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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7화 (7/106)

7화

“황태자 전하, 황후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에 집무실에 앉아 국정에 관련된 보고서들을 읽고 있던 레나드는 고개를 들었다.

시종장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황후가 왔는데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추궁하는 것 같았다.

그 중압적인 눈빛에도 장년의 시종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서 하실 말이야 언제나 똑같은데 그냥 그대 선에서 자를 수는 없는 건가.”

“제가 황태자 전하와 이렇게 편한 대화를 하는 사이긴 하나, 황후께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륜이 느껴지는 이마 주름을 지어 보이는 그를 레나드는 슬쩍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겁먹고 물러날 시종장이 아니었다. 한숨을 짧게 쉰 레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난 뒤 레나드는 책상 제일 위쪽 서랍을 열었다.

사실 우스 호수의 옆 경계라고 불리는 숲으로 호위 기사인 세드룬과 함께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경계는 성력이 닿지 않는 곳이라 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하는 숲이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숨기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서랍을 연 곳에서 초록색 액체가 든 작은 병이 데굴, 굴러 나타났다.

“이렇게 아들을 보기 힘들어서야.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나요, 황태자?”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애쓰는 중년 여인의 교태로운 목소리가 집무실 입구에서부터 울렸다. 레나드는 스륵, 소리도 없이 서랍을 닫고는 웃는 얼굴로 황후를 맞이했다.

“폐하를 대신해서 하는 일이니 제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폐하만큼 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레나드는 조금 힘들다는 듯이 눈썹을 휘며 대답했다.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을 반사할 듯한 드레스를 입은 황후는 화려한 생김새에 화려한 화장, 거기에 화려한 드레스까지 입고 나타났다.

“황후 폐하께서도 폐하의 간호를 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어찌 이곳까지 찾으셨습니까.”

황제는 현재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레나드는 황태자로서 그의 업무를 임시로 맡고 있었고, 평소 황제와 금실이 좋다 알려진 황후는 황궁 북쪽의 별궁으로 모신 황제의 간병을 맡았다.

하지만 얼마나 본궁으로 오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레나드는 자신의 안부를 확인한다고 이곳까지 찾아온 그녀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황태자, 갑자기 어째서 길을 닦겠다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보다는 서쪽 왕국과의 교류를 먼저 추진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마치 아들의 일을 걱정해 주는 척, 국사에 한마디라도 더 거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레나드가 그걸 모를 리 없었으나 아직 정면 대결을 보이기보다 한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교류를 추진함에 있어서도 우선시돼야 하는 것이 바로 길을 닦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물건을 들여온다 할지라도 길이 나쁘면 물건이 상할 수도 있고 도착하는 데에 시간도 더 걸리는 법입니다.”

깔끔한 대답을 내놓는 그에게 황후, 클로이는 더 이상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럼. 이번 일이 바쁜 모양이니 황태자비 간택에 대한 것은 제가 준비하도록 하죠.”

또 예민한 문제 하나를 꺼내 드는 그녀에게 이번에는 그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부분은 황제가 직접 주도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급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폐하를 돌보셔야 할 분께 급하지도 않은 일까지 떠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도 맥없이 물러서지는 않았다. 꿍꿍이가 있는 이에게 아무런 제재 없이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떠맡기다니요. 그리고 이제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 아니겠어요?”

“폐하께서 못 일어나실 거라 장담하는 것으로 보일까 염려되는군요.”

“그, 그럴 리가요…….”

두 사람의 기 싸움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서로의 기색을 살피고 말을 던지는 사이 한 가지는 명확하게 결론이 났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서 인식했다는 사실 말이다.

“폐하의 간병에 충실하셔서 그런 오해를 받으실 겨를마저 없도록 하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레나드의 한 방에 클로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럼 황태자가 궁을 나가고 내가 폐하의 곁만 지킨다면…… 황궁은 어떻게 하죠? 비워 둘 수는 없고, 잠시 로나르드에게 맡기는 것은 어떤가요?”

결국 이 말이 나올 거라는 걸 예상한 바였다.

눈앞에 있는 클로이는 황제의 두 번째 황후였다. 레나드의 모친이 레나드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을 달리하자 황제는 그 자리를 비워 둘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지금의 황후 클로이를 앉혔다.

그리고 몇 년 만에 황자 로나르드를 낳았다.

온화하고 평온한 성정의 여자인 줄 알았던 클로이에게 이면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건 바로 그가 열여섯이었던 해다.

그것은 황제가 직접 나서서 자신을 황태자로서 임명하던 때였다. 황제의 손으로 황태자의 관을 하사받을 때 클로이의 눈을 본 것이 시작이었다.

언제나 눈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이어서 그 눈동자를 명확하게 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날 처음 클로이의 눈동자를 보았다. 초록색의 눈동자가 그토록 표독스러운 색을 띨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런 눈빛을 띤 이유는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로나르드는 현재 맡은 일에 굉장히 만족스러워하고 있더군요. 걱정 마십시오, 황후 폐하. 궁을 며칠씩이나 비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비상 상황일 땐 황후께서 임시로 궁을 보살펴 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로나르드에게는 잠시라도 넘기지 않겠다는 뜻의 대답이었다. 클로이의 미소에 순간 균열이 갔다.

우아하게 대화를 이어 가려던 클로이의 말에 잠시나마 제동이 걸렸다. 레나드는 자신이 방금 닫은 책상 서랍에 힐끗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클로이에게로 옮겼다.

“내일 일찍 나갔다가 저녁때쯤엔 돌아올 것입니다. 폐하의 병간호로도 걱정이 많으실 황후께 걱정 끼치는 일 없도록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레나드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클로이의 두 눈동자에 닿았다. 꿰뚫을 듯, 꽂힐 듯이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클로이는 겨우 눈을 접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일 일찍…… 말이군요. 부디 몸 조심히 다녀와요.”

몸 조심히, 를 강조하듯이 말한 클로이는 사뿐한 몸짓으로 뒤돌아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로나르드에 대해서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터였다.

아마 그에 대한 당혹감에 평소와 같은 반응을 하지 못한 것이리라.

“세드룬.”

그가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벽이라 생각했던 뒤쪽 모퉁이 안에서 날렵한 몸선을 가진 기사가 등장했다. 기사는 레나드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약을 건네받았다던 시녀 모르게 바꿔치기한 것이 확실한가.”

레나드는 서랍을 다시 열어 녹색의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시녀가 그것을 황후 폐하의 시녀에게서 받는 것을 확인한 후 최대한 유사한 것을 만들어 모르는 사이에 바꿔치기했습니다.”

레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독약을 받은 시녀는 레나드의 식사를 담당하는 이였다. 아마 레나드가 바깥으로 나갈 때를 눈여겨보았다가 식사에 타라고 했을 것이다.

우스 호수의 경계에 나가겠다는 계획은 은연중에 궁 내에 퍼져 있던 소문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혼자 몇 번 다녀오기도 했었다.

아마 이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레나드는 다음 날 뭔지도 모를 독에 중독된 채 경계의 숲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강한 독이라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고, 약한 독이라면 그 자리에서 맞이한 암살자들에 의해 칼을 맞거나 어디에 감금이 되었겠지.

“좋아. 그 시녀가 약을 타는 모습을 누군가 목격하도록 준비해 놓아라. 당장 입을 열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적당한 시녀 하나가 있습니다. 조치해 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레나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위협이 이번이 처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

“경계에 가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세드룬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다른 이들은 전부 수도와 그 밖의 마을들을 연결하는 길을 정비하기 위한 답사로 알고 있었으나 그는 내일 경계라 불리는 숲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에 대해 세드룬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왜 경계를 살펴봐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왜 다른 이들에게는 숨겨야 하는지 말이다.

“그냥…… 가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

“……직감, 입니까?”

고개를 기울이는 세드룬을 보던 레나드는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용히 곱씹던 레나드는 찬찬히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나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경계라 하면 성력이 약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라 하였지.”

그것은 세드룬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이던 레나드는 꺼냈던 초록색 병을 다시 넣어 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대었다.

“무언가를 꾸미기에 아주 적절한 공간이라는 뜻이야. 딱히 저주를 받는 곳도 아니니 숨어서 무언가 해야 한다면 경계만큼 좋은 은신처가 없다는 얘기지.”

“어느 쪽이든…… 말입니까?”

“그렇지, 어느 쪽이든.”

레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급작스러운 병환으로 쓰러진 지 이제 막 3개월이다. 이 자리를 노리는 황후가 되었든, 제국의 영토를 노리는 동쪽의 아도피트 왕국이 되었든 슬슬 움직임을 보일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내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바로 출발이다. 연극 무대를 준비하셨다는데, 무대에 발은 한번 딛고 나가야지.”

레나드는 입술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건 채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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