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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9화 (9/106)

9화

결심한 자신을 막는 씨씨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결국 아스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

먼저 가 주면 더 좋겠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릴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경계 또한 역시 기억 속 그대로였다. 위험한 느낌 하나 없이 매우 고요했다.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스쳐 청량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부옇게 빛나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은근히 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들이는 사람이 꽤 될까.

어떻게 보면 아스릴도 들어와선 안 되는 게 맞았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 때문에 결국은 위험한 감정을 알아 버렸으니까.

그때처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깊이 들어가자 경계 안으로 쏙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 이상하면서도 묘하게 포근한 느낌이 들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저편에서 사람이 등장할 것이었다. 비척거리는 발걸음에 창백한 얼굴.

아스릴은 손끝이 저리고 차가워지는 느낌에 두 손을 꼭 맞잡았다.

타이밍은 잘 모르겠다. 조금 일찍 들어온 것도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척에서 들리는 휘청이는 발소리가 아니었다. 좀 더 멀리서 들리지만…… 그래서 발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워워! 워!”

그것은 미친 듯이 달리는 말발굽 소리였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아스릴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게 지금 무슨……!

분명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의 하루였다. 아스릴이 직접 그때와 다른 행동과 말을 할 때에나 조금씩의 변화가 생겼을 뿐이었는데.

독에 중독되어 걸어 나오는 황태자 대신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고삐가 풀려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커다란 흑마였다.

아스릴은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서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대한 놀라움과 돌진해 오는 흑마의 위협적인 모습에 아스릴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워! 멈춰!”

흑마 위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도망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도저히 몸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가 욕심나서 왔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는 걸까.

경계란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곳인가.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공포가 극에 달한 아스릴의 머릿속은 아무 생각이나 마구 뱉어 대고 있었다.

“거기! 위험합니다!”

말 위에서 남자가 그녀를 향해 경고를 날리고 있는데도 아스릴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청난 힘으로 땅을 짓치는 흑마의 앞발이 코앞까지 들이닥치자 아스릴은 그제야 머리를 팔로 감싸며 고개를 수그렸다.

퍽!

“꺄악!”

땅으로 내리찍힐 거라고, 앞발에 완전히 짓밟힐 거라 생각하고 있던 찰나 뭔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면서 아스릴의 팔을 쳤다.

누군가 엄청난 힘으로 그녀를 밀쳐 버리자 가냘픈 아스릴은 외마디 비명만을 남긴 채로 저 멀리 날아가 나뒹굴고 말았다.

“괜찮습니까!”

그녀를 부르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아스릴은 팔로 머리를 감싼 그 자세 그대로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졌다.

* * *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면서 장작 소리를 듣는 것. 아스릴은 정신이 들어서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벌써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원하는 어떤 순간에 방향을 틀어 버릴 작정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그것이 무너졌고, 그렇게 아예 새로운 삶이 열리나 했더니 또다시 그날의 연장선상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내가 피하려고 해서 피해지는 일이 아니라는 뜻인 걸까…….

아니, 그렇다면 왜 그분은 중독된 모습이 아니라 말을 탄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걸까.

아니, 애초에…… 말을 타고 있던 분은 황태자이실까?

아스릴은 정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보이는 게 그때 보았던 모닥불 그대로일까 봐, 오른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질까 봐.

그때 말의 앞발에 맞아 기절한 저를 이렇게 데리고 와 준 거라면, 그분은 아스테리아를 만나지 못했던 것일까.

“일어났습니까.”

불보다 따뜻한 목소리, 제 심장을 벌써 녹여 버린 목소리…….

상황이 달라진 만큼 아예 마주치는 사람까지도 달라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기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면 그런 미묘한 관계로 발전하지도 않을 테니까.

적어도 그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뺏기고 심장을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또 본인이 나와 버리면, 그것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였다.

아스릴은 꼭 감고 있던 눈을 조금씩 열었다. 일렁이는 불그스름한 불빛과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한숨이 나올 만큼 선명한 상황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지금 상황을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말에 부딪혔고 그래서 쓰러져 기절했고, 그런 저를 버리고 가지 못하는 성정의 그가 우스 호수 근처의 오두막으로 자신을 데려온 것일 터였다.

아스릴이 지금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왜 과거와 지금이 달라졌는지, 앞부분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이 상황은 또 과거와 닮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대를…… 큼, 흠, 내 말이 그대가 있는 곳을 치어서 그대가 저 멀리 내팽개쳐져 버렸다. 약한 몸에 탄탄한 근육이 부딪혀 버렸으니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내가 기절한 그대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겼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흐르듯이 이야기했다.

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스릴은 강하게 예감했다. 이 사람을 잊기로 다짐하고 떠나는 순간부터 자신은 그 마음을 평생 놓지 못하고 아파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아스릴은 두 눈을 끔뻑 내렸다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한 불빛이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가 지척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기절을 했었군요.”

목이 잠긴 탓에 목소리가 매끄럽게 나오지를 않았다. 갈라지는 소리에 입술을 앙다물었더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그가 사라진 틈을 타 눈을 돌려 보니 모닥불을 피우고 간이침대 같은 곳에 자신을 뉘어 놓은 채 그 건너편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던 듯했다.

온전히 자신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던 거라고 생각을 하고 싶은 거겠지. 아스릴, 정신 차려! 제발.

“여기, 물입니다.”

아스릴은 다시 나타난 그가 내미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나무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매우 맑아 보였다.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자 그가 커다란 팔에 그녀의 등을 받쳐 주고 입가에 바가지를 조심스럽게 대 주었다. 신중한 손길에 심장이 간질거리는 걸 애써 누르며 바가지에 입술을 대고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마셨다.

차갑고 깨끗한 물은 시원하고 달게 입 속을 적시고 지나갔다. 갑자기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하던 머릿속까지 맑게 씻어 주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혹시 몸 어디 아픈 곳은 없습니까.”

그의 말대로 아스릴은 순순히 몸 이곳저곳에 힘을 줘 보기도 하고 조금씩 움직여 보기도 했다.

“아…….”

“어디가…… 허리입니까, 등입니까?”

몸을 슬쩍 비틀어 보려는데 등에서 갑작스러운 통증이 확 밀려왔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낸 아스릴이 당황하는 사이 그는 너무나도 민첩하게 아스릴의 등 밑으로 쑤욱 손을 집어넣었다.

“아니, 그…… 아!”

“다행히 피를 보거나 한 것은 아니군요……. 타박상을 입은 모양입니다.”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짚어 보던 그는 그녀의 몸을 다시 천천히 침대 위로 눕혀 주었다. 조금 더 깊이 눌러 보고 체크해야 어느 정도로 부딪힌 것인지 알 수 있겠지만, 그는 마른기침을 하며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다리를 마저 움직여 본 아스릴은 등과 같이 멍이 든 듯이 아픈 곳 빼고는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만다행이었다.

“말이 숲에 들어섬과 동시에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날뛰는 바람에…… 이렇게 됐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고삐를 완전히 틀어쥔 덕에 말이 방향을 바꿔 주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아, 변명을 하려던 건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그는 정중하게도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아스릴로서는 황공하기 그지없는 사과였다.

“아, 아닙니다. 제가 피했어야 했는데…… 발이 움직여지질 않아서…….”

뭔가 말을 꺼내야 하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지만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한 흑마가 날뛰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움직이기 힘들겠지요. 이해합니다. 놀라게 해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만나는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는 그였다. 전에는 귀족 같지도 않은 옷을 입은 행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친절한 사람이었으니까.

아스릴은 지금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다시 떠올려 보았다.

씨씨에게 말해서 아스테리아가 버린다고 했던 드레스들을 받아 왔다. 그녀는 너무 화려한 것을 좋아했기에 장식들을 제거하면 그럴듯하면서도 그녀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새 드레스가 되고는 했다.

오늘도 그중 하나를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자주 빗어서 윤기가 흘렀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에게 어떻게든 기억을 남길 거라면, 이전의 모습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좋았다.

그거 하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스릴은 시큰해지려는 두 눈을 꾸욱 내리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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