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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17화 (17/106)

17화

“그때 그 사람이 황태자님이었다니…….”

방으로 돌아와서도 넋이 나간 아스테리아는 계속해서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이대로 올라간들 적어 준 것을 제대로 읽기나 하려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실 넋을 놓고 싶은 것은 아스릴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일을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어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했던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그는 그날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 눈치채 버린 것 같았다.

아스테리아에게 그날의 일을 상세하게 말함으로써 아스릴에게 기억하고 있음을 알렸고, 그 말을 하는 내내 그의 푸른 눈동자는 아스릴에게 꽂혀 있었다.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겠다고 우쭐해선 먼 길을 나섰던 것이 화근이었다.

똑똑.

“아스테리아 영애, 낭송하실 구절입니다.”

때마침 신관이 도착했다. 아스릴은 아직도 넋이 나간 아스테리아를 대신해 신관을 들이고 구절을 확인한 뒤, 아까 꺼내 두었던 종이에 머릿속에 담겨 있는 글자들을 끄집어내 한 자 한 자 적기 시작했다.

자꾸 머릿속에 자신을 직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지만 애써 물리치고 글을 쓰는 데에 집중했다.

‘……데모트?’

열심히 종이 위를 긁으며 글씨를 남기던 펜촉이 멈춰 버렸다. 머릿속에서 레나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나마 소속감도 없는 성을 읊는 목소리인데, 머릿속에 울리는 그 목소리가 정확하게 그녀를 지목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데모트 백작가의 영애다…….’

“어떡하면 좋아……? 황태자님은 또 왜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거야……? 하아, 아니, 내가 그분 얼굴을 알았으면 그런 일은 절대 안 했지!”

그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리는 사이 아스테리아가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절규했다.

그래, 지금 저 마음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도 아마 데모트 백작가의 4층 방이었다면 저렇게 미친 듯이 중얼거리거나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 맴도는 그 목소리가 전혀 떨쳐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도망가는 것이냐.’

왜 도망을 갔겠습니까, 잘난 황태자 전하님…….

위엄 있고 화려한 황태자의 제복이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런 분과 이런 우연으로나마 말을 섞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현재 사교계에 나가서 내가 어제 신전에서 그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하면 부러워서 비명을 지를 영애들이 수두룩할 것이었다.

물론 아스릴은 사교 모임에 나가 본 적이 없지만.

하지만 지금 데모트의 자매는 한 남자로 인해 완전히 넋을 놓아 버렸다.

“아, 잉크 번질 뻔했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스릴은 종이에 잉크가 번져 써 두었던 글자를 망칠 뻔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스테리아의 정신을 돌봐 주는 것은 제 몫이 아니었다. 필요하면 제가 먼저 어머니를 찾든 아버지를 찾든 하겠지. 여기서 그녀는 제 몫을 완수하면 되는 거였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신께 기도를 올리는 자세로 굳어 버린 아스테리아와 아스릴 사이에는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올해에도 지난번 그 영애가 이렐린의 꽃이 되었다면서요?”

“이렐린의 노래를 그렇게 잘 낭송한다고 하니까요. 그 어려운 걸. 정말 여신님의 사자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신전 안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전에서는 매년 크게 네 번의 신전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이렇게 귀족들이 모여서 제국과 황실의 안정을 기도하고 이렐린 신을 향해 찬양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다.

2층의 상석, 이렐린 동상의 바로 아래에는 황태자 레나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로 지난번 신전 행사 때까지만 해도 황제, 황후가 함께 자리를 했는데, 황제의 빈자리를 보니 그의 갑작스러운 병환을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시작하겠습니다!”

문득 단상으로 올라온 이가 크게 말하자 커다란 장내에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벽을 타고 흐르는 듯한 목소리는 저 뒤에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러 가지 신전 행사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이렐린의 꽃이었다.

그녀가 단상에서 노래를 읊음으로써 이렐린과 땅을 잇는 길을 열어 준다는 의미였다.

“아스테리아, 정신 차려. 언니 차례야.”

“응, 아, 알고 있어.”

이렐린의 동상 아래에 위치한 황실석의 반대편에 있는 단상에 아스테리아가 올랐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관심. 그리고 그 사이에는 건너편 황실석의 레나드의 시선도 끼어 있을 것이다.

아스테리아는 긴장한 그대로 단상 위로 올라가 섰다. 그리고 다른 이렐린의 꽃들도 낭송할 구절을 적은 종이를 올려놓는 데에 사용했을 테이블 위에 슬쩍 아스릴이 준 종이를 올려놓았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아야 했지만, 이미 오래 해 온 일이라 문제없을 것이었다.

아스릴은 단상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는 아스테리아를 보고는 잘하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단상 뒤에서는 정면으로 황태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스테리아를 확인한 그는 슬쩍 시선을 옮겨 장내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자, 시작!”

신관이 기다리다 못해 던진 신호를 받아 아스테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눈앞에 종이를 대 줘야 또박또박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진하게 퍼지는 이렐린의 향이 온 제국에 닿아 낮에는 무한한 꽃으로, 밤에는 수많은 별들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낮밤…….”

아스테리아는 역시나 잘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사태를 경험한 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에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살짝 끄트머리가 떨리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양호했다.

아직 읽어야 할 것은 좀 많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해 내는 아스테리아를 보며 안심한 아스릴은 자꾸 황태자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조금 편안하게 풀었다.

여기서 이렇게 긴장하고 있을 필요 뭐 있어. 그 남자가 나를 기억해 준다고 큰일 날 일이 뭐가 있어? 그럼 뭐가 달라지나?

황후가 직접 나서서 황태자비를 물색하고 있다고 들었다. 황제의 병간호로 바쁜 와중에도 황태자와 어울리는 최고의 영애를 탐색하고 물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자리는 아스테리아가 차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렐린께서 온 거리에 베풂을……!”

아스릴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아스테리아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듯했다. 떨리는 눈동자가 왠지 불안해 보이는가 싶었는데, 아스테리아는 기어이 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아스릴은 귀에 꽂히는 말에 흠칫 떨었다. 아스테리아가…… 말을 씹은 것이었다.

이렐린의 노래를 낭송할 때엔 완벽하게 말하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 했다. 남들은 보고 읽어야만 하는 것을 외울 수 있다는 것이 그녀만의 장점이었다. 그래서 아스릴이 쓴 걸 몰래몰래 봐 가며 낭송을 하고 있었는데…….

신관들이 경악한 얼굴로 아스테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피를 잃은 아스테리아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스릴은 그녀의 상태가 기어이 폭발해 버릴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왜 멈춰 있는 것인가. 말을 이어 가야지, 말을!”

신관들에게서도 이제 슬슬 술렁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스릴은 초조하게 단상 위의 아스테리아를 바라보았다. 빨리 말을 해!

아무 구절이나 읊어도 지금 당장 그것을 알아차리는 이는 신관들밖에 없을 테니까 아무 말이나 좀……!

“그것이…….”

기어이 아스테리아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주저앉아 버렸다. 신관들은 경악했고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믿었던 이가 제대로 낭송을 마치지도 못한 채 쓰러져 버린 것에 대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꽃의 노래 낭송 행위는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신전의 행사는 국가 행사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꽃의 노래 낭송은 예전에 신의 사랑을 받아 예언의 능력을 얻은 인간이 이렐린을 찬양하기 위해 불렀던 노래들을 낭송하는 자리였다. 예언자가 빠짐없이 꼬박꼬박 불렀던 것으로 인하여 절대 빼먹을 수 없는 중요한 순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후 예언의 능력을 받은 이가 없는 세대에서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이렐린의 꽃을 선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마스코트에 지나지 않지만 모두들 꽃을 선망하게 된 것이다.

“가서 영애를 빨리 데리고 나와!”

“낭송은! 어찌하고!”

아스릴은 순간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라도 가릴 것을 찾기 위해 재빠르게 시선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얼굴을 가릴 만한 것이 없었다.

“저, 제가 마무리해도 되겠습니까?”

단상 주변의 신관들이 아스릴을 바라보았다. 아스테리아의 여동생이라고 하더니 수수하지만 꽤 아름다운 영애였다.

그들은 앞뒤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상황은 수습해야 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의 노래 구절은…….”

“아까 언니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낭송할 수 있습니다.”

신관은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신의 사자라 하더라도 거의 명목적인 이름이라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렐린의 꽃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이가 나오는 것은 문제였으나, 이미 꽃이 쓰러지는 것을 모두가 보았기 때문에 대타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상황이었다.

“올라가도록 합시다.”

“리레그! 괜찮은 겁니까!”

신관들의 실랑이는 잠깐 더 이어졌지만, 아스릴은 금방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씨씨가 마치 오늘 일을 예견하고 만들어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스릴은 망설임 없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시선들이 몰렸다.

이런 시선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시선들 속에 레나드가 있을 거라는 것.

눈을 들지는 못했다. 조금만 움직이다 보면 분명히 그를 향해 붙박여 버릴 시선을 알기 때문에.

“진하게 퍼지는 이렐린의 향이 온 제국에 닿아 낮에는 무한한 꽃으로, 밤에는 수많은 별들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낮밤, 그 경계가 없는 곳에서 찾아오시는 여신님의 가호를 받습니다.”

아스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순식간에 장내를 장악했다. 힘이 있는 몪소리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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