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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4화 (4/106)

4화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어느 순간 눈앞에 어둠이 있었고 타닥거리는 불 소리가 들렸다.

내 방에는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꼭대기 층에 벽난로는 있었지만 땔감을 가져오기도 어렵고 불을 피울 줄 몰라서 때 본 적이 없었다.

한겨울이면 씨씨가 몰래 한 장씩 가져다준 낡은 이불들을 겹겹이 둘러쓰고 보냈다. 장작불의 온기가 이렇게 따뜻할 줄이야……. 집으로 돌아가면 방에 불을 피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럼 내가 지금 누워 있는…… 불을 피우고 있는 이곳은 어디지?

그제야 아스릴은 눈을 번쩍 떴다.

아스테리아를 따라 나갔던 우스 호수 건너편 숲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났고, 아파 보이는 그를 끌고 호수로 나왔다가 우연히 독에 중독된 걸 알아챈 후 그걸 밀어내 주겠다고 힘을 쏟았는데…….

난 대체 그에게 무얼 해 준 것일까.

“일어났습니까.”

그때 불보다도 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아 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왼쪽에 있는 모닥불과는 멀리, 오른쪽 저편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핏자국이 살짝 남은 옷으로 보아 그때 그 남자가 맞는 듯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선이 분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선명한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아스릴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희미하게나마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파리한 안색을 한 채로 그녀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스릴은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을 느껴 황급히 가슴에 손을 얹고 꾸욱 눌렀다. 이런 기분은 살면서 처음이라 아스릴은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나드……라고 합니다. 당신은…….”

그가 가만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사냥꾼이나 농사꾼이 이용하는 오두막 같은 곳인 모양이었다.

그런 누추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레나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레나드라니, 설마…….

아스릴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일어나서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 바라보는 것도 아니야. 그녀는 정신없는 와중에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더듬거렸다. 이 남자가 아스테리아가 목 놓아 찾던 황태자였다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그도 아마 알았을 것이다. 이름을 말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거라는 것을.

그는 넋을 놓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양어깨를 잡아 힘주어 눌렀다.

그의 손에 따라 몸을 누인 아스릴은 크게 뜬 두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조금 더 쉬어라. 그대의 일행은 먼저 돌아갔으니.”

아……. 그럼 그렇지. 제가 다 쓰러져 가는 남자를 데리고 나왔는데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대로 저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심지어 아스테리아라면 저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아 같이 돌아왔다고 거짓말을 할 터였다.

집으로 돌아갈 걱정을 떨궈 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 몸은…… 좀 괜찮으세요?”

“덕분에. 그런데 아직 말하지 않았다.”

“예?”

아스릴의 푸른 눈과 레나드의 푸른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을 물었는데,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정말 너무 좋아서 또 넋을 놓을 뻔했다. 아스릴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스릴…… 아스릴 데모트라 합니다.”

“아스릴……. 데모트라 하면 데모트 백작가의 영애였군. 고맙다.”

누운 상태에서 황태자 전하를 올려다보면서 제 이름을 말하는 이 상황이 전부 꿈만 같았다. 그리고 그가 제 이름을 입으로 되뇌자 쿵 내려앉았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스릴, 살려 주어서 고맙다. 그 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말해 주지 못하는 거라면 굳이 묻지는 않겠다.”

그녀로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물어보면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너무 다행이었다.

심장 떨리는 이 순간이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걱정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내 사정 탓에 그대를 저택까지 데려다주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라. 반드시 이 은혜는 갚도록 하겠어.”

그는 미소를 거둔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와 함께 저택에 들어갔을 때 일어날 일들을 생각만 해도 또 한 번 현기증이 올 것 같았으니까.

“아닙니다, 은혜는요…….”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사이겠구나, 그런 아쉬움에 아스릴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풀벌레도 울지 않는 초겨울의 호숫가. 장작불이 오묘한 빛을 내며 두 사람 사이를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의 끈질긴 시선에 불을 살피던 레나드의 시선도 아스릴에게로 향했다.

시선이 다시 부딪치자 아스릴은 황급히 눈동자를 돌렸다. 장작 타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쿵쾅쿵쾅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려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허공을 떠돌던 눈동자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에게로 다시 향해 버리고 만다.

다시 맞부딪친 푸른 눈동자에 아스릴은 눈가가 시큰해질 만큼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 어디 숨어 버리고 싶다. 헝클어진 모습조차도 멋있는 그와 다르게 자신은 머리카락에 윤기도 없고 빗은 지도 오래되어 잔뜩 엉켜 있을 터였다.

얼굴이 트진 않았을까, 입술 터진 곳엔 피딱지도 앉았을 텐데. 깡마른 몸도 볼품없을 거고…….

설레던 마음은 어느새 불안과 초조로 번져 갔다. 한 번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그가 천천히 손을 올리더니 버석하게 마른 그녀의 볼을 감쌌다.

“얼른 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지가 않군. 혹시, 다시 볼 수 있을까.”

이어지는 말에 아스릴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가 나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지, 의문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그에게 묻지도 못하고, 결국 스스로 답을 찾지도 못했다.

하지만 긴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느끼는 심장의 울림이 병이 아니기를 바라며, 이것이…… 그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맞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가 제게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하는 것 또한 그런 의미이기를 바라며.

* * *

역시 집에서는 아스릴의 부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에 집으로 들어갔던 아스릴은 이렐린의 노래를 외우겠다는 핑계로 책을 자신의 방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사람이 잘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피해 있는 것인지 우스 호수 옆의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스릴은 그렇게 낮에는 방에 박혀 노래를 외우는 척하다가 해가 질 때쯤 누군가 그녀의 방에 저녁밥을 올려 주고 나면 그 오두막으로 향했다.

아픈 레나드를 걱정하는 마음 조금, 그리고 그와 한 약속이 그녀를 오두막으로 이끌었다.

레나드는 아스릴이 찾아오면 미소를 지어 주었고, 아스릴은 부족하나마 그에게 저택에서 챙겨 온 음식을 하나씩 내밀곤 했다.

한 나흘쯤 지나자 레나드는 궁으로 돌아간 듯했으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 그는 꼬박꼬박 오두막으로 찾아왔다.

레나드는 아스릴에게 제국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동쪽 경계에 흐르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강이라든가, 남쪽에 펼쳐진 반짝이는 바다라든가……. 이야기를 들으며 우와, 우와, 하는 반응을 보이면 그는 더 신이 난 듯 제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오두막에서 만나면 서로를 바라보는 것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무엇을 하든지 그는 그녀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 눈빛에 아스릴은 푸욱 빠져 버리고 말았다.

뭐든지 능숙하고 멋지게 해낼 것 같던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제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처음 겪는 감정에, 처음 듣는 말에, 아스릴은 그냥 홀려 버린 것 같았다. 오두막 안에서는 재고 따지는 것 없이 그저 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고요히 입맞춤을 나누었다. 건조하기만 하던 아스릴의 삶에 처음으로 촉촉함을 느낀 사건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 오고 가는 길이 힘들어도 그 시간이 아스릴에겐 굉장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감히 미래는 생각도 못 했던 아스릴에게 그는 내일을 이야기했고, 더 먼 훗날을 약속했다.

* * *

시간은 쏜살과 같이 흘러갔다. 차가운 겨울 동안 그렇게 지내면서 아스릴은 정말 여느 때와 달리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크게 내렸던 눈이 녹을 때쯤 봄이 찾아왔다.

날씨가 봄의 소식을 싣고 찾아올 때쯤 데모트 백작저에도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우리 아스테리아! 아니, 이제는 황태자비 전하라 불러야 하나? 아하하!”

“어머, 정말요? 세상에, 아스테리아! 이게 다 무슨 일이라니!”

“꺄악!”

아스릴은 몰래 나가서 장작을 하나 구해 올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길이었다. 그러다 아래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넋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아스테리아가…… 뭐가 된다고?

그날 아침에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 갔다고 했다. 그들이 가져온 소식은 아스테리아를 황태자비로서 맞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황태자면…… 황태자라면…….

“조금 있다가 황태자께서 직접 저택에 방문해 주신다고 했어요! 세상에!”

아스테리아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인이 된 듯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정말 황태자가 데모트 백작저에 방문했다. 그는 아스릴이 익히 알고 있던 남자였다. 불과 사흘 전 오두막에서도 만났던 남자가, 지금 황태자의 예복을 갖춰 입은 채 아스테리아의 앞에서 그녀와 눈을 맞추고 서 있었다.

* * *

국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병환으로 쓰러진 황제 대신 황후의 추진으로 이루어진 국혼, 황태자 레나드와 데모트 백작의 장녀이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이렐린의 꽃, 아스테리아의 결합에 온 제국민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아스릴은 차마 그곳에 가지 못했다. 어차피 데모트 공작이 데려가 주지도 않았지만.

마음의 정체를 모르겠다. 아쉬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부정적인 감정들은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가 이곳에서 지냈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덜커덩!

그때였다. 갑자기 오두막 문이 열리더니 스왁! 하고 뭔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컥!”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던 아스릴은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고통에 경악했다. 하지만 단말마의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은 듯이 그녀는 그렇게 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게 누군지 알고 죽이는 거야!”

“몰라, 여기 있었으니 그분의 끄나풀이거나…… 아니면 그냥 여기 근처에 떠도는 여자였겠지. 자, 샅샅이 뒤져!”

검은 든 남자들이 우르르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얼마 되지도 않는 집기나 기구들을 마구 헤집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코앞에 선명한 핏물을 뚝뚝 떨구는 검이 보였다.

저것이 나를 벤 것인가…….

아스릴은 그렇게 두 눈을 감았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눈을 감는 것에 관심 없었고, 숨이 꺼져 가는지도 몰랐다.

끝까지 쓸쓸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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