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역시 우리 아스테리아! 이번에도 이렐린의 꽃이 되다니, 어쩜! 데모트의 자랑이라니까?”
“그럼 그럼, 우리 데모트가가 다른 가문에 비해서 이렐린의 꽃을 많이 배출했지만, 이렇게 2년 연속으로 된 적은 없었다고!”
아스릴은 퍼뜩 감았던 눈을 떴다.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저 이야기는 4개월 전에 들은 것이었다.
그날 저는 물을 가지러 가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항상 모두 들으라는 듯이 좋은 소식을 크게 말하는 데모트 백작의 습관 덕에 큰일이 생기면 거의 대부분 아스릴에게도 전해지곤 했는데…….
“또 이렐린의 노래를 열심히 외워야겠구나. 작년에도 했으니까 올해에도 잘할 수 있겠지?”
“그럼요. 아스릴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지금 상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사이 문득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그래, 이 말을 듣고 자신은 뒤돌아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도서관 문 앞에서 이렐린의 노래에 대해 생각하던 와중에…….
“아스릴!”
어느새 올라온 데모트 백작의 부름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는 이제 아스테리아의 소식을 전하며 도서관에 가 이렐린의 노래를 외울 것을 강요한다.
“네 언니가 또 이렐린의 꽃이 되었다. 뭐, 본받으란 말은 하지 않으마. 어서 도서관에 가서 이렐린의 노래를 또 외워야겠지?”
이게 정말…… 반복되고 있는 것인가.
이전의 아스릴은 언니도 이제 외우지 않았을까요, 하고 소심한 반항을 했었다. 그럼 키워 준 보답을 하라는 데모트 백작의 호통이 이어질 것이고.
입이 떨어지지 않던 아스릴은 시험 삼아 기억나는 대로 똑같이 대답해 보았다. 그러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그녀의 기억대로 데모트 공작의 대답이 이어졌다.
아스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을 돌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신의 뒤를 좇는 보랏빛 눈동자를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완벽하게 4개월 전 그날로 돌아와 있었다.
열병을 앓거나 하지도 않았다. 똑같이 흘러가던 하루의 어느 날, 그날에 눈을 다시 뜬 느낌이었다.
아스릴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제 허리 쪽을 짚어 보았다. 몸을 반 토막 낼 기세로 길게 베어 버리던 검의 감각이 서늘하게 남아 있었다.
그 끔찍한 감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지난 시간들이 모두 생생하게 떠올랐다. 도서관 한가운데에 서서 아스릴은 주룩주룩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잊을 것이지……. 이렇게 다시 살아야 하는 거면…… 그냥 전부 다 잊어버릴 것이지.
고요한 숲을 쓸고 지나가는 눈보라처럼 순식간에, 강렬하게 찾아왔던 한 남자도, 그 남자를 사랑했던 기억도 모두 그대로였다.
“흡…… 끅…….”
그 자리에 주저앉지도 못한 채 아스릴은 눈물을 쏟아 내고 또 쏟아 냈다.
이게 뭐 좋은 삶이라고 다시 살아야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좌절감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대던 아스릴은 <이렐린의 노래> 책이 펼쳐져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눈물은 계속 흘렀지만 익숙한 것 앞에 앉아 있으려니 마음은 그럭저럭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 * *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똑같이 겨울이 오는 길목에 아스릴의 방이 추워지기 시작해, 씨씨가 올려 줬던 이불들을 주섬주섬 꺼내 침대 위에 쌓아 두었다.
그러다 점점 생각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렐린의 성전>이든 지금 읽고 있는 이렐린의 노래든 어디에도 시간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라, 시간 안에 너희가 구하고자 하는 답은 다 있다, 라고 쓰인 구절이 있었다.
“시간 안에 구하고자 하는 답이 있다……?”
그저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고려해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말이라고 이해했던 구절이 이제 와서 생각하니 조금 다르게 와닿았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경험이 찾아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들 이런 시간을 갖게 되면 무엇을 할까. 나는…… 새롭게 얻은 이 4개월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아스릴은 침대 위에 앉아 등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또렷하게 떴다.
자신이 얻은 것은 4개월의 시간이 아니었다. 네 달 뒤면 끝날 이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제가 얻는 것은 다시 죽을 운명이 찾아올 날까지의 인생이었다.
“이렇게…… 똑같이 살다 네 달 뒤에 죽을 수는 없어.”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다. 잘못돼도 어차피 내게 남은 목숨이 네 달이라면…… 무서워할 것이 있을까?
이제 와 이 집에서 영애의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다만 다른 이들이 누리는 것은 똑같이 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 이름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집을 나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부터 생각을 해야겠다.
갑자기 목표라는 것이 생기자 아스릴은 머리가 맑아졌다. 피로와 추위에 짓눌려 있던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꼬르륵-
“배고프다…….”
한 번도 제때 해결해 준 적 없던 배고픔에 기어이 위에서 아우성을 쳤다. 순간적으로 차오르던 열정 같은 게 훅 꺼진다 싶었던 그때, 아스릴은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대로, 남들이 하는 만큼은.
고개를 번쩍 든 그녀는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쯤이면 가족들이 식사를 마쳤을 시간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그들과 따로 만나서 실랑이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부딪치게 된다면 맞서겠지만 어차피 목표가 데모트 영애로서 인정받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리트, 내 점심도 좀 차려 주겠어?”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식당으로 내려와 주방장에게 평소에도 그랬던 양 아주 당당하게 식사를 요구했다.
안에서 설거지하는 보조의 물소리를 들으며 저녁에 내보일 식사 메뉴를 생각하고 있던 바리트는 난데없는 주문에 나와 보았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식사는 항상 고용인들보다 못했다. 아무리 짠돌이 데모트 백작이라고 해도 고용인들이 먹는 것에는 조금 신경을 쓰는 편이었지만, 그녀의 것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쓴다고 한다면 비싼 재료 쓰지 말고 정말 최소한의 양만 주도록 신경을 썼었다.
“아가씨. 점심…… 여기서 드시는 겁니까?”
바리트가 아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아스릴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아랫입술을 꾹 물고 난 아스릴은 아까보다도 더 당당한 얼굴로 그래, 하고 대답했다.
바리트는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가 음식을 준비했다. 데모트 백작은 음식 욕심은 많지만 많이 먹지는 못하기 때문에 버리는 음식들이 많았다.
점심으로 준비했다가 남은 것들을 한데 모으자 근사한 한 상이 되었다. 바리트는 그간 아스릴에게 해 주지 못했던 마음을 담아서 따끈한 음식들을 식탁 앞에 앉은 아스릴에게 차려 주었다.
“모두 새 음식들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아스릴은 각오하고 내려온 차였다. 마음은 굳게 먹었지만, 솔직히 자신을 무시하는 하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걱정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배에서 다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배를 감싸는 사이, 슬쩍 미소를 지은 바리트는 재빨리 뒤돌아 주방으로 사라졌다.
따뜻한 수프도 한 입, 부드러운 빵도 한 입, 신선한 샐러드에 쫄깃하기까지 한 고기…….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입에 넣고 씹는 것을 반복했다.
그중에서 제일 충격적인 것은 빵이었다. 다른 것들도 맛있었지만 매일 먹던, 식어서 딱딱한 빵이 아니라 부드럽고 풍미 있는 빵을 덥석 베어 물었을 땐 눈물이 날 뻔했다.
남들은 다 하는 것들이 왜 내게만 허락되지 않았을까. 아스테리아가 해야 할 고생까지 제가 다 하고 있는데 나는 왜…… 그에 대해 받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걸까.
다시 네 달 뒤에 똑같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적어도 이전과 같은 삶을 살다 가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스릴은 눈물이 차올라 꽉꽉 막힐 것 같은 가슴을 내리눌러 가며 차려진 한 상을 전부 꼭꼭 씹어 삼켰다.
이전에도 씨씨는 아스릴을 잘 챙겨 주던 하녀였다. 거기다 바리트는 식사를 달라는 그녀의 당당한 요구에 다른 말 꺼내지 않고 따끈한 음식을 한 상 차려 주었다.
모두가 제게 이렇게 호의적이지 않겠지만 이거면 되었다.
마지막 채소 한 조각까지 모두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킨 아스릴은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잘 먹었습니다.”
생애 처음 가장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를 차려 준 바리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씨? 어디에 있어요?”
식사를 마치고 나온 아스릴은 씨씨부터 불렀다. 제게 하녀를 한 명 붙여 줄 리는 없고, 씨씨에게 말해서 그때그때 일을 봐줄 수 있도록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식당 근처에는 씨씨가 없었다. 1층을 차근차근히 둘러보다가 응접실 청소를 총괄하고 있는 씨씨를 발견했다.
씨씨는 자신을 부르는 당당한 목소리의 주인이 아스테리아인 줄 알고 돌아보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내 아스릴의 앞으로 와서 고개를 숙였다.
“4층에도 장작을 많이 쌓아 줘요. 그리고 불을 좀 피워 주고. 4층 복도 끝에 욕실 있는 거, 거기도 뜨거운 물 나오죠? 거기도 청소 좀 부탁해요.”
부드러운 명령에 씨씨는 잠깐 멍하니 아스릴을 바라보다가 곧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에 깃든 강한 힘을 읽은 것이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아스릴이 내린 명령을 데모트 백작도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데모트 백작은 언제나 ‘아스릴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아스릴에게 아무것도 해 줘선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네,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버려졌던 공간을 살려 주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세계 안에서 혼자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바로 이 백작가를 떠난다.
두 번째 삶만은 이전과 똑같이 살 수 없었다.
아스릴은 돌아서 하녀 둘을 데리고 사라지는 씨씨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