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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16화 (16/106)

16화

“어째서 도망가는 것이냐.”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목소리. 신전의 복도는 폭이 좁은 대신 층고가 높았는데,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그의 목소리가 아스릴의 심장을 울렸다.

순간 아스릴은 전혀 다른 생각이 하나 찾아들었다. 이제껏 혼자 맘 졸이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하나의 가정 말이다.

아스릴은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도망가려던 몸짓을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하게 몸을 돌려 그를 향해 섰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법한 높이에 있는 그의 두 눈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모르는 분이 이쪽으로 뛰어오시기에 놀랐습니다.”

모르는 분. 아스릴은 긴장되는 마음을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진정시키며 태연함을 가장해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부른다 한들, 그가 황태자라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라면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변명의 여지는 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사실 이번 생에서의 연결 고리란 하찮기 그지없었다.

경계의 숲에서 그가 타고 있던 말의 발에 차였고, 그래서 몇 시간 동안 그가 보살펴 주었고, 이야기 몇 마디 나누다 입술을 잠깐 머금었을 뿐이다.

그에겐 그런 일이 비일비재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알고 있는 황태자란 그냥 별다른 소문이 없는 이라는 게 전부였으니까.

사람의 좋은 소식은 잘 퍼지지 않아도 나쁜 소식은 몸집까지 부풀려 가며 커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짐작 하나만이 있을 뿐…….

혼자 지레 겁먹었던 대상은 아스테리아를 따라 찾아온 신전의 위압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앞에서도 너무 겁부터 집어먹고 가슴앓이에 힘든 나날을 보냈다.

신전에 대한 무서움도 떨쳤으니 이번에는 그를 떨칠 때다.

“내가 먼저 다가왔다……? 내가 보기에 그대가 먼저 도망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아마 입꼬리를 올리면서 그런 말을 했다면 대번에 좋은 사람일 것 같다는 가정을 버리고 그대로 돌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제가 왜 먼저 도망을 가겠습니까. 오해를 하셨군요.”

아스릴은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을 최대한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를 보고 있을수록 자꾸 이전 생에서의 두근거림이 가슴에서부터 번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떨림을 감추기가 오히려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을 마주쳤을 뿐이고, 그가 먼저 제게 다가오려 하자 돌아서 가려 했을 뿐이다. 여기까지 했으면 그는 수긍해야 한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잠자코 듣고 있던 레나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의 거친 머리카락과 손을 들여다볼 때면 그는 이런 표정을 지었었다. 커다란 손으로 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거칠고 찬 손을 감싸 주었다.

그때의 자신은 그게 너무 창피해서 한겨울이지만 냇가로 나가 씻어 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밤새 머리카락을 빗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고, 그는 잠깐 안쓰러운 빛을 띠다가도 곧 포근하게 감싸 주고 쓰다듬어 주었었다.

“그대는…… 그렇다면 정말 나를…….”

“아스릴!”

계속해서 빤히 자신을 보고 있던 푸른 눈동자가 일렁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테리아의 목소리. 원래의 아스릴이었다면 저렇게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들썩일 만큼 놀랐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말을 꺼내려는 참에 끼어든 목소리에 아스릴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일행이 와서 가 보겠습니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그리고 기세 좋게 아스릴의 팔뚝을 휘어잡아 끌고 가려는 듯 다가오던 아스테리아를 정지시킨 것은 바로 눈앞의 레나드였다.

통로 바깥에서 쏟아지는 빛이 그의 모습을 삼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 뒤에 서 있던 그를 발견한 아스테리아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경계의 숲에서 흑마 타고 있던 남자…….”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들여다보던 아스테리아는 나직이 중얼거리면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모두 작년 한 해 동안 신전 행사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었지만, 황태자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이목구비를 식별할 정도랄까?

“누구시죠?”

거기다가 ‘흑마’를 말했다면 아마도 경계의 숲에서 마주친 것일 텐데…….

아스테리아가 난감해하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거의 처음인지라 아스릴은 그 길을 막지 않았다.

거기서 바로 황태자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스릴에게는 어떻게든 말 한마디라도 붙이려고 고심하는 모습이었는데, 아스테리아를 보는 눈에는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아스테리아의 시선이 그의 예복에 닿았다가 다시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놀라는 걸 보니 경계에서 보았던 남자가 황태자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날 행색이 조금 지저분하긴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모르는 사람을 무시를 했나 싶었는데…….

지금 아스테리아는 두 사람이 만났던 경계에서의 일을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설픈 인연 한번 이어 보겠다고 잘못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그날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니까.

“아, 아닙니다! 화, 황태자 전하시죠? 죄송합니다. 제 여동생이 뭔가 전하께 해를 입히기라도 했을까요?”

역시 아스테리아는 그날의 일은 묻어 버리기로 결심한 듯이 화제를 돌렸다. 마침 제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자기를 대번에 동생이라 부르는 아스테리아의 옆에 아스릴은 순순히 가서 섰다.

그 움직임을 레나드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아스테리아는 곧바로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다급히 말을 꺼냈다.

“얘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혹시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데모트의 이름으로 깊이 사죄를 드립니다.”

“……데모트?”

레나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아스테리아를 이용해 슬금슬금 물러나려 했던 아스릴은 아스테리아가 꺼낸 데모트의 이름에 반응하는 레나드 때문에 움찔했다.

지레 놀라 그를 바라보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움찔하는 순간을 그가 보지는 않았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결국 눈을 들었다. 시선이 레나드의 얼굴에 닿는 순간, 푸른 눈동자와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예, 저는 데모트의 아스테리아라고 합니다, 황태자 전하.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렐린의 꽃이 되어서 오늘도 신전 행사를 준비 중이었지요.”

드디어 자기소개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아스테리아의 얼굴에 아름다운 홍조가 올라왔다.

기대에 부푼 볼과 반짝이는 눈동자. 가만히 보고 있자면 아스테리아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잘 관리한 미모는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

하지만 아스테리아에게로 향한 레나드의 시선은 심드렁하고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렐린의 꽃이라, 그렇군. 그래서 두 사람이 데모트 백작가의 영애다…….”

“예. 아스테리아 데모트입니다, 황태자 전하.”

아스테리아는 눈길 한 번 더 받으려, 한 번 더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 애쓰고 있는데, 그의 시선은 아스릴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렐린의 노래 낭송 구절을 받아야 할 시간이 되어서 말이죠. 본식에 앞서 제 낭송을 들어 주신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아스테리아는 수줍게 웃으며 그에게 은근한 마음을 던졌다. 가볍지만 확실한 아스테리아의 말에 내내 아스릴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레나드의 시선이 슬쩍 아스테리아에게로 옮겨 갔다.

드디어 자신의 말이 통했다 여겼는지 아스테리아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렐린의 꽃이라면…… 이렐린 신의 사자라고도 하지.”

“그렇습니다, 전하. 제가 바로 이렐린 여신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한 이렐린의 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그 위치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노래를 외우는 것을 제외하고 미모와 신학 역사에 대해선 어렸을 때부터 갈고닦아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드디어 그가 자신을 알아봐 주자 아스테리아의 어깨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솟아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아, 그럼 나는 그 경계의 숲에서 이렐린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로군. 내 흑마가 쓰러져 물을 먹여야 했는데, 이렐린의 사자는 내게 물을 담을 그릇 하나 허락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아이고.

그의 말은 꿈에 부풀어 있던 아스테리아도, 살짝 뒤에서 방관하고 있던 아스릴도 굳어 버리게 만들었다.

그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흑마에게 물을 먹이기 위한 그릇을 빌려 달라 요청했는데, 대차게 외면하고 떠났다는 말을 씨씨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 아스릴은 정말 기가 막혀서 목덜미를 잡을 뻔했다.

아스테리아가 이 정도로 생각 없는 여자였나 싶어서. 그날 황태자의 몰골이 아무리 안 좋았기로서니, 옷을 약간 용병처럼 입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기까지였으리라. 얼굴을 볼 겨를도 없이.

하지만 흑마를 봤어야 했다. 제국에서 흑마는 흔한 종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말을 탈 수 있는 이도 얼마 없었다.

얼마 없는 말을 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황족 아니면 고위 귀족일 텐데.

“저, 전하. 그날은…… 그날의 일은…….”

아스테리아는 망연자실하게 입술을 달싹였으나 문장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먹혀 버리고 말았다.

어깨를 잘게 떨고 있는 아스테리아의 옆에서 그녀의 안일함을 탓하던 아스릴은 뜨거운 눈길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눈길이 향하고 있는 사람은 아스릴이었다.

역시, 기억을 하고 있었구나.

아스릴의 머릿속으로는 그 생각만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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