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째는 확실하게-1화 (1/106)

< 두번째는 확실하게 >

1화

“역시 우리 아스테리아! 이번에도 이렐린의 꽃이 되다니, 어쩜! 데모트의 자랑이라니까?”

“그럼 그럼, 우리 데모트가가 다른 가문에 비해서 이렐린의 꽃을 많이 배출했지만, 이렇게 2년 연속으로 된 적은 없었다고!”

3층에서 내려와 막 2층의 바닥으로 발을 내디디려던 아스릴은 멈칫, 멈춰 버리고 말았다.

오늘의 소란은 다른 날보다 더 요란스러웠다. 아스릴의 발은 2층에 닿지 않고 다시 계단 위를 디뎠다.

실밥이 터진 실내화를 곱은 발가락으로 잘 잡은 채 소리가 나지 않게 다시 뒤로 돌았다. 소리라도 날까 싶어서 조심히 계단을 올라가는데, 아래에서 다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또 이렐린의 노래를 열심히 외워야겠구나. 작년에도 했으니까 올해에도 잘할 수 있겠지?”

“그럼요. 아스릴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아스릴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잠시 멈췄던 걸음을 그대로 다시 옮겼다. 위층으로 향하는 그녀에게선 아무런 생기도 감돌지 않았다.

3층을 지나 4층으로 가려던 아스릴의 눈에 도서관의 입구가 보였다.

대대로 신전의 우상 ‘이렐린의 꽃’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알려진 데모트 백작가에는 신학과 관련된 서적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있었다.

저곳은 아스릴에게 자유로운 출입이 허락된 유일한 장소였다. 물론 그 이유는 매우 자유롭지 못했지만.

<이렐린의 노래>란 이렐린 신학의 정점, 이렐린 신의 말씀을 기록한 1000장이 넘는 책이었다.

이렐린의 꽃은 신전의 행사에서 그날 주어지는 이렐린의 노래를 낭송하는 역할을 했다. 말 그대로 신전 행사에 참여하는 황족과 귀족들의 우상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일부는 이렐린 여신의 분신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 데모트가 저리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아스테리아가 2년이나 그 자리를 차지한 이유가 그녀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스릴!”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도서관을 바라보고 있던 아스릴은 눈에 띄게 어깨를 흠칫했다. 저 아래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남자가 언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아스릴은 난간을 잡은 손을 세게 쥐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아스릴이 뒤를 돌아보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언니가 또 이렐린의 꽃이 되었다. 뭐, 본받으란 말은 하지 않으마. 어서 도서관에 가서 이렐린의 노래를 또 외워야겠지?”

“언니……도 이제는 외우지 않았을까요?”

아스릴의 목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오늘 일어나서 처음 입을 열어 목소리가 가다듬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뭐야? 네 언니는 이렇게 데모트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데, 너도 뭔가 보답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밥값도 못 하면 안 되지.”

데모트 백작의 말에 아스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백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아스릴의 움직임을 조용히 눈으로 좇았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글이글, 그녀를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아스릴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신중히 발을 옮겨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책을 좋아하는 아스릴이었다. 그러나 이렐린의 노래를 완벽하게 외우고 난 다음에야 그녀가 보고 싶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올해가 2년째니까, <이렐린의 노래> 말고 다른 신학책들도 좀 봐 둬라. 네 언니가 신관들에게 언제 어떤 질문을 받을지 모르는 거 아니겠냐. 말, 알아들었겠지?”

도서관 문 안으로는 발길조차 들이지 않은 데모트 백작은 아스릴이 커다란 <이렐린의 노래> 책 앞에 앉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서관 문을 닫고 발을 돌렸다.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하려나……. 아스릴은 닫히는 도서관 문을 힘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뭐…… 책을 보는 것 자체는 좋아하니까. 이렐린의 노래는 작년 내내 들여다보아서 이제 다 외우기도 했고.

군데군데 엉켜 있는 푸석푸석한 금발의 머리카락과 현 데모트 일가에서는 유일하게 새파란 눈동자. 팔다리가 너무 가늘어 비척거리며 걷는 아스릴의 모습은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아스릴은 넓고 넓은 도서관 안을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이곳은 자유의 공간인가 아닌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문득 바보같이 느껴졌다.

* * *

“아, 정말! 빨리 안 와?”

아스릴은 옆구리에 무거운 책을 끼고 낑낑대며 걷고 있었다. 저 앞에서 아스테리아와 가벼운 피크닉 가방을 하나씩 나눠 든 하녀 둘이 그녀를 돌아보고 있었다.

지금 이 사달이 난 것은 아침. 아스릴이 겨우 스며든 햇빛 아래서 눈을 떴을 때였다.

아래에서 뭔가 소란이 일 것 같은 예감에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아니니 다를까, 노크도 하지 않은 채 하녀 하나가 불쑥 문을 열었다.

“뭐야, 옷 갈아입고 있었네요? 백작님께서 찾으시니까 빨리 내려오세요.”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성의 없는 말을 던진 하녀는 다시 나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옷을 갈아입느라 드러났던 하얗고 깡마른 몸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이.

옷을 주섬주섬 갖춰 입은 아스릴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런데…….

뚝.

“아…….”

간당간당하던 실내화가 실밥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급히 움직이던 걸음 때문에 오른발은 이미 저 앞의 바닥을 짚고 있는데.

데모트 백작이 불렀단 말이 떠오른 아스릴은 그걸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나머지 한쪽도 벗어 두고 맨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나무 바닥이 아스릴의 발바닥에 차갑게 닿아 왔다.

“그러니까요, 아빠아. 그 숲에 가서 공부하고 올게요. 네? 아스릴 데려가면 되잖아요~”

콧소리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1층에서 들리고 있었다.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카락이 가슴 너머로 굽이쳐 흘러내리고 자수정을 담은 듯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의 언니, 아스테리아였다.

아스테리아는 데모트 백작의 팔을 두 팔로 붙잡고는 매달리듯 흔들며 뭔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그 말 사이에 자신의 이름이 끼어 있다는 것이 매우 불안했다.

“어? 아스릴 왔다. 아빠, 응? 쟤가 책 들고 가면 되잖아요. 경계 넘지만 않으면 안 위험하고. 네?”

아. 아스테리아의 입에서 ‘경계’라는 말이 나오자 아스릴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애교 많은 딸이 아빠를 조르듯 말하고 있었지만, 아스테리아의 눈동자는 심상치 않게 빛나고 있었다.

언니……. 그 경계를 넘어갈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렇지만…….”

“응? 아빠, 드물게나마 사람들 지나다닌다는 길목인데 제가 야외에 나와서까지 공부하고 있다는 거 알려지면 좋잖아요. 네?”

물론 억지다. 지금 아스테리아가 가려 하는 우스 호수와 그 근처의 숲은 정말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특히 ‘경계’의 근처는 신력이 닿지 못해 위험하다는 숲이었기 때문에 몇 시간을 머물러도 사람이 지나가지는 않는 위치였다.

하지만 아스테리아가 저렇게 나온다면 데모트 백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그래, 좋다. 공부하러 나간다고 하니 아비가 어찌 말리겠니. 씨씨, 피크닉에 필요한 물품과 간식을 준비해서 아스테리아를 모셔라.”

“꺄아, 아빠 최고!”

아스릴에게는 아무런 말도 걸지 않은 채 부녀는 아주 경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서로 끌어안고 난리가 났다.

스물셋이나 됐음에도 아버지와 저렇게 지내는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그나저나 그냥 다녀오면 좋을 텐데 굳이 책을 가지고 나가겠다고 하니 아스릴은 한숨부터 났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기색을 보이거나 한숨 소리가 조금이라도 나면 데모트 백작의 매서운 눈길이 날아올 것이었다.

그럼 눈치 빠른 씨씨는 며칠 동안 자신의 방에 빵과 되직한 토마토주스만 넣어 줄 것이 뻔했다.

“책…… 가져올게요.”

눈을 뜨자마자 내려와 목이 또 가라앉아 있었다. 아스릴은 뒤를 돌아 1층에서 4층까지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맨발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다행히 바깥에 나갈 때 신는 신발은 비교적 말짱했다.

작년 아스테리아가 처음 이렐린의 꽃이 되었을 때 앞으로 그녀의 곁에서 다녀야 하는 것을 감안해 아스릴에게도 새 외출용 신발을 사 준 것이었다.

이유야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받은 게 얼마 없어서 정말 애지중지 아끼며 신었던 신발이었다.

“이것도 슬슬…… 위험하려나.”

방으로 돌아온 아스릴은 휑한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신발을 가져가 신었다. 여기저기 해진 자국이 많아서 이 신발도 오래 못 신겠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가 누굴 안타까워해, 신발만도 못한 주제에.”

문득 입에서 부정적인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 말을 하는 찰나 음성이 또렷해졌던 아스릴은, 곧 차분히 신발을 갈아 신었다. 많이 해져 딱 들면 반으로 갈라질 것 같은 숄을 어깨에 둘러 마치 로브인 양 가운데에서 묶었다.

이제 내려가서 책을 챙겨야 하는데……. 아스릴의 머릿속은 언제나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제가 이 데모트 가문에 도움을 주는 일이니까.

도서관에 들른 아스릴은 커다란 <이렐린의 노래> 필사본을 두 손으로 꽈악 잡아 들었다.

이 책은 휴대하기 좋게끔 작게 나온 것도 없었다. 차라리 다른 곳에 필사를 해서 가볍게 들고 다니고 싶다고 말했지만, 독실한 이렐린의 신자인 데모트 백작 부인이 극구 반대했다.

“빨리 안 와, 아스릴!”

“가, 가고 있어…….

아스릴은 책을 다시 추스른 뒤에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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