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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확실하게-2화 (2/106)

2화

데모트 백작저는 우스 호수와 굉장히 가까이에 있었다. 지름길이 있는데, 마차를 타기엔 길이 울퉁불퉁했다. 걷기엔 살짝 거리가 있지만 별수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역시 산책 삼아 나오니 너무 좋구나.”

아스릴은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는데, 아스테리아는 벌써 하녀들이 깔아 준 피크닉 매트 위에 앉아서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스 호수는 숲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숲이 시작되는 곳을 경계라고 일컫는다.

편안하게 앉아 햇빛을 받고 있는 아스테리아의 눈부신 미모를 힐끗대던 하녀 둘이 그 곁에 가지고 온 것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쿠키, 그리고 차갑게 타서 가져온 레모네이드까지. 아스테리아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놓고 그 곁에 앉았다.

아스릴은 그제야 겨우 아스테리아의 앞에 다다랐다. 풀썩 바닥에 떨어진 책으로 시선을 던진 아스테리아는 추레한 몰골의 동생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꼬락서니하고는. 아무리 사람들이 동생이니까 하고 봐준다지만, 정말 어디 가서 내 동생이라고 하지 마. 창피하니까.”

아스테리아의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빛났다.

이렐린께서는 아실까. 그녀를 모시는 꽃이라는 자가 저런 표정으로 동생을 항상 노려본다는 사실을.

“뭘 그러고 서 있어? 빨리 책이나 펼쳐 봐. 읽고 있는 티는 내야 할 거 아냐.”

무슨 꿍꿍이로 이곳에 책을 들고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스테리아가 하겠다고 하니 아스릴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땀이 흘러 산발인 머리가 얼굴에 달라붙기도 하고 얼굴에서 흐른 땀이 뚝, 책 표지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아스릴을 지그시 바라보던 아스테리아의 앵두 같은 입술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 정말. 나는 이곳에서 첫째로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난 정말 저러고는 못 살았어.”

들으란 듯이 하는 말도 거의 레퍼토리급이라 아스릴은 반응도 하지 않았다. 분명 저 옆에서 씨씨가 그나마 자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봐 주고 있을 터였다.

아그로드 제국은 본래 첫째 자식을 제일 귀하게 여겼다. 첫째 자식에게는 이렐린의 은총이 따른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집에서도 이렇게 대하는지는 아스릴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집안의 사람들을 사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스테리아가 신전으로 나갈 때가 좋았다. 아스릴도 따듯한 물에 몸을 씻을 수 있고, 씨씨가 머리도 빗겨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황태자를 봤다는 얘길 들었는데. 대체 뭘 보고 그런 소리들을 하는 거야.”

먹을거리들이 보기 좋게 놓인 것은 확인했지만 손도 대지 않았고, 책을 펼쳐 놓고는 눈길도 주지 않던 아스테리아가 여기까지 나온 목적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곳 경계에서 황태자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영애들 사이에서 새어 나온 모양이었다.

아그로드의 황태자는 현재 몸이 약해진 황제를 대신해서 거의 국정을 돌보다시피 하고 있어 매우 바쁘다 들었다. 성함이…… 뭐라더라.

“레나드 전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옆에서 씨씨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 맞다. 레나드 전하.

“그럼 누구겠어? 아그로드의 황태자 전하라면 그분밖에 없지! 하아…… 그렇게 잘생기셨다면서? 신전에는 잘 안 오시니까 볼 기회가 있어야 말이지.”

“지난번에 신전에 오셨었잖아요, 아가씨!”

“그때 황족의 기도 자리에만 서 계셔서 엄청 멀었단 말이야! 눈동자 색깔조차 구분하기가 어려웠다고!”

아스테리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어린 하녀는 한껏 움츠러들어선 조용히 물러났다.

아스테리아도, 아스릴도 이제는 적절한 혼처를 찾아 결혼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었다. 몸이 왜소해서 1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아스릴은 어느덧 스물한 살이었다.

아스테리아는 역시나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불리는 황태자, 레나드를 노리는 듯했다. 위로 쟁쟁한 작위를 가진 영애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으리라.

특히 최근에 황제가 아픈 날이 잦아졌다는 소문이 돌자 미혼 영애가 있는 가문들에서는 앞으로 뒤로 혼처를 찾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아빠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어. 제대로 눈에 띄어야지.”

그런 상황에서 다른 영애가 퍽이나 그분이 온다는 곳을 알려 줬겠네…….

고고하게 책을 읽는 척하며 주변을 살피는 아스테리아를 보며 아스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외모에 이렐린의 꽃이라는 칭호까지 줄줄이 두 번 받은 아스테리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질투의 대상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황태자를 노린다는데, 순순히 도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물끄러미 아스테리아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아가씨, 이거.”

호수 쪽에서 불어오는 물비린내 머금은 바람을 들이마시며 멍하니 앉아 있던 아스릴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뒤쪽에서 비스듬히 다가온 씨씨가 작게 속삭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아스릴이 앉은 풀밭 바닥에 냅킨 위로 얹어진 쿠키 몇 조각이 보였다.

“잘 먹을게요.”

아스릴은 쿠키를 몰래 가져다준 씨씨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 바람에 말라 있던 입술이 갈라져 피가 배어났지만 아스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씨씨는 안타까움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제 손으로 그 피를 닦아 줄 수 없었다.

“쿠키 먹고 나면 냅킨을 호수 물에 적셔서 입술에 잠깐 대고 계세요.”

나직하고 조심스레 말해 준 씨씨는 티 나지 않게 아스테리아에게로 돌아갔다.

“야, 아스릴!”

그때 갑자기 아스테리아가 날카롭게 아스릴을 불렀다.

혹시 씨씨가 준 쿠키가 들킬까 봐 아스릴은 그쪽으로 두었던 시선과 손을 대번에 거두었다.

“너, 저기 경계에 다녀와 봐.”

아스테리아가 던진 말은 쿠키에 대한 추궁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기함할 만한 소리였다.

“뭐라고?”

“말귀 못 알아먹니? 저기, 숲 속에 들어갔다 와 보라고.”

“아가씨…….”

이번만큼은 씨씨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휙 노려보는 아스테리아의 눈길에 다시 입을 꽉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기는 경계고, 들어가면 안 된다고 아버지께서…….”

“그러니까 내가 갈 순 없잖아? 무슨 일을 당하려고. 네가 대신 다녀와. 거기 황태자님이 지나간 흔적이라든지 그런 건 없는지, 어디 숲 멀리에서 황태자님이 지나가진 않는지 좀 보고 와.”

아스테리아는 정말 진심이었다. 제가 들어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흔적이라니, 그런 것이 남아 있다 한들 제가 알아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사람들이 걸어간 자리에 제가 알아볼 정도로 흔적이 남아 있을 리도 없고.

경계를 지나다닌다는 황태자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과 아스릴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까지 더해져 아스테리아는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녀올게.”

아스릴은 결국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씨가 챙겨 준 쿠키는 아스테리아 모르게 냅킨에 고이 싸서 제 주머니에 넣었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지만, 아스릴은 구차하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제 약한 모습을 보면 아스테리아가 재밌어할 뿐, 누구도 저를 구해 주지 않을 테니까.

“아가씨…….”

씨씨가 이번엔 자신을 향해서 같은 단어를 말했다.

그래, 아스테리아도 아가씨, 아스릴도 아가씨였다. 하지만 집안에서의 대우는 완벽하게 달랐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그로드 제국의 둘째들은 다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사는 걸까? 이제는 생각하는 것도 무기력해져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경계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그렇게 유의하라 당부하고 당부하는 곳이기에 뭔가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숲 속은 매우 고요했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키가 큰 나무들 틈을 비집고 바닥으로 쏟아져 꽂히는 햇빛들이 보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잖아.”

굉장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숲 속으로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분위기였다.

아스릴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사람이 지나간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바랄 것을 바라야지 싶다가도 아스테리아가 또 히스테릭하게 굴 것을 생각하면 조금 골치가 아팠다.

아스릴은 한 발 두 발, 발을 조금 더 옮겨 보았다. 안쪽으로 조금씩 들어가자 정말 안 보이는 경계를 넘은 듯이 쏙,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포옹의 느낌 그 이상이었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포옹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포옹하는 느낌이 이럴 거라 짐작만 하는 것이지만.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그때 갑자기 숲 저편에서 빠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나무가 조금만 더 성기게 심겨 있었다면 메아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진짜다.”

아스릴의 목소리는 아직도 끝이 갈라져 나왔다. 우선은 숲 저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쁜 사람이건 아니건, 어쨌든 황태자가 나타난다는 생각에 아스릴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발소리였다. 저벅저벅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스릴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일까 아니면 동물? 그렇게 약간의 걱정을 담은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던 아스릴의 눈에 드디어 소리의 정체가 들어왔다.

“에……?”

서, 설마…….

검푸른 머리카락에 갑옷을 걸친 남자를 보고 아스릴은 두근두근했다. 아스테리아가 만나고 싶어 마지않는 그 사람인 걸까? 소리도 가까워지고, 그 모습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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