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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21화 (21/106)

21화

신전 행사를 핑계로 황후는 귀족 부인들을 초대해 소소하게 티타임을 가졌다.

황제의 곁을 지킨다는 명목은 남의 눈을 피할 때는 좋지만,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주는 사람이 있을 때나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시거나 디저트를 즐길 수 있었다.

본래 사교 모임과 달콤한 디저트가 넘치는 티타임을 좋아하던 클로이는 찾아와 준 부인들을 융숭하게 대접한다는 핑계로 화려하게 테이블을 꾸며 놓았다.

“항상 그렇지만 걸어 올라가는 일은 정말 너무 힘들어요.”

그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아주 소소한 것들이었다. 그저 황후를 뵈러 온다는 명목으로 모인 이들이었기 때문에 한담을 나누기에 바빴다.

“정말이에요. 이번에 아주 예쁜 구두를 맞췄는데 올라갈 땐 신어 볼 엄두도 못 냈다니까요?”

실내 응접실에서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고, 화려하고 앙증맞은 디저트를 입에 넣으며 꽃 같은 부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두 분 폐하께서도 하루빨리 신전 행사에 다시 나오셔야 할 텐데 말이에요.”

“황실석이 휑하니 비어 있는 게 어찌나 아쉽던지요.”

아쉽다는 티를 있는 대로 내며 서로서로 동조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 빈자리를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듬직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정말 몇 개월 사이에 이렇게나 믿음직스러워지시다니요.”

한가로운 분위기와 향긋한 차, 달콤한 디저트를 앞에 두고 흡족한 미소를 짓던 클로이는 흠칫했다. 하마터면 그녀들 앞에서 미소를 지울 뻔했다.

“호호. 그렇던가요. 대부분 밖으로 나가거나 집무실에 있으니 못 본 지 오래되었답니다.”

“황제 폐하를 뵈러 자주 오시지는…… 않나 보죠?”

옆에서 살짝 난감한 듯한 기색을 보이자 그 맞은편에서 서둘러 끼어들었다.

“폐하의 빈자리를 대신하느라 얼마나 바쁘시겠어요. 아직 정식으로 물려받은 것도 아니라 혼자서 하나하나 다 해 나가셔야 하는데 말이에요.”

“어머 어머, 그렇군요. 전하께서도 참 고생하고 계세요. 호호.”

자기들끼리 걱정했다가 변명했다가 하는 것을 보며 클로이는 호흡을 유지하는 데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황태자의 말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조금만 묘한 기색을 보였다간 다들 그런 눈으로 바라볼 테니까.

자기가 낳지 않은 자식이 황태자인 꼴을 보기 싫어하는 거라고.

‘사실을 그대로 알려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흠, 클로이는 미묘한 미소를 올리며 황태자 칭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녀들을 두루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이렐린의 노래를 낭송한 영애, 황태자 전하와 좀 어울릴 거 같지 않아요?”

“으음? 갑자기요? 나란히 서 있는 건 못 본 것 같은데…….”

문득 이상한 말을 꺼낸 것은 로나민 후작 부인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영애와 영식들을 이어 주는 것을 취미로 하는 그녀는 눈썰미가 좋아서 그런 식으로 누구와 누가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고 보니 낭송을 한 여인이 아주 아름답고 지적인 분이었지요?”

“데모트 영애라 하던데요?”

로나민 후작 부인이 꺼낸 ‘이렐린의 노래를 낭송한 여인’에 대한 대화가 갑자기 화악 퍼졌다.

클로이는 뭔가 의문스러워졌다.

지난해에 이렐린의 꽃을 했던 영애가 올해 또 한 번 그 직책을 이어 간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영애에 대한 감상과 칭찬의 말들이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그 영애가 그렇게나 아름답던가요?”

“그 찰랑한 금발에 새하얀 드레스가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요.”

“음, 게다가 낭송하는 모습도 우아하고 목소리도 청아한 게……. 이렐린의 노래 낭송을 그렇게 열심히 들은 게 처음이었던 것 같았어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생각했지요. 전하와 매우 어울리는 분일 거라는 느낌이 확 들더라니까요?”

다른 부인들의 연이은 칭찬에 로나민 후작 부인이 그것 보라는 듯 턱을 살짝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으음, 황제가 될 분의 옆이 어울리는 영애라는 말이군요.”

황후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머, 이미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다니. 올해에 황태자비 전하가 들어오시는 모습까지 볼 수 있는 걸까요?”

오호호, 부인들끼리 오가는 웃음 속에 클로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물론 황태자는 황태자비를 맞이하고 곧 황제가 서거하면 그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저들이 생각하는 황제가 될 황태자와 자신이 생각하는 황제가 될 황태자가 전혀 다르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나저나…… 그 데모트의 영애가 그렇게나 아름답다는 말이지.

이미 다른 주제로 넘어간 부인들의 대화에 호호 미소를 지어 주는 클로이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레나드 황태자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혼담에서 데모트의 이름을 찾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렇게나 바라던 티타임 자리가 갑자기 귀찮아졌다. 이게 파하고 나야 황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 혼담 목록을 뒤져 볼 텐데.

하하 호호, 톤 높은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부인들을, 클로이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미소 아래 짜증을 담뿍 담은 그녀의 이면을 모르고 있었다.

* * *

신전 행사 이후로 아스릴은 사람들이 자신을 신경 쓰는 것을 느꼈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 좀 변하기는 했지만, 누구도 그녀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주방으로 내려와 음식을 찾아 먹었고, 옷도 씨씨를 통해 구해다가 입고, 굳이 하녀나 하인들을 불러다가 이거 해 줘, 저거 해 줘 난감하게 굴지도 않았으니까.

만약 그녀가 백작가의 아가씨처럼 이거저거 누리려 했다면 진작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을 테니까.

“일부러 없는 듯이 있다가 나가려고 했던 건데…….”

아스릴은 커다란 창문 앞, 좁지만 평탄한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밑에서 굳이 찾아보겠다고 유심히 올려다보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는지라 아스릴이 바깥바람을 쐬고 싶을 때 앉아 있곤 하는 곳이었다.

물론 너무너무 무서울 만한 높이였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지만.

지금도 창문이 덜컹거리기 시작하면 절대 나가지 않는다.

그녀는 발 뻗고 누울 수 있을 만한 공간에 편안히 앉아 서늘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다가 하인들이 그녀를 피하는 걸 여실히 느끼고 왔다.

아마 백작 내외와 아스테리아의 분위기가 심각하기 때문이겠지.

신전 행사에서 있었던 일은 온 수도에 쫘악 퍼졌다.

딱히 퍼졌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수도에 사는 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참석하는 자리였던지라 알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데모트 백작가의 고용인들은 자신의 주인들이 날카로워져 있는 것을 눈치 못 채려야 못 챌 수가 없었다.

이 집에서 담담한 것은 아스릴뿐이었다.

아스릴이 앉아 있는 곳에서는 백작저의 후문이 보였다. 그 뒤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우스 호수가 나오고, 저 너머 나무들이 짙은 색을 띠는 곳이 바로 경계의 숲이다.

걸어갔다 오는 게 가능하니 눈에도 잘 보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어서 숲 멀리까지는 시선을 잘 주지 않았다.

그 뒤로 레나드가 뭔가 해 오지 않을까 싶어 경계하던 마음이 푸시식 식어 버렸다. 바람이 잔뜩 들어갔던 허파에서 바람이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마주쳤을 때 모른 척하려 애쓰고, 그가 의미심장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모른 척하고. 심지어 아스테리아에게는 그날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음을 알려 낭송도 망치게 해 놓고선…….

그는 그저 조용히 행사에 참석했을 뿐이고 그러고 사라졌다.

며칠씩이나 그걸 가지고 마음 졸이고 걱정하고, 그가 찾아오면 어떻게 하나, 뭐라고 할까, 그럼 나는 거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일들을 해답도 내지 못한 채로 신경 쓰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대체 그런 걱정은 왜 한 거야.”

황태자와 한낱 백작 영애다. 심지어 자신은 집안에서 인정받는 영애도 아니었다.

숲에서 만난 그가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알 리는 없지만. 한눈에 반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이 가능하겠냐고.

“나는…… 반할 만한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이 첫눈에 반했다면 그 상대는 언니지, 자신은 아닐 터였다.

아스릴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얕게 열린 입술 틈으로 새어 나온 날숨이 너무 무서워 지붕이 꺼질 것만 같았다.

뒤쪽의 길 저 너머에서부터 불어온 바람 탓에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리며 흩날렸다.

그리고 그때 어딘가에서 소란스러운 소음이 올라왔다.

“손님이라도 오신 건가.”

아스릴은 딱히 뒤의 소란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거세지는 바람을 느끼고 다시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사악사악, 빗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비집고 달리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끝도 없이 엉킨 머리를 풀어 주려 빗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상념에 잠길 때의 버릇이 되어 버렸다.

서둘러 이곳을 나가야겠다. 이 집을 나가면 어디에서 살 것이며, 뭘 해서 돈을 벌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지, 그래도 돈을 벌려면 사람들 근처에 사는 게 좋겠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이렐린의 노래를 낭송하는 것밖에 없으니…….”

저도 모르게 탄식하는 목소리에 한숨이 잔뜩 묻어났다. 이제는 좀 살짝 짜증도 나려 했다.

똑똑똑.

“아가씨? 잠깐 나와 보시겠어요?”

그때 자신의 부정한 마음을 달래듯이 씨씨의 목소리가 바깥에서부터 들려왔다. 나긋한 부탁의 목소리에 아스릴은 삐뚤게 나가려던 생각을 접고 자연스럽게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망설임 없는 발걸음은 이미 방문 앞에 다다라 문을 열고 있었다.

“씨씨? 무슨 일이에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씨씨를 본 아스릴은 화들짝 놀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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