 클로이, 그리고 황후와 자신 사이에서 새우 등 터지고 있는 로나르드.
대체 누가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얘기해 줬기에 자신은 이렇게 직진만 할 줄 알게 된 것일까.
“그녀라 하심은…… 역시 전에 우스 호수 경계에서 마주쳤다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때는 세드룬도 없을 때였다. 날뛰는 말은 그 정도로 빨랐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달리고 또 방향을 바꾸어 달렸다.
수색해서 레나드가 있던 호수 근처 오두막에 세드룬이 도착했을 땐 이미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였으니까.
그는 세드룬에게 미쳐 날뛰던 말이 사람을 덮칠 뻔했던 이야기, 그 난리 속에서 한 여인이 말의 발에 차일 뻔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사이 만난 다른 여인의 이야기를 전했다.
레나드는 ‘다른 여인’의 이야기는 짤막하게 설명하며 무례하고 이기적인 아가씨 같다며 개인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았지만 오두막에서 그녀와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말하며 매우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감추려고 하는 것이 보이는데 설명은 간단하게 끝나는 것이 우스웠다. 감추려는 모양새가 뭔가 있다는 암시를 더 강하게 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더 그 여인과 관련한 일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서 그렇게 물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이토록 진지하게 과거의 일을 복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진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니, 너무 당황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렇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
“그분이 항상 경계의 숲에…… 계시는 겁니까?”
분명 귀족 영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은 경계와 우스 호수 방향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황후의 눈을 피해서 우회하며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에 그곳으로 무작정 가시는 것일까. 세드룬은 점차 걱정이 차오르는 얼굴이 되었다.
“거기는 다시 찾는지 안 찾는지 모르겠군. 다만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거든.”
한 번도 이름으로, 혹은 가문의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세드룬은 당연히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우회해서 나온 것도 모두 이해가 되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겠습니다. 자꾸 신경 쓰여 하셨으니 제가 보기에도 두 분은 한번 제대로 만나시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세드룬의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자신을 잡으려고 드는가.
레나드가 속력을 내려던 것을 세드룬의 흐릿한 말꼬리가 잡아채 버렸다.
살짝 짜증이 묻어나는 레나드의 미간을 본 세드룬은 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피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가시는 것인데…… 아무 예고도 없이 쳐들어가 버리면 영애께서 더 무서워하시고 경계하시지는 않겠습니까?”
세드룬……. 레나드는 그가 보기보다 매우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약한 영애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알리고 가는 것은 도망갈 시간을 주는 게 아니겠나.”
레나드는 도망간다는 단어에 혼자 웃기 시작했다. 정말 언제든 틈만 나면 도망가고 싶다, 도망칠 구멍이 있나 고민하던 시간은 전부 던져 버렸다. 도망칠 때가 아니라고 결심했듯이 그녀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잘 피한다면, 피할 틈조차 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도망갈 시간도 틈도 주지 않을 생각이다. 백작저에 뒷문으로 들어가거든 4층을 노려라. 그곳에 있다고 했다. 우선 그렇게 들어가서 둘만 오붓하게 대화를 해야겠어. 다른 사람은 참견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에 진척이 필요할 때였다.
지금 황궁의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자꾸만 시선이 먼 곳을 향하고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모습이 머물러 있었다.
일에 대한 실수는 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놓기 일쑤였다. 그러나 평소처럼 행동해야 했다. 날카롭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황후 클로이를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재무 쪽으로 보낸 로나르드가 맡긴 일에 흥미를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곳을 헤집어 비리의 흔적까지 발견한 모양이었는데, 뭐 그렇게 깊게 파고들어 황자의 자리를 이용해서 색출해 내기까지 해 준다면 참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클로이는 그런 로나르드의 모습에 눈에서 불을 뿜을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자꾸 그런 것에 얽매여 있다가 정작 중요한 자리를 놓쳐 버리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고 계시니 말이다.
저렇게 하다가…… 나까지 잘못되면 그대로 황제로 올리면 되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데다가 제국은 재무 쪽으로는 빠삭한 황제를 얻게 되는 것이니 크게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경계 언저리를 지나고 저 멀리 우스 호수를 보면서 달렸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달리고 달려 데모트 백작저의 웅장한 뒷담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야…… 담이 아주 훌륭하군.”
이제부터 그가 넘어야 할 담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식으로 문을 열어 달라 하고 그녀의 부모인 데모트 백작과 이야기를 조금 나눈 다음에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넌지시 자연스럽게 말해서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거치기가 싫었다.
“이대로 담을 넘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
오는 내내 탐탁지 않아 하던 세드룬도 왠지 백작저의 뒷담 앞에서 의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세드룬은 순식간에 밧줄의 매듭을 지어 뒷담 위, 거의 성벽에 가까운 담 위의 돌출 부분에 정확히 고리를 걸었다.
세드룬은 듬직한 손놀림으로 그렇게 밧줄을 걸어 그가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작전이었다. 정말 밧줄을 타고 남의 저택 벽을 오르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드룬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하는 분이었다. 그 길이 험난하다면 그 고생조차 즐길 분이었다. 그런 분이 이번에는 어떤 영애에 꽂히셔 가지고는 이런 일까지 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숨길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했다. 세드룬이 그것을 감히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이란 그렇다고 들었고,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더 성숙시켜 준다고 하였다.
한 가지 문제점은 자신의 주인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방금 식사를 하기라도 했는지 어느 지점에서는 아주 맛있는 음식 냄새까지 났다. 하지만 레나드는 씩씩하게 밧줄을 넘어 뒷마당을 가르며 달려갔다.
세드룬은 그 자리에서 그를 두고 한 번 더 돌아설 뻔했지만, 결국 그를 향해 뛰었다.
왜냐하면…….
“저, 황태자 전하. 이번만큼은 정말 문을 통해 들어가시지요. 자그마치 4층입니다.”
그가 이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르려 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가는 게 더 재미있겠는데, 만나기 험난해지니까 더 보고 싶어졌어.”
저런 걸 두고 사랑이 깊어졌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세드룬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저렇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드려야겠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밧줄을 거는 것은 팔심이 좋은 세드룬의 몫이었다. 우선 2층의 튀어나온 곳에 밧줄을 걸고 오르고, 그렇게 저택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이용해 올라갈 생각이었다.
4층에는 3층의 톡 튀어나온 창 때문에 걸 데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포기할 이들은 아니었다.
“왠지…… 오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끝까지 가 보자고.”
아스릴이 보고 있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를 만큼 유치한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4층까지 올랐다.
이 안에는 분명 아스릴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뜬금없이 나타나는 날 보면 아마 깜짝 놀라 뒤집어질지도 모른다.
도망을 가거나 쓰러질 때를 대비해서 그녀를 들어 안아 줄 마음의 준비까지 마쳤다.
똑똑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휘이잉- 등 뒤에서는 높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