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스릴의 말은 미묘한 여지를 남겼지만, 표면적으로는 데모트 백작저의 다른 사람들도 보호하는 방향이었다.
여기서 뭐 대놓고 저들을 저격해 봐야 무엇하겠나. 눈앞에 있는 신관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도 아니고.
시간을 되돌려 다시 4개월을 찾게 해 준 덕에 지금은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지만, 그것이 이렐린 신의 가호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가족인 척 웃고 있는 저들도 싫었지만, 아스릴은 사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 사랑을 배운 이에게마저 배신을 당했던 처지가 아닌가.
아스릴은 다시금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레나드의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아스테리아 영애는 지금도 몸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신전의 남은 행사 동안 앉아 있기도 어렵겠고…….”
아스릴의 대답을 듣고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던 리레그가 말을 꺼냈다. 굉장히 유감이라는 듯한 말에 백작 부인이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 그렇지만 지금은 좀…….”
“그럼, 아스릴 영애. 영애께서 함께해 주시죠.”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백작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리레그는 듣지 못한 척 아주 자연스럽게 아스릴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 신관이라는 사람, 굉장히 기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아스테리아와 자신을 봐 왔던 사람이라 역시, 그간 어떤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네가 날 구원해 줄 거냐 하고 삐딱하게 생각하던 아까와 달리 그가 조금 믿음직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백작 부인이 괜찮다고 말하려 일어나는 그 순간에 제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와 줄 수 없겠느냐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와야 한다는 약간의 압박이었다.
아스릴에게 주는 압박이 아니라, 꽃의 역할을 망쳐서 둘째 딸이라도 데려가야 하는 상황을 만든 아스테리아를 탓하는 것이었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거라면, 제가 가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언니는 아직…… 아픈 거 같아서요.”
아스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리레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슬쩍 마주친 두 사람의 눈에서 은근히 상대방을 살피려는 날카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 제가 갈 수 있어요!”
보다 못한 아스테리아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그녀를 돌아보는 리레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픈 걸 참고 올라가셨다가 또 아까처럼 뛰쳐나가셔야 할 일이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두 번이나 그런 일을 만드시느니, 오늘만 조용히 대타를 세운다 생각하시면…… 되겠군요.”
리레그는 조곤조곤 그녀를 제지하고 나섰다. 얼른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나서려 했던 아스테리아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백작 부인은 아스테리아를 다독이면서 거의 울 듯한 얼굴이 되었고, 데모트 백작은 이 상황을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스릴의 곁에 내가 있겠네. 직접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니…….”
아스릴의 눈이 백작을 관찰하고 있던 사이 문득 백작이 눈을 돌리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을 모두 격파해야만 신전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홀로 나갈 수 있는 상황에, 그녀는 왠지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 가면 레나드도 있고 해서 크게 흥미가 없었는데…… 이렇게 기를 쓰고 못 나가게 하고, 심지어 자신의 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나서는 백작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아니나 다를까, 백작의 말을 들은 리레그는 아스릴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알아채 가는 중인 것이다.
아스릴은 난감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내렸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레그는 그 순간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자연스럽게 백작을 보았다.
“이제껏 행사 때마다 아스릴 영애도 참석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옆에 누군가 있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요? 영애께서 어째서……?”
리레그는 마치 작정한 것처럼 그들 하나하나를 격파하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것도 조금 통쾌했지만 남의 손에 이렇게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이쿠, 이런. 곧 예배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아마 지금 바로 가지 않으면 그나마도 비어 있는 채로 한 시간이 지나가겠군요. 가실까요, 아스릴 영애.”
리레그는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일단락 지었다. 심지어 계속해서 발목 잡고 못 가게 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경고한 것이다.
“아, 아스릴…….”
방금까지 보호 명목으로 그녀와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겠다 말했던 데모트마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묵묵히 리레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아스릴 영애.”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리레그 신관님.”
제게 왜 저런 눈빛을 보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스릴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나가는 것 말고는 그들에게도 방법이 없을 테니까.
리레그가 문을 열고 비켜서자 아스릴은 그대로 그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남은 세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다.
리레그는 그 뒤로 아스릴에게 별다르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뭔가 눈치를 채고 있다면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자신이 그녀를 구해 준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 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또한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앞장서 홀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대신관이 연설을 할 시간인 모양인지 좀 더 높은 단상 위로 대신관이 올라서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높은 곳의 대신관에게로 향해 있는 좋은 타이밍에, 아스릴은 리레그를 따라 고요히 입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주목받지 않는 뒷자리라 하더라도, 신관 쪽에 앉아야 하는지라 귀족들, 특히나 황태자가 있는 곳과 마주 보는 자리라는 것이었다.
“이곳에 앉으십시오.”
리레그는 친절하게 안내를 마친 뒤 좀 더 앞의 자리로 이동해 앉았다.
신전 행사는 분기별로 열리는 데다 신전의 위상을 보이고 이렐린을 모시는 일이었기 때문에 신관 쪽은 대체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렐린의 꽃마저도 굉장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니까.
그 속에서 아스릴은 단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본래 한 번도 반짝이는 것을…… 아니 애초에 무언가 온전한 것을 내 것으로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화려한 것, 주목받는 것에는 좀 약했다.
불편한 자리에서 아스릴은 불편해도 고요히 제 몫을 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행사가 끝나서까지도 리레그는 그녀를 매우 담백하게 대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든가 도움을 준답시고 질척거리는 것도 없었다.
“오늘 저희 가문에 해 주신 배려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님도 언니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할 거예요.”
아스릴은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뒤 홀을 나서려 했다. 앞다투어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홀은 웅성대는 소리들 때문에 시끄러워 얼른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스릴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든 호기심은 독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저 위의 황실 사람들을 위한 좌석에서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는 레나드를 발견하고 만 것이었다.
심지어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아스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행사 시작 전에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제가 그 아스릴이라는 것을 몰랐을 텐데.
대체 나한테 중정 있다고 말해 줬던 사람 누구야?
그 사람을 데려다가 혼쭐을 내 주고 싶어지는 심정이었다.
“그럼 이만.”
아스릴은 서둘러 시선을 내리고 인사를 했다. 뒤돌아 나가는 발걸음이 급했다.
저기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니 서둘러 나가면 레나드를 마주치지 않고 신전을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저 사람도 같이 온 사람들이 있고 일정이 있을 텐데, 설마 신전 밖에서 걸어 내려가는 이들까지 붙들려고 혼자 뛰어오거나 하지는 않겠지.
왁자지껄한 홀을 나서서 고요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제 다리가 뻐근해질 정도였다.
“모두 끝났어요. 어서 돌아가…….”
그런데 문을 벌컥 열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스테리아의 흔적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와……. 이렇게 간다고?”
막 나가겠다는 건가. 아스릴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그대로 백작저로 돌아갔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아마 거기까지는 아닐 것이다. 신전의 언덕 아래 자신들이 잡아 놓은 여관에 있겠지.
아스테리아가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 우겼겠구나.
백작 부인은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백작을 설득했을 것이고, 그럼 우선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는 생각으로 움직였겠지.
“혼자 언덕 내려가는 거야 뭐, 일도 아니지.”
이 언덕을 걸어 올라온다는 것이 참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힘들다고만 생각했었다. 이전엔 확실히 제대로 먹는 것도 없어 올라오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모두가 마차나 말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가는 곳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아스릴은 다시 방 안을 둘러보며 잊은 것이 없는지 찾아보았다.
“아, 귀걸이…….”
아니나 다를까, 아스테리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몸부림치듯 울고 있을 때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반짝거리고 치렁치렁한 것을 바라보던 아스릴은 그것을 대충 자신의 손가방 안에 넣었다. 필사를 했던 것들도 조용히 챙겨서 방을 나섰다.
누군가 안내해 주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혼자 가는 것이 편했다.
어쩌면 조금 더 일찍 백작저를 나서도 되지 않을까? 아까 그 리레그를 찾아가 신전의 심부름꾼으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심부름꾼이라면 신학을 잘 몰라도 신성력 같은 게 없어도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스릴은 꽤나 밝아진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보며 신전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