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108화 (108/111)

#108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것인지 클로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제 샐리와 헨리에게는 제이스의 존재가 필요 없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그를 지금까지 아무런 처분 없이 내버려 둔 것은 오늘과도 같은 위기 상황에 쓸 수 있는 비장의 패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위기를 넘기고 모든 흑막을 제거한 지금에서는 남아있는 건 지금까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나가서 따로 얘기하지.”

그러나 어떻게 되든 막을 수 없는 수순이란 걸 안 제이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클로에를 비켜 세운 뒤 헨리에게 따로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헨리는 그 제안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해요, 샐리. 제발 선처해주세요.”

눈물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인 얼굴로 무릎까지 꿇어가며 싹싹 비는 클로에의 모습에 샐리 역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그 예상치를 웃도는 가슴 통증은 샐리가 클로에를 얼마나 아끼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샐리는 헨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막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게 뭐든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었다.

다른 것보다 주안을 죽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샐리는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클로에가 처량한 모습으로 빈다고 해도 말이다.

“이러지 말아요.”

“제발, 제발요.”

“내가 클로에가 원하는 일을 들어줄 수 없어요. 이건 온전히 헨리의 영역이고 그가 판단하는 것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어쩌면 내 쪽이 심판받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그런 거 싫어요. 저희가 떠날게요. 제국을 떠날 테니까….”

샐리는 말을 이어 나가기보다 이미 이성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클로에를 자신의 품에 안고 진정시켰다.

“클로에도 알잖아요.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러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그러는 만큼 헨리가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참아왔는지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샐리의 말대로 헨리는 단 하루도 제이스에 대한 분노를 잊은 적이 없었다. 이제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을 표출해낼 차례였다. 그리고 샐리는 자신의 남편이 그 분노를 표출하는 데 그 어떤 방해꾼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설령 클로에라도 말이다.

***

“어디까지 가는 거야.”

“황궁에서 벗어나 최대한 멀리 갈 거다. 네 녀석이 날뛴다면 그 주변 건물이 전부 부서질 것 아닌가.”

“누가 보면 나 혼자 부시고 다닐 것처럼 말하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덕분에 괜찮은 휴양지도 잃었는데.”

제이스가 클로에와 종종 가던 버려진 성은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공터로 변해버렸다. 그것이 바로 헨리와 제이스 두 사람이 날뛴 결과물로 지금 헨리가 황궁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는 이유였다.

“여기가 좋겠군.”

한참을 걷다 헨리가 멈춰선 곳은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숲속이었다. 그리고 이 장소가 두 사람 중 하나만 살아나갈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제이스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그 선택 후회하지 않아?”

“후회할 게 뭐가 있는 거지.”

“내가 이긴다면 그 뒤로 내가 뭘 할 줄 알고. 난 어차피 제국에 더 남아있을 명분이 없어. 이쯤에서 그만두고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어때.”

“말을 참 쉽게 하는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자답다고 해야 하나.”

헨리의 말에 제이스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한 복수심이 사람을 망치는 데 어느 정도로 기여하는 지가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지금의 제이스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 일을 가볍게 넘어가려는 악인 그 자체였다.

“그럼 시작하지.”

헨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이스를 노려보며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언제든 준비만 되면 당장에라도 목을 치기 위해 달려들 것 같은 사나운 기세에 제이스도 어쩔 수 없이 검을 들고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어쩔 수 없네.”

푸념이 담겨 있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제이스가 먼저 헨리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이전과는 달리 장검을 장착한 그는 기본적인 검술부터가 완전히 결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헨리는 낯선 그의 검법을 받아치는 데 생각했던 것보다 애를 먹었다. 그러나 역시 제국을 넘어 대륙의 최고 기사라는 명성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금방 감을 잡았는지 제이스의 검술에 적응한 헨리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싸움 양상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검기가 담긴 검이 부딪히면서 나는 굉음에 숲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동물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갔고, 주변을 가려주던 나무들도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방법이 잘못됐어. 제국에 원한이 있는 사정은 알겠지만, 성녀가 말한 것처럼 무의미한 살인을 벌이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내 말이 틀린가.”

헨리가 던진 질문에 제이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스승과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데 일조했던 이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죽인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었다.

다만 지금 그에게 남아있는 마음속의 무거운 짐은 결국 클로에의 존재로 직결되었다.

“갑자기 동작이 둔해지는데.”

“그런가? 난 평소랑 다를 게 없는데. 그건 그렇고 너 정말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거 맞아? 너무 표정을 못 숨기는 거 아냐?”

“즐거울 수밖에 없지. 아끼는 부하의 복수를 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게다가 이제 나와 내 아내의 골머리를 썩이던 것들도 전부 처리했고, 이제부터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지.”

“부럽네.”

클로에의 말처럼 인내하고 기다렸다면,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과거와 연관 없는 이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여러 가지 가정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제이스는 과연 지금과 같이 비극적인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의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다.

‘그랬다면 나와 클로에도 너희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부럽다는 말은 제이스가 헨리에게 처음 내보인 약한 내면이었다. 자신과 클로에의 결말이 그들처럼 행복한 마무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진심으로 우러나온 부러움의 표현이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

“무슨 부탁이지.”

“그냥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말이야. 만약 네가 날 죽이고 나면 그다음에 클로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내가 저지른 일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거든.”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쉽겠네.”

푸욱.

초단위로 계산이 들어가야 하는 일말의 빈틈.

그러나 헨리 정도의 실력자가 그 잠깐의 빈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과 같은 고수들의 싸움은 찰나의 빈틈이 승부를 가르기 마련. 헨리는 곧바로 과감하게 제이스에게로 돌진하여 그의 가슴팍에 자신의 검을 찔러넣었다.

“이건 무슨 의미지.”

심장을 제대로 꿰뚫었다. 그 시간 동안 상대에게 돌아온 반격조차 없기에 헨리는 몸에 생채기 하나 남지 않은 완벽한 승리를 거머쥔 것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완벽한 승리에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로 제이스를 쳐다봤다. 이미 동공에서 이전만큼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벌써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를 집어삼키고 있음이 명확했다.

“이걸로 끝내자. 더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게 내가 생각한 최선의 속죄 방법이야.”

“결국 넌 사랑하는 여자에게 끝까지 이기적으로 구는군.”

“그러게 말이다. 수도에 올라온 뒤부터 우리 둘 사이는 예전과 같을 수가 없었지.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보다도 더 클로에는 힘들었을 거야.”

“마지막으로 전할 말은 없나.”

이것은 헨리가 베푸는 최소한의 자비였다.

두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황궁에서 지냈는지 알기에 헨리 역시도 마음이 조금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뭐지?”

“그냥 나 없는 동안 잘 보살펴달라고. 지금 내 죽음에 죄책감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는 옳은 일을 한 거야. 클로에 역시도 마찬가지지.”

제이스는 스스로가 악인임을 인정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클로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그게 너무 많아서 정리를 할 수조차 없을뿐더러 지은 죄가 있기에 그녀에게 떳떳하게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설령 마지막이더라도 자신이 소중하게 품어온 아름다운 꽃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털썩.

‘부디 앞으로의 인생에 더는 무거운 짐이 없기를.’

제이스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까지 클로에에게 무거운 짐을 덜어버린 것 같아 미안했다. 굳이 안 봐도 자신의 소식이 전해지고 한동안 그녀는 괴로움에 삶을 포기할 정도로 힘들 것이었다.

그 순간 클로에를 보호해달라는 부탁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것이었고, 이제는 그녀의 발을 묶던 족쇄 따위가 더는 없었다.

슬픔과 절망의 순간이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위에 더 행복한 기억들로 덮는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제이스가 바라는 클로에의 삶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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