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스릴은 4층 방으로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준비를 하고 나중에 와도 된다는 라토크의 말에도 아스릴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그동안 하나하나 모아 두었던 드레스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드레스 말고는 따로 모아 둘 것이 없어서 그녀의 짐은 그게 다였다. 이곳 도서관에 있는 <이렐린의 노래> 또한 그녀가 탐을 내는 물건이었지만 그것까지 들고 갈 생각은 없었다.
신전으로 가는 것인데, 그보다는 이 데모트 백작저를 떠나는 것인데 그녀에게 망설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짐을 싸느라 분주한 그녀와 그녀를 돕는 씨씨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데모트 백작의 눈이 매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닥쳐올 걱정거리를 이고서 답답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어이 가려는 것이냐.”
데모트 백작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아스릴은 그것부터가 이미 너무도 낯선 일임을 알고 있었다.
백작의 발길이 4층에 닿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얼마 만……? 언제는 올라와 본 적이 있었던 것일까.
“왜 저를 말리시는 거죠? 집 안에 있든 없든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집을 나가는 것이…… 그렇게 불리한 일인가요?”
아스릴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데모트 백작에게 핵심을 찌를 생각에 신이 났을 뿐이다.
“아하. 제가 가면 아스테리아의 노래 낭독이 조금 문제가 되겠군요. 그걸 신경 쓰고 계신 건가요?”
아스릴은 그제야 바삐 움직이던 몸을 일으켰다.
백작과 마주 보고 서서도 주눅 들지 않았고 그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일부러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구는 사이 두 사람의 관계도 많이 변화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막으실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신관의 앞에서 절 보내신다 약속하였으니까요.”
아스릴이 가겠다 대답할 때 백작 내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 이야기에 반대를 할 수는 없었다.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라토크는 아스릴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알아차렸다. 짐만 챙겨서 곧장 따라가겠다는 아스릴의 약속을 듣고는 백작저에 방을 요청했다.
아스릴이 며칠 내로 떠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 부탁에 데모트는 멍하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집을 이렇게 비워 두고 간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냐. 네가 이십 평생 살아온 근간을 이리도 빠르게 놓아 버릴 수 있느냐는 말이야.”
아스릴은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섰다.
어쩜, 이럴까. 차라리…… 대놓고 방임하고 학대하고 그러는 편이 나았을까. 어린 제게 책을 읽지 않으면 밥도 주지 않겠다 으르렁대며 협박하던 그가 그대로 대해 주었다면…… 오히려 편한 마음으로 떠났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아스테리아 언니에게 네가 빨리 이렐린의 노래를 외울 수 없냐고 물어보세요. 그게 훨씬 납득하기 쉬울 것 같네요.”
아스릴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 * *
“하아!”
“촤!”
간결한 기합 소리와 요란한 기합 소리가 번갈아 가며 울리고 있었다. 황궁 내의 연무장에서 울리는 소리는 원형으로 뚫린 천장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고 안으로 다시 울렸다.
레나드는 계단 의자에 앉아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객석처럼 연무장을 두르고 있는 벽에 난 계단 바로 앞에서 두 기사가 열심히 대련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 항상 레나드의 곁에서 따라다니며 그의 안위를 지키고 호위를 하는 세드룬이었다.
황실 기사단들의 훈련 장소인 연무장에서 이토록 세드룬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장면은 흔치 않은 일이라 거의 모든 기사단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계단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두의 시선이 대련을 펼치는 세드룬과 상대 기사에게 향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흘끔흘끔 이쪽을 넘어다보고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대놓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 군중 속에서 자신의 시선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선과 기척은 언제나 레나드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게 자신을 향한 것이라면 악의를 담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한시도 놓치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것이니만큼 지금은 몸이 익혀 놓아서 신경 쓰지 않아도 절로 알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주의를 주거나 시선을 마주 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왜 그들이 자신을 이렇게 보려고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세드룬이 나와 대련을 하는 것이 흔하지 않듯, 자신이 이렇게 나와 기사들 사이에 앉아서 대련을 구경하는 것도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드룬은 가끔 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연무장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주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달에 두 번이 될 수도 있었고 어떨 땐 6개월에 한 번이 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세드룬이 연무장에 오면 레나드가 함께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레나드의 곁에 세드룬이 항상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드룬이 가는 길에는 레나드도 함께했다. 그래서 그가 연무장에 올 수 있는 날은 레나드에게 별다른 일정이 없을 때에나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와아!”
그때 세드룬의 검기가 연무장을 휩쓸다시피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 연무장 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지만 상대방의 표정, 그리고 관객이 된 기사들의 반응을 통해서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세드룬의 특기인 광역 공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베는 용도가 아닌 겁을 주기 위한 정도로만 사용했는지, 상대방은 얼이 나간 얼굴로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세, 세드룬 경의 승리입니다!”
“와아아아!”
누구도 상대 기사가 세드룬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심판을 맡은 기사단장의 선언에 환호를 질렀다.
그래도 기사로서의 패기와 긍지, 자부심으로 뭉쳐 있는 이들이라 간혹 정말 진심으로, 혹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이겨 보겠다는 이들이 종종 있는 듯했지만 아직까지는 그 바람을 실현시킨 이가 없었다.
오늘도 세드룬은 스스로의 명성뿐 아니라 레나드의 이름까지 드높여 주었고, 더불어 레나드를 지키는 기사는 제국 최강으로 오늘도 그를 꺾는 데에 실패했다는 보고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잘난 부하를 이용하여 오늘도 든든한 방어벽이 얼마나 든든한지 증명해 준 셈이었다. 정보가 없다고 직접 부딪쳐 보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도록 말이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벤트를 벌이게 된 것이기도 했다. 한밤중이나 새벽녘, 침실 주변을 어지럽히는 인기척, 발소리 같은 것들을 알아챈 적이 몇 번. 직접 물리친 적도 많았지만 매번 일일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때마다 암살자들을 내쫓은 것은 세드룬이었고, 그것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드룬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가 어떤 이였기에 암살자들을 모두 막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었고 꾸준하게 그의 건재함을 보여 줌으로써 웬만한 암살자는 돈만 날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끔 해 준 것이었다.
괜히 황실의 돈을 어둠의 루트로 흘려보내는 것도 막을 수 있고, 이길 수는 있겠으나 아주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으니 위험부담도 줄이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너무 바빠 자신의 시간이 안 된다 싶으면 아예 다른 일 미루고 연무장에 와서 대련하는 것을 우선할 때도 있었다.
“세드룬 님! 정말 최고이십니다!”
“저도 대련을 요청드립니다!”
대련이 끝나자 멍하니 서 있는 상대방을 두고 세드룬이 먼저 장외로 걸음을 옮겼다. 묵묵하면서도 한눈에 보아도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는 그는 검을 정리하는 모습까지 멋있어서 모든 기사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세드룬이 격렬한 대련 후에도 이토록 숨이 차지 않고 땀방울이 살짝 맺힌 정도가 다이니 아마 상대해 줄 것이다. 나도 오후에 별다른 일이 없으니 두어 명 더 대련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레나드는 씨익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일어나지도 않고 기사들이 앉아 있는 계단 한중간에 앉아 여유롭게 말을 던지는 그에게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물론 그중에는 세드룬도 있었다. 못마땅한 듯한 세드룬의 눈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무뚝뚝한 편이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기사들과 주변의 귀족들은 그가 매우 충직하고도 예의에 목을 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그의 속내는 그런 생각들과는 사뭇 달랐다.
거의 자신을 친구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속내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잠깐 탓하는 눈길을 보내긴 했지만 금방 다시 올라가 다음 상대를 고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을까.’
그렇게 대련을 시켜 놓은 레나드는 이번엔 아스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내 자신을 피하고 있는 상태였다. 둘만 있던 그곳에서 입맞춤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보는 것을 피하기만 하고 바라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자신에게서 얼른 멀어지려는 생각이라는 게 너무 빤히 보였다.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도 왜…… 그만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걸까.”
이것도 자존심인가, 한번 결정하면 가져야 하는?
난 그런 쓸데없는 치기를 가진 어린애는 또 아닌데 말이야.
레나드의 한숨이 깊어 갈수록 옆에 선 기사들은 안절부절못하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뭘 그렇게 깊이 고민하시는 겁니까. 황태자님 스타일로 밀어붙이십시오.”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여자와 이런 식으로 얽혀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새드룬이 던진 말에 혹하면서도 레나드는 또다시 망설였다. 내일은 어떡해야 하나, 하고 고민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