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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10화 (10/106)

10화

이제 여기에 자기를 두고 가라고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일까. 사는 곳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저를 여기에 두고 가면 몸이 나을 때 알아서 돌아가겠다고 말이다.

조금이라도 길게 이 남자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있었다.

계속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대화를 더 이어 가지 않기 위해 사과하는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바쁘니까 가겠다고 말해요. 정중하게 사과하는데 어찌 이렇게도 예의 없이 말 한마디 없느냐 따져요…….

차라리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고 지금 이 자리를 떠났으면 싶었다. 말을 날뛰게 만드는 이상한 숲에서 만난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마음이 조급해진 아스릴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가까이, 앗!”

조잘조잘 다급하게 말을 하면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려 할 때였다. 일어서려는데 허벅지 쪽에서 강한 통증이 일었다. 허벅지가 찌릿하더니 힘이 탁 풀려 버린 것이다.

속절없이 쓰러져 내리는 그녀의 몸을 남자가 단단한 팔로 받쳐 주었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뜨거운 호흡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잠시 실례를 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아스릴을 침대 위에 눕히더니 팔부터 조심스럽게 주무르듯이 만지며 내려갔다. 틈 없이 그렇게 살피면서 어디 아픈 곳은 더 없는지,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인지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의학 서적에서 본 듯한 기억이 났다.

“나는…… 레나드 아그로드라 합니다.”

제 몸에 강하게 닿는 손의 압박감에 온 정신이 팔려 있던 아스릴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강한 충격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피할 수 없는 신분의 보증, 성까지 붙여서 말이다.

아스릴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부디 떨리는 눈동자가 그저 그의 신분을 듣고 놀란 한 귀족 영애처럼 보였기를…….

“화,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스릴은 이번에도 자신의 이름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까먹고 말았다. 이전에 놀라서 놓쳤듯이. 이번에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내가 그대의 몸을 이렇게나 만지고 있는 것에 대해 혹여 불안하게 여길 듯하여 밝히는 것이다. 다른 의도는 없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팔을 거쳐 이번에는 다리를 잡았다. 괜찮다고 말하고 움직여 보려고 해도 힘 있는 커다란 손이 그녀의 움직임을 모두 하찮게 만들어 버렸다.

그의 손은 발목과 종아리를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아무리 의료 목적이 강한 움직임이라고는 하지만, 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밀접한 스킨십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그만!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아픈 곳은…… 아까 그 허벅지가 전부입니다. 조심히 움직이면 걸을 수 있습니다.”

아스릴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점점 올라오는 손은 순수한 의도일지 모르지만, 받아들이는 쪽이 절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가 불편해한다 여겼을 것이다. 순순히 손을 물린 그는 다시 아까 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 여기서 얌전히 걸어 나가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다행히 데모트 백작 내외는 아직도 그녀에게 관심조차 없었고, 아스테리아가 그녀를 괴롭히는 시각은 오후쯤이니 지금 가면 아무 걱정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낼 타이밍만 보고 있던 아스릴은 또 뒤통수를 맞았다.

겨우 넘어간 줄 알았던 이름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자 아스릴은 티 나지 않게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지난번에도 이러지 않았던가? 그때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대꾸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을 그가 다시 한번 짚어 줬었을 텐데.

이번에는 제가 의도적으로 넘기려고 했던 부분이었는데 그는 정확하게 다시 돌아와 버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 침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오두막을 아주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아스릴…… 아스릴 데모트라 합니다.”

“아스릴……. 데모트라 하면 데모트 백작가의 영애였군.”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한테 이름을 소개하는 진귀하고 소중한 경험을 결국 가져간 것은 또 황태자 레나드였다.

그가 이번에야말로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또 저와 눈을 맞추고, 예고도 없이 가까이 다가와 입술까지 맞춰 버릴 것 같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지금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한 귀족 영애를 위험에 빠뜨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어서 이야기한 거였으니까.”

그는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를 내어 잔뜩 굳어 있는 아스릴을 달래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이미 좋지 않은 신호였다.

“괜찮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어쭙잖은 변명들을 늘어놓으면서 그의 머릿속에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냥 오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사소한 사고로 기억되기를 바랐는데…….

아스릴은 말을 하다가 뚝 끊어 버렸다. 그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말을 마치고는 그 신비롭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아스릴에게 고정한 채였다.

예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다.

어두운 오두막 안에서도 어쩔 수 없이 빛나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어떤 영애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자신처럼 지그시 황태자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범상치 않은 결과로 흘러갔고, 오늘 또한 그 상황을 답습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지금 비록 처지가 바뀌었지만.

아스릴은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로 눈을 돌리는 순간, 결국 그에게 홀리듯이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가 얼굴을 천천히 얼굴을 내려 가까이 다가왔다.

이건…… 알고 있었다. 이 움직임이 무엇인지, 이다음에 어떻게 될지.

복잡해진 머릿속이 어느새 마비될 때까지 그의 손은 한없이 가까워지기만 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움직임일지도 모르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이날의 이 움직임이.

그는 손을 올려 아스릴의 볼을 덮었다. 섬세한 움직임은 아닐지언정 이렇게 밀접하게 피부가 맞닿는 느낌은 다시 살아나고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오롯이 그때의 레나드와 지금의 레나드만이 알려 준 감각인 것이다.

이 이후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마음을 나누고 입술도 함께 나누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감각에 아스릴의 눈가로 또르르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건조하기만 하던 아스릴의 생애 가장 촉촉했던 순간까지 완벽하게 재현되고 말았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볼을 감싸는 순간, 아스릴은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느끼고 좌절해 버렸다.

“……왜 울고 있는가?”

조심스럽게 묻는 그의 목소리마저 촉촉하게 젖어 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스릴은 그의 질문에 입술을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볼에 손 한번 닿았을 뿐인데, 순간적으로나마 그와 나누었던 모든 감각을 떠올려 버린 스스로를 때려 버리고 싶었다.

말을 해야 해. 대답을 해야 해. 나와 이러면 안 된다고 해야 해.

하다못해 어떻게 황태자씩이나 되시는 분이……라고라도 말을 해야 했다! 결코 그 뜻을 물어선 안 된다. 다음에 이 오두막에서 만나자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해야 했다.

하지만 아스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당황한 레나드가 아스릴의 반응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그때, 아스릴은 통증도 참아 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와 엮이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냅다 달렸다. 등이 쑤시고 허벅지가 아파 수시로 힘이 탁 풀려 버릴 뻔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길이 편하지 않을지언정 혼자였고, 심지어 빌어먹게 무거운 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 상태 때문에 발을 딛고 나아가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신체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말썽이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어졌고, 자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아스릴은 이를 정말 악물고 달렸다. 그가 품어 주었던 입술의 말랑거림과 입 안을 헤치던 혀의 뜨거움은 정신없이 달리면서 이로 깨물고 호흡하느라 찬 바람에 말라 버린 입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데모트 백작저에 도착한 아스릴은 이미 알아봐 놓은 뒷문을 열고 들어가 고요히 4층으로 올라갔다.

도착하자마자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욕실의 물을 틀어 뜨끈한 물에 몸을 담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뭐든지 다 씻어 내 버리고 싶었다.

물론 지금 아파 놀란 근육들을 풀어 줄 생각이기도 했지만…… 이 물에 제게 닿았던 시선도 손길도 모두 녹여 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콸콸 쏟아져 나와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은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몸을 확실히 녹여 주었다. 추위에 굳었던 것도, 바닥에 나동그라져 놀라 굳어 버리고 터져 버린 몸의 근육들도.

지그시 두 눈을 감는 아스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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