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반갑네.”
“깜짝이야. 당신이 사후세계를 담당하는 신인가.”
“하하, 역시 인간들의 상상력은 풍부하네. 사후세계란 건 없어. 악하든 선하든 육체를 떠난 영혼은 그 상태로 안식에 드니 말이야.”
“그럼 당신은 뭐지? 난 왜 이곳에 있는 거야.”
아무리 봐도 평범한 존재로 보이지 않는 형체에 제이스는 지금 상황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한 대로 사후세계가 없다면 지금 존재하는 이 몸은 도대체 무엇인지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대가 마음속 품은 이의 소원이다.”
“클로에?”
“앞으로 그대는 성녀와 접점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야. 그리고 무고하게 죽인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봉사도 필요하겠지.”
“너 여신이지? 클로에는 괜찮은 건가?”
“성녀는 앞으로 대륙의 번영을 위한 성스러운 존재. 여신의 선택을 받은 아이와 미래를 향해 손잡고 나아갈 것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이스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딘지 모를 깊은 숲속에 누워있었다. 얼마나 깊었으면 무수한 수풀로 인해서 일말의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곳이었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삶을 사세요. 난 나의 삶을 살 테니. 부디 몸조심하시길.
공손한 말투가 적혀있기는 했으나 손에 쥐어져 있는 쪽지를 쓴 이가 클로에라는 것을 제이스는 단번에 눈치챘다.
“하긴 나만 마음 편하게 죽어있으면 안 되긴 하지.”
클로에가 전하려던 뜻을 이해했는지 제이스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터벅터벅 숲을 빠져나갔다.
***
“와주셔서 감사해요.”
“허허,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안 올 수가 있겠소.”
이국적인 복장의 사절단은 샐리가 추진하는 대륙횡단 열차 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를 방문했다. 제국에 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온다는 것은 최근에 있어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기에 샐리는 오늘을 축제의 날로 정하면서 제국에 방문하는 사절단을 화려하게 맞이했다.
이번 한 번으로 그동안 쌓여온 적대적인 감정이 하루 만에 없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차츰차츰 쌓이며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원만해져야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 강대국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것이 샐리가 바라는 앞으로의 제국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샐리가 안내한 곳은 세계수 근처의 정원이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세계수.
그 존재는 대륙에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였다. 여신의 가호를 뜻하는 세계수는 제국이 마족들로부터 지켜낸 대륙을 평화와 번영의 영토로 이끌 것을 바라는 여신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직접 전해 받은 샐리는 마땅히 여신의 뜻을 받들어야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참으로 웅장하오.”
“저도 볼 때마다 그렇게 느껴요. 그건 그렇고 정말 초대에 응해주실 줄은 몰랐네요.”
“그대의 소문은 대륙 전체에서 유명하오. 그러니 직접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 방문했지요.”
“그래서 소감은 어떠시죠?”
여차하면 마법사들과 손을 잡고 제국을 침공할 생각까지도 있었던 멜튼 왕국. 그 사절단이 자신의 초대에 응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샐리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소문의 공작인 본인을 직접 본 소감에 대해 물었다.
“생각했던 대로 함께 협업해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섰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좋게 볼 수밖에 없지 않소. 공작의 말에는 언제나 진정성이 담겨있으니.”
멜튼 왕국의 귀족이 말한 것처럼 샐리의 교류 시도는 단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두드리면 언젠가는 열릴 것이라는 마음으로 샐리의 계속되는 노력 끝에 멜튼 왕국에서도 겨우 문을 연 것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회의장을 세계수가 코앞에서 보이는 정원으로 마련하다니 역시 공작은 비범한 인물이오.”
“하하, 저 혼자만의 생각도 아닌 걸요.”
그렇게 샐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원활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우와.”
“허업.”
사절단으로 온 다른 나라의 귀족들은 모두 한곳을 바라보며 일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누군가는 감탄하며 벌린 입을 제대로 다물지조차 못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로 신전에서 준비해준 예복을 입고 등장한 클로에를 바라봤다. 함부로 말조차 걸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그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허어,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자태로군. 저분이 성녀님이십니까.”
“네, 저희 제국이 이토록 강녕하게 유지되는데 꼭 필요한 존재이시지요. 오늘은 대륙의 발전을 위해 각 나라의 귀족 분들이 모인 만큼 성녀께서 직접 방문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히셨답니다.”
세계수 정원에서의 만찬.
그곳은 온전히 샐리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대륙의 평화를 상징하기 위해 모인 자리인 만큼 무언가 모인 사람들의 가슴 한켠에 깊은 뜻을 새기고자 하는 샐리의 말을 듣고 클로에가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클로에의 등장 역시도 두 사람이 계획한 연출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궁리해낸 그 연출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절단에게 제대로 먹혔다.
말로만 듣던 고귀한 성녀의 존재는 눈을 마주치기도 버거울 정도로 빛이 났다. 그 성스럽고 고결한 존재와 샐리가 함께 이끌어나가는 제국은 분명 이전과는 그 방향성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선대 황제가 이끌던 제국에게 붙어있던 수많은 부정적인 꼬리표는 오늘 하루 만에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
“오늘 하루 고생 많았소.”
“저만 고생했나요. 당신도 사절단이 수도에 오기까지 호위하느라 더 고생을 많이 했죠.”
사절단을 맞이하고 난 저녁.
저택으로 먼저 돌아와 기다리던 샐리는 헨리가 들어오자마자 그의 품에 안기며 오늘 하루의 노고를 생각하며 고생했다는 말을 나눴다. 실제로 오늘처럼 수도에 사람이 몰린 날에 호위에 더 신경을 써야 했기에 그 피로도가 평소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뽀뽀를 받는다면 피로가 싹 풀릴 것 같은데.”
이제는 이런 식의 애교도 자연스러워졌다. 이전부터 두 사람은 부부관계였지만, 모든 목적을 달성한 지금 둘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샐리도 다른 사용인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헨리의 볼에 아무렇지 않게 뽀뽀를 하며 그의 부탁을 들어줬다.
물론 주변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용인들이야 언제나 그렇듯 흐뭇한 미소로 자기네들이 부끄러워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일 하루는 휴가 맞죠?”
“그렇소.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쉴 때는 쉬어야 하지 않겠소.”
“맞는 말이에요.”
“그대도 내일은 쉬겠지?”
“물론이죠. 그래서 그런데 내일 같이 데이트하는 거 어때요.”
“하핫, 나야 좋지. 그동안 바빠서 함께 외출도 못했으니 내일 같이 시간을 보냅시다.”
관계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서로가 주고받는 영향이 강하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지금 샐리가 내일 하루는 일에 손도 대지 않고 쉬겠다고 선언하는 것에서 보였다.
예전의 샐리라면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쉴 때는 확실히 쉬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헨리와 함께 하다 보니 그녀의 철학도 점차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나 헨리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갈증이 조금씩 커지던 요즘에는 그 선택지에 있어서 일말의 고민조차 없었다.
“축제를 보러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소.”
“내일 밤 폐막식과 함께 불꽃놀이도 한다는데 같이 보러 가요. 그것보다는 점심때 당신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보여주고 싶은 것?”
“그게 뭔지는 지금은 비밀이에요.”
“허어,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그러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니오.”
“그런 얼굴 해도 안 알려줄 거예요.”
샐리는 헤헤, 웃으며 계속해서 집착하며 물어보는 헨리의 질문들을 모조리 흘려버렸다.
“흠흠, 두 분 모두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이만 식사하러 들어가시죠.”
맡은 직책이 있어서 그런지 예전보다 분위기가 무거워진 메리가 여전히 문 앞에서 꽁냥대는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나섰다. 결국 샐리와 헨리 둘 모두 메리의 눈치를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
“이게 다 뭐요?”
“그냥 기분 전환이라고 생각해요.”
메리의 안내를 받아 저택 밖 정원으로 나온 헨리는 그곳에 펼쳐진 새하얀 천 위로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샐리였기에 헨리는 곧바로 그녀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샐리는 싱긋 웃으며 궁금증이 가득해 보이는 헨리에게 친절하게 답변했다.
“이걸 그럼 그대가 혼자 다 한 것이오?”
“음, 도움을 받기는 했어요. 오늘은 혼자 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정말 힘들게 연습한 거거든요. 그러니 조금 부족하더라도 맛있게 먹어주세요.”
“당연한 말을!”
메리의 까다로운 평가를 통과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으나 이렇게 남편에게 자신의 솜씨를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샐리는 긴장된 얼굴로 헨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음식을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가기까지의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눈으로 좇으며 얼굴에 생기는 표정 변화까지도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때요?”
조마조마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질문.
그러나 그 질문에 헨리는 바로 대답하기는커녕 지그시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