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레나드는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것들이 정리가 되지를 않았다.
“전하, 아직 계시는 겁니까?”
그를 향해 세드룬이 말을 걸었지만, 그의 시선은 아직도 신관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초록색 독약을 마시는 것은 피했지만, 경계라고 알려진 숲으로 들어가자 흑마가 날뛰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그것이 저편에서 수를 쓴 것인지, 아니면 경계의 무언가가 흑마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경계에서 동물들이 이상행동을 보인다는 것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레나드는 일어나는 대신에 세드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날 이후 레나드는 그 일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해결해야 저편에 반격을 할지 조용히 있을지를 정할 텐데…….
“그것이, 보고를 드릴 만한 명확한 정보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세드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씁쓸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날 그 숲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할 이야기는 다 해 주었다.”
물론 흑마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은 전부 다 주었다. 숨기고 있는 이야기는…… 아직은 그 혼자만 알고 있어도 충분한 이야기였다.
*
‘워! 워!!’
미친 듯이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온 숲을 뒤흔들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레나드는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이게 지금 무슨……!
분명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말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계라 불리는 숲은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비밀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 했다.
들어온다고 영향을 받는 곳은 아닐 텐데.
경계라 불리는 숲에 들어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제가 타고 있던 흑마가 고삐가 풀린 양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저 앞에 나타난 인영을 발견하고 말았다. 심플한 드레스를 입은 금발 머리의 여자.
그땐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 여인은 서 있는 자리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대한 놀라움과 돌진해 오는 흑마의 위협적인 모습에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 버린 모양이었다.
‘워! 멈춰!’
급히 고삐를 당겨 보기도 하고 목을 끌어안아 당겨 보기도 했다. 중간중간 눈을 들어 확인하니 여인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고, 애석하게도 제 말을 제일 잘 듣던 흑마는 고개를 돌릴 줄도 모른 채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거기! 위험합니다!’
목청껏 소리를 쳤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먼저 반 발자국만이라도 옆으로 비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매서운 경고를 날리고 있는데도 그녀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가까스로 몸이 조금 옆으로 기운다 하는 순간 엄청난 힘으로 땅을 짓치는 흑마의 앞발이 코앞까지 들이닥치자, 그 여자는 그제야 머리를 팔로 감싸며 고개를 수그렸다.
퍽!
‘꺄악!’
땅으로 내려찍는 앞발에 완전히 짓밟힐 거라 생각하고 있던 찰나, 뭔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면서 여자의 팔을 쳤다.
누군가 엄청난 힘으로 그녀를 저 멀리 밀어 버리는 듯한 모양새로 가냘픈 여인은 외마디 비명만을 남긴 채로 저 멀리 날아가 나동그라져 버렸다.
‘괜찮습니까!’
여자는 팔로 머리를 감싼 그 자세 그대로 거의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졌다. 흑마는 사람을 친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뭔가 요인이 있기 때문인지 여인과 부딪치고 나선 갑자기 달리던 것을 멈추고 숨을 거칠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 여인이…… 바로 아까 저 자리에 앉아 있던 그 여자였다.
올해도 작년과 같은 이라던 이렐린의 꽃이 낭송 중에 버벅거리고 정신을 놔 버린 그때, 마치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것처럼 그 여자가 등장했다.
아니, 그 전에 먼저 중정으로 나선 레나드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그녀였다.
어떻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그것은 잘 모르겠다. 그것이 그토록 강렬한 경험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레나드는 뒤에서 세드룬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다시 기억을 반추했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가까이, 앗!’
여자는 조잘조잘 다급하게 말을 하면서 몸을 다시 일으키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다리를 딛고 일어서려던 그녀의 허벅지 쪽에서 강한 떨림이 일었다.
허벅지 근육에서 찌릿하는 통증이 일더니 힘이 탁 풀려 버린 것이다.
속절없이 쓰러져 내리는 그녀의 몸을 레나드가 단단한 팔로 받쳐 주었다. 한숨을 내쉬자 뜨거운 호흡이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흔들리는 금발 머리와 떨리는 몸이…… 레나드를 흔들었다. 이것이 무슨 느낌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역시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잠시 실례를 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곤 팔부터 조심스럽게 주무르듯이 만지며 내려갔다. 틈 없이 그렇게 만지면서 어디 아픈 곳은 더 없는지,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인지 알아보려는 움직임이었다.
‘나는…… 레나드 아그로드라 합니다.’
그녀 몸에 강하게 닿는 손의 압박감에 온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는 제 소개에 온몸을 경직시켰다. 그걸 풀어 주기 위해 조금 더 강하게 팔 근육을 꽈악 문질렀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심지어 피할 수 없는 신분의 보증, 성까지 붙여서 말이다.
여인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떨리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역시나 그의 신분을 듣고 놀란 것 같았다.
‘화,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해야 하는 것은 잊고 제대로 예를 갖추지도 못한 채 인사를 올렸다. 많이 당황한 듯한 것이 음성으로도 느껴졌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데…… 첫 번째 도전은 실패였다.
‘내가 그대의 몸을 이렇게나 만지고 있는 것에 대해 혹여 불안하게 여길 듯하여 밝히는 것이다. 다른 의도는 없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팔을 거쳐 이번에는 다리를 잡았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는 움직여 보려 했지만, 힘 있는 커다란 손이 그녀의 움직임을 모두 하찮게 만들어 버렸다.
그의 손은 발목과 종아리를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아무리 의료 의미가 강한 움직임이라고는 하지만, 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밀접한 스킨십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괜한 음심이라도 드는 것일까. 걱정되는 마음 반, 감촉 좋은 이 피부에 달라붙은 듯이 떨어지기 싫은 본능적인 마음 반으로 레나드는 계속해서 마사지를 해 주고 있었다.
‘그, 그만!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아픈 곳은…… 아까 그 허벅지가 전부입니다. 조심히 움직이면…… 걸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혹시 점점 올라오는 그의 손에 담긴, 순수한 의도 외의 순수하지 않은 본능을…… 눈치챈 것은 아닐까.
레나드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가 불편해한다 여겼을 뿐이다. 순순히 손을 물린 그는 다시 아까 앉아 있던 곳에 앉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 돌아가겠다고 할 텐데, 데려다주겠다고 해야 할까. 집 앞까지 가서 들여보내 주는 것까지는 해 주고 싶은데, 혹시……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그녀가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낼 것만 같아 그는 급히 입을 열었다.
그의 물음에 그녀는 마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상하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이제 막 처음 봤을 뿐이면서 도저히 이 여인을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 침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오두막을 아주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아스릴…… 아스릴 데모트라 합니다.’
‘아스릴……. 데모트라 하면 데모트 백작가의 영애였군.’
오두막에는 고요함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지금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한 귀족 영애를 위험에 빠뜨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어서 이야기한 거였으니까.’
‘괜찮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의 말에 대해서 완벽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말을 하다가 뚝 끊어 버리고 말았다.
자신보다 더 긴장한 모습은, 안타깝게도 자신과 같은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레나드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두운 오두막 안에서도 어쩔 수 없이 빛나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백작 영애치고는 굉장히 수수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머릿결과 뽀얀 피부, 그리고 붉게 빛나는 입술까지 그녀의 외모는 전혀 수수하지가 않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내려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이 어느새 마비될 때까지 레나드는 한없이 가까이 다가가기만 했다.
핏기 없이 하얀 그녀의 볼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보이는 것만큼이나 차가운 피부에 서늘함을 느끼기보다는 가슴이 아련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알지도 못하는 사이 여인, 아스릴의 부드러운 피부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전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스릴의 눈가로 또르르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저 음욕을 위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려고 했다면, 제가 그것을 원했다면 언제고 누구와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자신의 심장을 움직이고, 제 손을 멋대로 움직이고, 곁을 지키게 만들었던 그녀이기에 이 작은 마찰마저 그의 심장을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왜 울고 있는가?’
아직도 떨어지지 않는 그의 손은 이미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버렸다. 조심스럽게 묻는 그의 목소리마저 촉촉하게 젖어 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스릴은 그의 질문에도 입술을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이로 깨물자 부푼 입술에 생기는 통증이 생각보다 아픈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스릴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자꾸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돌려 버리는 것이 아무리 봐도 자책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말을 해야 해. 대답을 해야 해. 그대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이런 느낌은 정말 처음이라고, 급했지만…… 반드시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해야 해.
그사이 아스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신이 그녀의 반응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그때, 아스릴이 갑자기 내달리기 시작했다.
레나드는 그녀가 조심스럽게 백작저에 잠입하듯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 데모트 백작저의 영애라 한 것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데모트라면 공신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에겐 자랑거리인 첫째 딸이 있다고 했다. 이렐린의 꽃을 이번에도 받았다 했던가.
황후가 밀고 들어오면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영애였는데, 갑자기 제게 다가오는 위협을 느꼈다.
방금 그 영애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데모트의 둘째 영애임이 틀림없었다.
레나드는 자신의 두 손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 했다. 그 간단한 몸놀림 속에 그녀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어디까지일까, 흑마가 그렇게 날뛰었던 것처럼 제 심장도 이상하게 요동쳤을 뿐인가, 아니면 그냥…… 제 마음이 그렇게 움직여 버렸던 것인가.
백작저에서 돌아오는 길, 그는 가만히 중얼거리듯이 아까의 이야기를 쭈욱 상기해 보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충격적이었다.
먼저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던 게 자신이었던 것도 깜빡 잊은 채, 그는 아스릴에 대한 생각에 쭉쭉 빠져들어 가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