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목욕을 하고 벽난로가 덥혀 준 방으로 돌아오고서도 아스릴은 그 밤을 꼬박 새웠다. 그 오두막에 남은 레나드는 어떻게 돌아갔을까, 제가 한 행동 때문에 괜히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닐까.
제깟 것 때문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궁 밖에서 일어났던 아주 작은 해프닝이라고 여기고 잊어 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랐다.
제가 그에게 그만큼이나 뭐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도 더 초라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때에도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에 응해 입을 맞추었다.
따지고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의 자신에게서 뭘 보고…… 황태자는 입을 맞추었을까.
그리고 그게 한순간의 충동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함께 꿈을 이야기했고, 미래를 꿈꾸었다.
사랑한다 말하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며 답을 되돌려 주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안에서도 그를 향한 마음이 단단해지기만 했다.
“내 어딜…… 보고?”
살 좀 찌우고 머리카락도 관리하면 예뻐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것일까.
제 머릿속에서는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 보아도 답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스릴은 우선 지난날의 오두막은 기억에서 아예 지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째 삶을 살아가려면 그는 제 인생에 없었어야 했다.
그 밤은 유달리 새까맣고 별도 별로 없는 듯했다. 그게 자신의 마음이라 별을 어둠으로 가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두우니 밤하늘의 별도 눈에 남지 않았나 보다.
새벽을 맞이하는 4층은 사람들의 소리도 없이 그저 고요하게 하루를 열었다. 별빛도 사라진 고요한 새벽의 어둠을 지나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도. 그녀는 혼자 그 밤을 지새우며 홀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날이 완전히 밝아 오자 아스릴은 제일 먼저 씨씨를 찾았다. 아침이 되어 씨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가씨,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수시로 올라왔는데 너무 안 들어오셔서 큰일이 나신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부름을 받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온 씨씨는 걱정의 말부터 쏟아 내었다.
몰래 들어올 생각만 하고 있었지, 그녀가 이렇게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씨씨는 우선 달려들어 실례합니다, 하는 나직한 목소리를 흘린 뒤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훑어보고 아픈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조심스러운 그 손길에 오히려 더 부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저, 나 정말 괜찮아요.”
씨씨는 예전부터 자신을 귀족 영애처럼 제대로 깍듯하게 대해 주었다. 그래서 아스릴은 자연스럽게 씨씨에게 존대를 하게 되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말씀하세요, 아가씨.”
씨씨는 다부진 턱에 힘을 주며 온갖 떨림에 대비했다.
“아스테리아 언니가…… 흑마를 탄 남자와 마주쳤었나요?”
오해의 소지조차 없도록 질문을 딱 부러지게 던졌다. 차라리 황태자를 만났냐 묻고 싶었지만, 그가 정체를 제대로 밝혔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스릴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묻는 질문의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 씨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보셨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분이셨죠. 행색이 딱히 좋지 않았던 데다가…… 상황도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아스릴의 두 눈이 반짝이는 바람에 씨씨는 잠깐 동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스릴은 손짓으로 계속 이야기할 것을 주문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던 것이었다.
만난 거 자체가 아니라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기 위함임을 눈치챈 씨씨는 그날의 이야기를 모두 아스릴에게 들려주었다.
“그래, 그랬군. 언니는 그 사람을 쫓아냈다?”
“네.”
그때와 마찬가지네……. 아스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를 내려왔다.
“나는 도서관에 가 있을게요.”
씨씨를 물리고 아스릴이 택한 곳은 역시나 도서관이었다. 터덜터덜, 힘없는 몸을 움직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스릴은 도서관에 들어서면서 새삼 다짐했다.
언제고 다시 흔들릴지 모르는 마음이니, 그때그때 다잡아야 했다.
“조용히 저택에서 몸 사리고 있다가, 여길 나가는 거야.”
데모트가 안에서 그녀의 삶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허세를 부려 가며 고용인들을 제압해서 제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지만, 제가 먹고 쓰는 모든 것이 데모트가의 재산이었다.
무언가 빚을 지는 이 느낌이 너무 싫었다. 진짜 이 집안사람으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면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그냥 이 집에 얹혀사는 사람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의 걸 가져다 쓰는 느낌이 너무 컸다.
고용인들은 데모트에 그만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것이니까. 하지만 데모트를 위해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이렐린의 꽃 낭송을 돕기 위해 열심히 이렐린의 노래를 외워 준 것만으로도 그동안 먹고 입었던 것들에 대한 보상은 되지 않을까.
“좋아. 내가 여길 나가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야겠어.”
아스릴은 도서관 입구에 서서 안을 느리게 휘둘러보았다. 이 좁은 세상에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넓은 세상에 나가도 제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을 방법을 이 안에서 찾아내야 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도서관이 애틋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스릴은 제국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찾는 정보가 어느 책에 있다는 안내도 없었던지라 처음에는 무턱대고 시작하는 셈이 되겠지만,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간절함은 있었다.
팔락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도서관 안에 가득 찼다.
* * *
“아스릴 아가씨 못 봤어?”
씨씨는 3층의 청소를 하고 나오는 하녀 하나를 붙들고 질문했다. 하녀는 별걸 다 물어본다는 얼굴을 하고 씨씨를 올려다보았다.
“아니요? 못 봤어요. 뭐 또 4층 방, 아니면 도서관에 있겠죠.”
하녀는 마치 동료 하녀에 관해 대답하듯이 말했다. 그 태도가 영 거슬렸던 씨씨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가씨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도록 해.”
씨씨의 서늘한 지적에 하녀는 대번에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분은 그냥 데모트가의 일원이 아닌 거 아니에요? 백작님이랑 마님도 그렇고…… 아스테리아 아가씨가 그렇게 생각하시니까 집사장님도 그러시고…….”
하녀가 생각 없이 던지는 말에 씨씨는 미간을 모았다. 그 엄한 얼굴에 주눅이 들면서도 하녀는 조용히 입을 삐죽거렸다.
“윗분들이 어떻게 대하시든 아스릴 아가씨도 데모트의 성을 가진 분이야. 그분들이 어떻게 대하시든, 그분은 귀족이지 하인이 아니라고. 무슨 차이인지 알겠니?”
씨씨는 훈계를 하면서도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렇게 말로 훈계해 봐야 나아지는 것은 없을 터였다. 스스로가 느껴야 태도가 바뀔 텐데.
“그래도 요즘 아가씨 뭔가 바뀌신 거 같더라고요. 아가씨 무슨 일 있었어요?”
말투도 쉽게 변하지는 않았다. 마치 2층 담당 하녀의 근황을 묻듯이 말하는 하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씨씨는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도 물론 아가씨에게 깍듯하게 하는 게 맞지만, 네 말대로 아가씨께서 어딘가 좀 달라졌다는 건 나도 느끼고 있었다.”
“뭐, 주인님들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것 같지만요.”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씨씨는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느낌만으로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아무튼 못 뵌 거지?”
“예. 못 뵈었습니다.”
“그래, 가 보렴.”
하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계단을 뽀르르 내려갔다.
씨씨는 도서관 문을 바라보았다.
저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본 것이 벌써 네다섯 시간이 흘렀다. 두문불출하며 책을 읽는 경우는 있었지만, 중간중간 나와서 방에 올라간다거나 하는 게 패턴이었다.
너무 오래 계시는 것 같은데.
씨씨는 결국 도서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곳은 현재 데모트가 일원 네 명 중 유일하게 아스릴만이 좋아하는 곳이었다. 천운으로 그런 공간이 존재한 덕에 그녀에게 일이 하나 주어졌고, 그 덕분에 현재까지 데모트가에서 살고 있었다.
일반적인 것들을 보장해 주지는 않아도 씨씨가 챙겨 주는 것까지 제재를 하지는 않았다.
이런 것을 두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비참할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 가장 안쪽의 테이블에 책을 쌓아 놓고 보고 있는 아스릴이 있었다. 다가간 씨씨는 가만히 쉬던 숨조차 고요하게 삼켰다.
높이 쌓은 책 너머에서 펼친 책 위로 엎드린 아스릴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 삭막한 방에서 잠을 얼마나 자겠나 싶었다. 혹은 낮엔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밤에는 그걸 가지고 올라가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씨씨는 주변을 둘러보다 작은 무릎담요를 발견했다. 담요를 가녀린 아스릴의 어깨에 둘러 주며 톡톡,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최근에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아서 기대 중이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생긴 것 같아서. 씨씨는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꼭 도와주리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