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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15화 (15/106)

15화

신전에서 아스릴의 움직임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아스테리아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혹은 그보다 먼저 이렐린의 노래 구절을 알려 줄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며 아스릴은 손에 든 작은 가방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스릴이 앉아 있는 대기실 같은 방은 아주 아름다운 가구들이 놓인 포근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겨울의 공간에서 온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듯 안에는 따뜻한 러그가 깔려 있고 따뜻한 불빛을 내는 초가 여기저기 불을 밝히고 있었다.

심지어 여기 앉아서도 주변을 유심히 돌아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았다.

“외관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오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이대로 여기에 계십니까?”

그들을 안내하러 들어왔다가 웬일인지 바로 나가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고 있던 신관 하나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던 아스릴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백금발에 깊은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보오얀 피부에 돋보이는 분홍빛 입술이 그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살짝 벌어지는 그 찰나. 신관은 잠깐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아직 생각해 보고 있어요. 나갔다가 다시 못 돌아올 것 같기도 하고요.”

“아, 여기를 나가서 왼쪽으로 보이는 복도를 쭉 따라가시면 원형 정원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가 아주 아름답거든요. 그, 길만 쭉 따라가면 되니 헤매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신관을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스릴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아, 네, 저…… 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괜히 민망해진 그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고 닫힌 문을 바라보며 아스릴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원형 정원…… 있는지도 몰랐네. 가까운 모양인데.”

생각해 보면 아무도 그녀의 움직임에 제한을 준 적이 없었다. 괜히 스스로 아스테리아를 두고 돌아다니기에 찔리기도 하고, 넓고 웅장한 신전의 존재에 짓눌린 채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아마 어렸을 때 신전을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으면 데모트 백작 부부가 찾지도 않고 자신을 이곳에 놓고 갈 것만 같은 불안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도 있는지 없는지 신경 쓰지 않는 분들이었으니까, 아스테리아의 꽃 보조를 해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일부러 어디 깊숙한 곳에 두고 갔을지도 모를 분들이니까.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들이 두고 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컸던 만큼 제 마음대로 이 신전을 누비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신전마저도 매우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전에는 그저 그녀를 눌러 버릴 듯이 위압적인 공간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기둥에 새겨진 선이라든지, 기둥과 천장이 이어지는 곡선들이 모두 아름답게 보였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말소리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까 그 신관이 나가면서 방문을 살짝 열어 두고 간 모양이었다. 틈을 뚫고 바깥의 소란이 조금 스며들고 있었다.

아스테리아는 신전에 있는 이렐린의 꽃을 위한 사제복을 입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할 것이다. 아스릴은 아스테리아의 특별 부탁으로 항상 그녀의 지척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리하여 신관이 오늘 읊을 이렐린의 노래 구절을 알려 주면 아스릴은 그것을 재빨리 써서 아스테리아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아스릴이 챙기고 있는 손가방에는 필사를 위한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저, 낭송 구절을 알려 주실 신관께서는 언제 오시죠?”

아스릴은 아스테리아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복도를 지키고 있던 신관에게 물었다. 그는 갑자기 안에서 나온 그녀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랐다가 다시 눈을 비비고 그녀를 보았다.

성스러운 이렐린의 꽃은 아니었지만 그 못지않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 신관께선 적어도 한 시간 뒤에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횡재를 했다. 적어도 한 시간이라니, 오늘은 신의 뜻을 읽기가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아스릴은 손가방에서 작은 종이와 잉크, 펜을 꺼내어 빠르게 글씨를 썼다. 낭송 구절을 알려 줄 신관이 한 시간 뒤에 온다고 하니, 그 전까지 돌아오겠다는 말이었다.

제 필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아스테리아이기 때문에 딱히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다.

설레는 기분으로 그 방을 나온 아스릴은 어디를 가는지 묻고 싶은 기색이 얼굴에 다분한 신관을 놔두고 왼쪽 복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길에 예전의 자신을 못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아스릴도 다 듣고 있었다. 사람은 이래서 겉모습이 참 중요한 모양이었다. 부스스하고 깡마른 몸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다니는 그녀를 보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말이다.

신전이 주는 위압감을 벗어 두고 났더니 아주 아름다운 신들의 영역으로 산책을 나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유히 걸어가는 발끝에 닿는 대리석의 감각이 마냥 딱딱하지만은 않은 것도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걸 보니, 저도 이런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긴 한 모양이었다.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것을 보며 좋아하는 백작 부인과 아스테리아를 보면서 가끔 이상하다 생각하기도 했는데.

뽀얀 신전 건물의 사이사이 커다란 창문으로는 새파란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곳들은 다 완전히 겨울에 접어들었는데, 이곳은 이렇게 새파란 잎들이 바람에 부딪혀 차르르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신전의 주변은 마치 어떤 결계가 쳐져 있는 듯이 항상 초여름의 날씨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문까지는 분명히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정문보다 더 정문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후문으로 가면 커다란 석조 계단 끝에 잔디밭이 펼쳐지고, 신전 주위로 그녀가 보고 있는 나무들이 이파리를 가득 매단 채 푸르름을 뿜어냈다.

“이 아름다운 걸 못 보다니…… 이번이나 혹은 다음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오늘 잘 봐 둬야겠다.”

이제 곧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나면, 이렐린의 꽃이 문제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땐 나도 그녀를 따라 이곳에 올 수 없을 테니까.

아스릴은 천천히 복도를 거닐며 창밖에서 푸른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는 태양을 바라보기도 하고, 간혹 문이 열려 있는 방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훔쳐보기도 하면서 걸어갔다.

여차하면 뒤돌아 곧장 되돌아갈 수 있도록 복잡한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 신경 쓰면서.

그렇게 눈앞에 나 있는 길만 따라 쭈우욱 움직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눈부신 빛이 들이치는 통로가 보였다. 문으로 막은 것이 아닌 걸로 보아 아마 저 끝은 실내가 아닐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설레어서 아스릴은 종종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통로 끝에 다다라 쏟아지는 빛에 몸을 녹인다는 기분으로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대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와……! 정말 아름다워!”

그곳은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한가운데에는 물을 뿜는 분수가 있고, 그 주변으로 창밖에 계속 아른거리던 푸른 이파리의 나무들과 이렐린을 상징하는 연분홍의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휑하다 느낄 만큼 크지는 않고, 그렇다고 작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적당한 크기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건물 한가운데를 뚫듯이 만들어 놓은 정원인 모양이었다.

위층에서는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1층의 입구는 아스릴이 서 있는 길목과 저 반대편의 통로가 전부인 모양이었다. 사람이 서 있다면 표정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거리일까.

기왕 이렇게 나온 김에 정원 안으로 가까이 들어가 볼까 망설이고 있던 아스릴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을 때였다.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등줄기에 흐르는 싸한 느낌에 아스릴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던 건너편 통로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나와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는 남자.

건너편에 사람이 서 있으면 표정 정도는 보일 거리겠다 생지레짐작한 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버렸다.

“레, 레나드…….”

그의 이름을 불러 버렸다. 정확하게 이쪽을 보고 있던 그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턱이 경직되어 꿈틀거렸다.

그것이 이토록 잘 보인다는 건…… 반대편의 그를 발견하자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색이 된 그녀의 얼굴을 그도 눈치챘다는 것.

정말…… 어떻게 이런 일이.

입을 살짝 벌린 채 넋을 잃고 있던 아스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아스릴은 뒤돌아 뛰었다. 아니, 뛰려 했다.

아무리 얼굴이 보이는 거리라고 하더라도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 문이 열린 아무 방에나 들어가 버린다면, 금방 자신을 포기하고 가 버리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이었을 뿐이다. 돌아서는 그녀의 손목은 속절없이 커다란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돌리지 마. 그대로 가 버려!

아스릴은 붙잡힌 손을 당겨 그를 외면하고 돌아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선 채 고개도 푹 숙여 버렸다.

신전이니까 그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사람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마주칠 확률이 도대체 얼마나 되길래 이렇게 마주치느냐는 말이다!

아스릴은 입술을 악물었다. 이 사람과 엮여서 제게 좋을 것이 없었다.

아픈 사랑은 그때 한 번이면 족해. 심지어…… 저 사람이 날 사랑했는지조차 난 모른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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