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내가 도서관엘 왜 가? 너 내일모레 신전 행사 있으니까 준비 잘해. 넌 내 그림자니까. 알겠니? 정말, 내가 이번에도 이렐린의 꽃이 안 됐으면 어쩔 뻔했어? 쯧쯧. 네가 그렇게 열심히 외운 이렐린의 노래 어디 가서 뽐내 보기라도 하겠니?’
내려가는 길에 마주친 아스테리아가 오늘도 뻣뻣하게 목에 핏대를 세웠다. 요즘은 굳이 저를 불러 부딪치려 하지 않았지만 만나기만 하면 목청을 높여 시끄러웠다.
“내가 변하니까 불안했던 모양이지.”
그래 봐야 가지고 있을 건 다 가지고 있으면서.
조금만 지나면…… 세상도 가질 거면서.
아스릴은 아무리 애써도 떨쳐지지 않는 것 때문에 문득문득 괴로웠다.
두 번째 삶만은 확실하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또 크게 자리를 잡아 버렸다.
하여간 레나드는 어쩌자고 제게 입술부터 들이밀어선…….
괜히 뚱한 생각에 입술이 또 삐죽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정말…… 안 다치고 안 아픈 건 다행이지만.”
말에 부딪혀 넘어지면서 아팠던 것들도 이제는 다 나았다. 자신이 아팠던 것보다는 그가 중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스릴은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순히 그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독에 당했다는 것은 황태자에게 그만큼 위협적인 적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번 생에는 그 적이 없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비할 만큼 황태자에게 힘이 생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스릴은 비록 대외 활동이랄 것 없이 백작저 안에서만 살았지만, 그 부족한 부분을 도서관에서 모두 채웠다.
데모트 백작저의 모두가 그녀가 이렐린의 노래를 외우는 데에 온 시간을 쏟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을 외우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스릴은 암기를 마치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을 섭렵해 나갔다. 물론 그것으로 세상 물정을 다 배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바보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아스테리아가 꽃인 주제에 책 읽기가 싫어 <이렐린의 노래> 책을 보기도 싫어했던 것, 대신 아스릴의 암기력이 좋아 노래를 외우게 된 것, 그리고 그 책을 본 덕분에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제가 지식을 찾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점까지…….
어떻게 보면 신이 그녀를 끝까지 버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상황에 놓이게 된 그녀에게 그나마 살길을 열어 준 것 같은 느낌이랄까.
“두 번째 삶까지 살게 해 줬으면…… 아예 그냥 새롭게 살게 해 주시지. 다 내 뜻대로 될 수 있도록 해 주시지…….”
그녀의 생각은 레나드에서 멈춰 버리고 말았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편안하게 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촉촉함을 알면 뭐 하는가, 다신 가질 수 없는 것인데. 이럴 바에는 그냥 촉촉함 따위 모르고 건조한 삶만을 일관되게 사는 것이 훨씬 덜 괴로울 것 같았다.
“이 생각만 대체 몇 번째야.”
아스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뭔가 분위기가 묘해진다 싶었을 때 도망쳐 나왔어야 했다. 제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두막을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뒤로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안들 뭘 어쩌겠는가. 이전에도 황태자비가 정해질 때까지 자신과 오두막에서 만나 왔던 남자였다. 뭔가 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올 리 없는 사람이었다.
“와…… 이제 보니 그냥 결혼하기 전에 놀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네.”
아스릴은 소설이 꽂힌 서가를 짚다가 벼락처럼 깨달았다. 굉장히 통속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소설책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안에 여자 주인공이 그런 남자를 만나서 마음고생을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게 제 얘기가 될 줄은 몰랐지만.
참 세상엔 별일이 다 있다.
“그중 제일은 내가 겪고 있는 것 같지만.”
새삼스럽게 시간을 거스른 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그 남자로 인해서 흔들리는 것은 그만하도록 하자. 분명 이렇게 돌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제국을 위해서 큰일을 할 것은 아니겠지. 제 인생을 바꾸는 게 큰일 아니겠나.
그 남자를 만났던 건, 그냥 신의 변덕이라고 생각하자. 앞으로도 사랑 한번 못 해 볼 저를 위해 어디 한번 경험이나 해 봐라 하고…… 남겨 준 해프닝일 뿐이다.
아, 그 남자가 아니라 레나드 황태자 전하.
그렇게 편하게 부르는 것조차 가까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인 것 같아서 싫었다.
소설 파트를 지나친 아스릴은 농작물 기르는 방법이 나와 있는 책을 찾았다. 이런 게 독립해서 사는 데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나가는 것보단 도움이 되겠지 싶어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직 그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
집을 나가는 것은 쉬울 것이다. 이렐린의 꽃만 아니면 이 집에서 저는 필요가 없는 존재이니까. 아스테리아가 황태자비가 되고 나면 제가 사라진다고 해서 눈에 불을 켜고 찾지도 않을 테니, 그냥 몇 안 되는 짐 싸서 나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 뒤부터는 계획도 세우기 어려울 만큼 아는 게 없었지만.
이런 꿈을 꾸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의욕이 생기는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도서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서관에 이렇게 들어오는 이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아도 도서관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살금살금 딛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음? 이건 뭐지?
그때 갑자기 도서관 안으로 확 진한 향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이건 아스테리아에게서 자주 나던 아주 진한 향인데.
궁금해져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자 서가 너머로 씨씨가 등장했다. 예상했던 등장인데 향이 아주 진동하고 있었다.
“언니 목욕 중이야?”
아스릴이 대뜸 던진 질문에 조심스럽게 걸어오던 씨씨가 번쩍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아셨……. 아, 향유가 향이 진하죠?”
씨씨는 뭔가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들어오다가 어떻게 아셨냐 물어보려던 것이 멋쩍었는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모레 신전 행사 때문에 그렇구나. 오늘내일 욕조 청소를 하느라 고생하겠어요.”
본래도 목욕을 좋아하는 아스테리아지만 향유를 사용하고 나면 청소하기가 더 힘들다고 들었던 것 같아 씨씨를 향해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닙니다, 고생은요. 항상 하던 일이지요. 그보다…….”
씨씨는 아스릴의 미소에 화답을 해 주고 나서야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하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런데 평소 씨씨와 다르게 살짝 서두를 길게 늘였다.
책의 다음 장을 넘기려던 아스릴은 중간에 말을 끊은 씨씨가 이상해 고개를 들었다.
“음? 무슨 일 있어요?”
아스릴이 아닌 자신이 들고 온 커다란 꾸러미를 바라보고 있던 씨씨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이, 들고 온 꾸러미를 아스릴에게 내밀었다.
소파에 앉은 아스릴은 들고 있던 책을 옆에 내려놓았다. 받으라고 내미는 것인데, 받아도 되는 것일까. 고개를 다시 들어 씨씨를 바라보자, 씨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꾸러미를 내밀었다.
아스릴은 대충 꾸러미의 내용물이 무엇일지 짐작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이상했다.
씨씨의 손에서 꾸러미를 건네받아 곧장 풀어 보았다. 잘 개어져 있는 하얀 드레스가 나왔다.
“음, 드레스네. 새로 또 뭘 버렸나 보지?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아스테리아가 새로 드레스를 장만하거나 아니면 안 입는 드레스를 발견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것이 생기는데, 그중에서도 입을 만한 것은 씨씨가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것들을 재정비해서 입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스릴의 몫이었다.
지금은 드레스를 펼쳐 볼 생각이 없어 옆으로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드레스를 전달해 주고 갈 줄 알았던 씨씨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씨씨? 할 말이 있는 거예요?”
아스릴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 표정은 뭘까? 설마 씨씨가 쑥스러워하고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바쁘시지 않다면 그 드레스, 지금 한번 보시겠어요?”
씨씨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스릴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드레스를 펼쳐 들었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았다. 아스릴은 그대로 일어나 드레스를 들여다보았다.
어디 상한 데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사용감이 전혀 없는 빳빳한 하얀색 천이 눈에 들어왔다.
“어……?”
아무리 아스테리아가 한 번만 입고 버리는 드레스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나 새하얀 드레스를 깨끗하고 깔끔하게 입었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펼쳐 보니 디자인 또한 아스테리아의 취향이 아니었다.
화려한 보석 같은 것도 없었고 레이스가 치렁치렁하다거나 교묘하게 속살을 드러내는 야한 디자인도 아니었다.
“씨씨, 이거 이상해. 아스테리아 언니 드레스가 아닌 거 같은데……?”
설마. 머릿속에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지만 아스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씨씨가 어떻게, 왜…….
하지만 긴장으로 입술을 축이는 씨씨의 행동을 보노라니 아스릴은 벌써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아스테리아 아가씨의 드레스가 맞습니다. 한 번도 입지 않은 드레스고요. 레이스를 떼어 내고 노출된 부분을 막아서 만들어 봤습니다.”
항상 어설픈 솜씨로 해 입던 드레스였다. 한 번도 입지 않은 것이더라도 노출 부분을 막는 과정에서 분명 어설픈 부분이 생기곤 했다.
하지만 씨씨의 손을 거친 것은 완벽하게 새 드레스 같았다.
심지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