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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22화 (22/106)

22화

“아래층에 손님이 와 계세요.”

“아니, 손님보다, 씨씨, 무슨 일 있어요?”

누가 왔든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에게 손님이 있을 리가 없다.

씨씨의 안색부터 살피려는 아스릴의 팔과 어깨를 살포시 잡은 씨씨가 아스릴을 이끌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스릴은 씨씨가 이끄는 대로 또 순순히 따랐다.

씨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스릴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갈 뿐이었다. 씨씨는 기어이 1층까지 아스릴을 데리고 내려온 것도 모자라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가기까지 했다.

“어, 어…… 아스릴, 왔니?”

거기엔 데모트 백작과 백작 부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상석이 빈 채였고. 백작 내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행색이 그의 신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얀 천 위에 금빛 수를 놓은 옷을 보니 이렐린 신전의 신관. 수의 화려함으로 짐작건대 그때 보았던 리레그보다도 높은 신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스릴이 안으로 들어서자 신관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허리를 숙였다.

“라토크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신전서 나왔고요.”

그는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웃는 얼굴 또한 고와서 체격만 아니었으면 여자로 착각할 뻔했다.

“아, 네……. 아스릴 데모트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데모트 백작 내외는 한껏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마구 드러내고 있었다.

대범한 사람들이네. 그나저나 이곳에 아스테리아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신전에서 왜 자신이 아닌 아스릴을 만나러 왔냐고 난리를 피울 것이 뻔했다.

지금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백작 내외보다 훨씬 더 무례하게 굴 테니까.

라토크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백작 부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전은 제국의 귀족 계급과는 전혀 동떨어진 존재이므로 상석이 구분되는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까닭에 이루어진 좌석 배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은 스툴을 가져와 저 아래쪽에 홀로 앉을 것을 그랬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이번 신전 행사에서 있었던 낭송 사건 때문입니다.”

아스릴은 탄식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았다.

기어이 그게 문제가 되었구나. 아니, 사람이 실수도 한번 하고 그러는 거지, 어째 그걸 가지고 이렇게 쪼르르 달려와서는 사람을 난감하게 하느냐 말이다.

아까 바깥을 보며 레나드를 떠올린 탓에 심기가 많이 뒤틀려 있던 참이었다. 아스릴은 입술을 비죽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먼 길을 오실 만큼 중요한 일입니까?”

아스릴은 속과는 반대되는 말을 꺼냈다.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에 라토크도 예쁜 얼굴에 미소를 피웠다.

“중요하다마다요. 이렐린의 꽃의 최대 임무가 낭송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는 곱게 웃는 얼굴로 가시 돋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다시 한번 아스테리아가 이곳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내려오지 말라 한 것일까, 아니면 데모트 백작이 이렇게 될 것을 예견해서 내려오지 못하게 한 것일까.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 것 같아서 기다렸으나 백작 부부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바라보자 두 사람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선 아무런 말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제 생각과는 좀 다르지만…… 우선 어떤 말을 하러 오신 건지, 듣고 싶습니다.”

아스릴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뉘앙스를 잊지 않았다. 강요와 억압은 그녀가 가장 민감하고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대상이 백작 부부가 아니더라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라토크는 부드러운 미소 뒤에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칫 무례할 수도 있을 법한 말과 반응들에도 그는 그저 살살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지요. 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아스릴 영애가 낭송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아스릴 영애가…….”

그가 잠깐 말을 멈추자 세 사람은 모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 순간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아스릴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더 긴장하고 있겠지.

차마 그의 이야기에 앞서서 지레 겁먹은 얼굴로 실수를 용서해 달라 어쩐다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버티고 있는 것이리라.

라토크의 여유로운 미소는 이런 초조와 불안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실 그는 좋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는데 초조한 바람에 그를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신전으로 와서 명예 신녀가 되어 주시는 것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다면 이렐린의 신학에 대해 더욱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이렐린의 꽃이 약간 신전의 마스코트 같은 것이라면, 명예 신녀는 정식으로 신녀의 생활을 체험하며 이렐린 신학을 배울 수 있는 영예를 얻는 것이었다.

“그때 보니 아스릴 영애께서 이렐린의 노래를 아주 정교하게 외우고 계시더군요. 단순히 문자의 나열을 읽는 것이 아니라 대서사시의 가운데에서 이야기를 꺼내어 읽어 주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렐린의 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리고 그걸 들은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긴장이 탁 풀렸다.

아스릴이야 평소처럼 심드렁해졌지만, 백작 부부는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저…… 아스릴은 그, 이렐린의 노래를 외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소이다. 괜히 신전에서 나서서 명예 신녀로 데려가셨다간…….”

항상 침착한 데모트 백작마저 말을 더듬고 말끝을 흐릴 만큼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는 라토크를 보니 아스릴은 아주 살짝 흥미가 생겼다.

“신전에는 이렐린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오히려 잡다한 것을 많이 알고 있을수록 순수하지 못하고 다른 것들로 눈이 돌아가게 마련이지요. 오히려 그렇다고 하면 생각보다도 더 명예 신녀에 어울리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흡족한 미소까지 보이자 데모트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남은 것은 아스릴의 결정이었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그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심드렁한 표정은 오히려 저를 두고 오가는 이런 이야기들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거, 꼭 지금 결정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스릴은 그 고요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백작 부부의 숨소리가 들렸지만, 아스릴은 그들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누구도 저를 흔들 수 없었다. 부모인 데모트 백작 부부라고 해도 말이다.

그동안 그들이 해 준 것은 없었다. 이 집에 있을 수 있게 해 준 것? 적어도 데모트의 이름을 타고나 하인들의 무시는 받지 않고 살게 해 준 것? 그리고 이렐린의 노래를 외우는 노동의 대가로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준 것.

그것에 제가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아스릴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방관, 무시, 혹은 억압을 벗어나겠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정은 언제든지 해도 좋습니다. 우선은 저희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리러 왔습니다. 신전으로 들어가 생활을 해야 하니, 당연히 신중하게 결정을 하셔야겠지요.”

“신전으로…… 들어간다고요?”

“그렇습니다.”

문득 그녀의 머리를 때리는 한마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아스릴은 그 부분에서 번뜩 눈을 떴다.

신전으로 들어간다는 건 이곳을 떠나는 걸 의미한다. 그 뒤로 신전을 나가야 한다고 한들,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혹시 명예 신녀를 하면서 필요한 비용이 있지는 않습니까?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따로 떨어진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독립. 차라리 아무런 돈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 백작저의 원조는 포기하고 그냥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자리라면 이곳을 떠나는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돈을 대 주지도 않을 테지만.

아스릴은 살짝 늘어뜨린 눈썹을 하고 마치 부모님의 고생을 안타까워하는 딸처럼 이야기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은 라토크는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저었다.

“비용이라니요. 신을 모시는 법을 배우겠다는 이에게 돈을 받다니 신전답지 않습니다. 이렐린은 풍요의 신이기도 해서 신전은 궁핍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학문에 정진하고 이렐린의 신학을 발전시켜 줄 분이라는 생각에 비용을 지급해 드리기도 합니다.”

아스릴은 눈이 반짝거리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이제껏 밭을 일구네, 바느질을 하네, 온갖 상상을 해 왔던 것이 바로 나가서 먹고살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 집을 나가려면 제일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스스로 먹고살 수 있어야 이 지긋지긋한 백작저를 당당하게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다.

아스릴이 가장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나가 살다가 너무 힘이 들어 차라리 예전의 그 삶이 나았다 하고 되돌아오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이란 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글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제가 혼자 나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성공할 만한 일은 더욱 드물다는 것을.

라토크가 제안한 이야기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신학에 대해 공부를 할 수 있는데, 거기다가 일정 비용을 지급해 주기까지 한다니 말이다.

데모트 백작의 표정이 한층 미묘해졌다.

“명예 신녀, 제가 하겠습니다. 이토록 좋은 기회를 마다하는 것은 어리석은 없는 일입니다. 신학에 대해 깊이 공부할 수 있다니 기대되네요.”

백작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게…… 자신이 백작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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