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백작 부부의 방과 아스테리아의 방 모두 2층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4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을 알아채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장작을 들고 계단을 오르던 하인 하나를 발견한 백작 부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인을 붙들었다.
“장작을 들고 어딜 올라가니?”
씨씨의 말대로 장작을 옮기고 있던 하인은 자신이 죄를 지은 듯 얼굴이 굳어선 백작 부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네. 하녀장님의 지시로 4층에 장작을 올리고 있습니다.”
“4층?”
데모트 백작 부인은 눈썹을 찌푸리며 4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하인을 앞질러 4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번도 올라온 적 없는 공간이었지만, 그녀가 찾던 사람은 바로 눈에 띄었다. 해도 잘 들지 않는 그곳에서 복도를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가고 있던 아스릴을 붙잡고 다짜고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맘대로 장작을 가져다 써?”
아스릴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 아래에서 장작을 지고 하인 한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걸 들킨 모양이군. 아스릴은 바락바락하는 목소리에도 주눅 들지 않고 심드렁한 얼굴로 백작 부인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았다.
“이제 겨울이라서요. 4층에 처음 올라와서 모르시겠지만, 여기가 겨울에는 엄청 춥거든요.”
생전 처음 보는 아스릴의 반응에 움찔한 백작 부인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더니 뒤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뜨거운 물이 나온다며 좋아하는 하녀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런다고 장작을 막 갖다 써? 저건 또 뭐야? 저기 욕실이 있었어?”
자신에게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4층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던 모양이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빼꼼히 문이 열린 욕실 쪽을 넘어다보았다.
얼핏 김이 나는 걸 보니 저쪽도 순조로운 듯했다.
아스릴은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황당함에 버럭 소리 지른 그녀의 눈빛이 더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뭔가 새로운 기분이었다.
데모트의 핏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보랏빛을 띠는 그녀의 눈동자 때문에 더더욱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던 때가 기억이 났다.
“아스테리아 언니가 1년 더 이렐린의 꽃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제가 건강해야 하지 않겠어요? 지난겨울 제가 감기를 심하게 앓아서 보름 동안 낫지 않았던 거 기억하시죠?”
당당하고 또박또박하게 말하는 아스릴은 백작 부인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항상 부스스하고 메말라 볼품없던 아이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너무도 당당한 아이 앞에서 백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나고 말았다.
“기, 기억……하지.”
“제가 듣기로 그때 의사에게 보여야 한다는 씨씨의 말에도 어머니께서 불러 주지 않아 제가 보름을 꼬박 앓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 언니의 신전 예배를 한 번 망쳤었고요? 저 없으면 예배 시작 노래부터 입도 뻥끗 못 할 테니까.”
아스릴은 씨익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백작 부인도 정확하게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당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항상 몸을 움츠리고 땅을 보던 아이가 논리적이고 강한 어투로 밀고 나오자 백작 부인은 그간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또 언니가 예배를 망치게 둘 순 없잖아요? 그럼 어떡해요? 부모님이 챙겨 주시지 않으면…… 저라도 저를 챙겨야죠. 걱정 마세요. 목욕할 때마다 하녀들 부르지 않고 장작도 다음부턴 제가 조금씩 옮길 테니.”
고용인들도 백작의 자산이니 함부로 탐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독립을 하고자 한다면 이쯤은 스스로 할 줄도 알아야지.
“그, 그래. 네 몸 관리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또 한 번 그렇게 아파서 언니 예배 망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런 줄 알아!”
그녀의 기세가 살짝 약해지자 그제야 백작 부인은 정신을 차렸다. 제가 잠시나마 저 아이에게 기가 죽었단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씰룩대던 백작 부인은 코웃음을 치곤 어디 해 보라는 듯 홱 돌아섰다.
무슨 일을 해도 내게 오는 관심은 딱 거기까지구나.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스릴은 남모르게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아마 옆에 손잡이 같은 거라도 있었다면 휘청이는 다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것을 움켜잡았을지도 모른다.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 아주 어렸을 때처럼 뺨이라도 한 대 맞았다면…… 주저앉아 그대로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스릴은 주먹 쥔 손에 힘을 빡 주고 버텼다. 그리고 자신이 동등하게 마주 본 그 보랏빛 눈동자가 사실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말이 청산유수로 나왔다.
“내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다니.”
아스릴은 쿵쾅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고는 장작을 쌓고 있는 하인에게 얼른 다가갔다.
“이 정도면 얼마나 쓸 수 있지?”
아스릴이 말을 걸자 그는 화들짝 놀라더니 문밖의 눈치를 보았다. 아마 백작 부인이 올라왔던 것을 알고 그 눈치를 보는 듯했다.
“어머니는 내려가셨다. 그래서 얼마나 쓸 수 있는 거야?”
“예, 예……. 이 정도면 아스테리아 아가씨는 보름 정도 쓰십니다.”
“음, 그럼 한 달쯤은 버틸 수 있겠군.”
자신의 몸이 고생하는 걸 볼 수 없는 아스테리아는 장작이 닳고 닳도록 불을 피워 대고 살 것이 분명했다.
“저, 불을 켜실 때…… 불러 주십시오.”
하인은 내키지 않지만 그게 자신의 소임이라는 듯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본분과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라서 아스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 피우는 법은 알고 있으니 되었다. 장작도 내가 꾸준히 옮겨 떨어지지 않도록 할 테니, 장작 창고만 비지 않게 해 다오.”
매번 한두 개씩 옮겨 놓는다면 이렇게 한꺼번에 옮겨 힘을 써야 할 일도 없을 터였다.
“아……. 네, 아가씨.”
“지금은 불을 좀 지펴 주겠어? 힘든 일이니까 한 번은 도움을 청할게.”
아스릴이 슬쩍 멋쩍게 웃으며 부탁을 하니 하인은 어쩔 줄 몰라 하다 냉큼 벽난로 쪽으로 달려갔다.
덩치 큰 하인이 불을 붙이는 뒷모습을 보다가 아스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시 깨어난 이후 애써 짓눌러 왔던 기억이 터지듯이 나와 버린 것이다.
자신에게 불 피우는 법을 가르쳐 주던 이의 날렵하고 커다란 몸이, 그의 손이, 그리고 그 손이 만들어 내던 찬란하고도 따뜻했던 불씨까지…….
그에게서 감정을 배우고, 불을 피우는 법을 배웠다. 얼핏 소소한 것 같지만, 이제 와서 보면 앞으로 살아갈 때 필요한 것만 배운 것이었다.
사실 황태자를 마음에 담았던 것은 욕심이었다.
저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분에 맞지 않았던 그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데모트의 이름을 가진 아스테리아 정도는 되어야 로비라도 해 볼 수 있는가 보다.
“불 다 피웠습니다, 아가씨. 다른 것은…….”
아. 아스릴은 문득 떠오른 것 하나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한 가지 꼭 갖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누구에게 ‘남는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게도 꼭 필요한 물건이 되었고, 스스로는 이걸 충족할 방법이 없었다.
“저…… 혹시 빗을 만들 줄 아는가?”
“빗…… 말씀이십니까?”
당황하는 하인을 앞에 두고 아스릴은 살짝 면구스러워졌다. 머리카락이 엉킬 대로 엉킨 상황이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데…… 손가락으로만 하기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었다.
사러 나갈 수도 없으니 가능하면 만들어야 하는데.
두 눈을 잠시 깜빡거리던 이는 머릿속에서 상상이라도 해 보는 것인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녀를 다시 마주 보았다.
왠지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린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이겠지?
“제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만나셨습니다, 아가씨. 제가 조각을 잘합니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그의 웃음에 아스릴은 따라서 미소를 지을 뻔했다. 살짝 올라가려던 아스릴의 입꼬리가 스륵 내려가자 하인의 들떴던 얼굴도 조금 머쓱해졌다.
“이름이 뭐지?”
그때 난데없이 아스릴이 그의 이름을 물어 왔다. 눈동자를 아래로 굴리던 그는 다시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리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저, 저는…… 헤르딘입니다.”
우직하게 생긴 것과 달리 어쩐지 섬세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헤르딘,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빗 하나만 만들어서 줄 수 있겠어?”
이름까지 불린 그는 왠지 작은 빗 하나에 사명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넵! 아가씨,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를 보면서 아스릴은 편안하게 웃음을 지었다.
모든 이들이 저를 무시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굴던 때도 있었는데……. 다들 자신을 미워하던 것이 아니라 데모트 백작 부부와 아스테리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나를 모셔야 하는 백작 영애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던 거구나.
데모트 백작 부부와 아스테리아가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진짜 저를 무시하는 하인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헤르딘처럼 어쩔 수 없이 챙기지 못했던 하인이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마저 자신을 배척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생활은 훨씬 고되었을 것이다.
“원하는 걸 바로 말씀해 주시면 제가 최선을 다해 알아보겠습니다.”
헤르딘의 말에 아스릴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충성심 가득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오늘도 또 하나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이 변한 것은 내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동안은 하인들마저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대했던 것 같아 명령은커녕 부탁의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씨씨는 백작 내외의 태도와 다르게 자신을 먼저 챙겨 주기도 하였으니 씨씨에게만 말을 걸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가 먼저 당당하게 데모트로서 다가가니, 그들이 저를 데모트로 받아 준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없어요. 그거 하나면 돼요.”
그래도 저렇게 열과 성을 다할 듯이 말해 주는 헤르딘에게는 더 고마운 마음이 들어 웃어 주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에 네! 하고 대답하고는 허리가 꺾일 듯 인사했다. 신이 난 얼굴로 뒤돌아 급히 방을 나서는 그를 보던 아스릴은 활활 타고 있는 벽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