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104화 (104/111)

#104

“최근에도 클로에한테 도움받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성녀라는 고귀하고 중립적인 존재의 중재는 그 누구의 말보다도 효과적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도 공식적으로는 2 황자를 지지하는 방향이기는 했으나 성녀의 이름으로 하는 말의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효과적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무거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올까요?”

“본론이 뭐였죠?”

“샐리가 최근 헨리 경 때문에 고민이라고 한 얘기 말이에요.”

“아.”

이래서 일에 대한 집착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 결국 돌고 돌아 일과 관련된 이야기로 돌아와 버리니 말이다. 결국 그런 것들이 모여 신경이 곤두서니 두통을 달고 사는 것이었다.

“혹시 직접 요리를 해보는 건 어떤가요.”

“요리요?”

“저는 가끔 그러거든요. 직접 요리를 만들어서 그냥 피크닉 같은 걸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스트레스받았던 것도 풀리고 좋은 이벤트가 되지 않을까요.”

“흐음. 괜찮은 것 같아요.”

헨리도 그렇고 샐리 본인도 그렇고 힐링이라는 것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납치사건과 신전에서의 마족이 발견된 이후로 두 사람 모두 언제 어디서 1 황자가 작당을 벌일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었으니 말이다.

“혹시 고민된다면 도와줄까요?”

“어머, 그러면 저야 좋죠.”

예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여자들만의 세계에 샐리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클로에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여기들 계셨군.”

갑자기 나타난 1 황자 오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샐리는 순간적으로 모든 사고가 정지되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금 이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 사악하게 웃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것에서 샐리는 생각해내기 싫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하게 자신의 몸을 범하려던 남자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그 끔찍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만큼 완벽해 보이는 샐리에게도 약점은 존재했다.

“이번에도 예상조차 못했나 보지?”

오언은 자신의 묘수가 제대로 통했다는 것이 확인되자마자 곧바로 입꼬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지난날의 굴욕을 통해 끓어오르던 분노가 통쾌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특히나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사색이 되어버린 샐리의 얼굴을 보자니 오언은 가슴이 뻥 뚫리면서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희열을 참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아주 꼴이 좋아. 하아, 지금까지 참아온 보람이 있어. 너무 마음에 드는 걸?”

참으로 기분 나쁜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 덕분에 샐리의 멈췄던 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샐리는 곧바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오언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냥 그대로 단정 지으며 안심할 수도 없었다.

‘마법사는 어딨지.’

샐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자신의 힘을 봉인하는 마법사였다. 눈앞의 오언은 그냥 지금 이 황궁이라는 장소에 떳떳하게 서 있다는 것에서 충격을 받았을 뿐. 그에게는 쏟아 부어야 할 신경조차 아까울 정도로 그럴 가치가 현격히 떨어졌다.

[이 마석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 모르니 언제나 조심하도록 해. 지속시간이 짧다고는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 너에게는 치명적이니까.]

셀바의 말대로 여신의 힘이 없다면 그냥 평범한 귀족 여성에 불과한 샐리였다. 지난번 마석이 들어간 목줄을 통해 여신의 힘이 일시적으로나마 봉인된다는 사실. 그것은 샐리에게는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 실전을 대비한 데이터를 쌓았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가 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기에 경계심을 함부로 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떡하죠.”

“그러게요. 지금 저 인간이 어떻게 여기 왔을까요. 분명 우리 앞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러게요. 그럼 저희 조금 위험한 상태인 거 아닐까요.”

클로에 역시도 샐리와 마찬가지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경우에는 샐리와는 다르게 남자들에게 순결을 빼앗길 뻔한 위기도,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불안감이란 것은 굳이 그런 끔찍한 기억이 없더라도 생기는 것이었다.

“뭘 그리 속닥이고 있어. 너희가 생각한 그대로야.”

오언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클로에와 샐리가 말소리를 죽인 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아직 황제도 못 정했다지? 이런 머저리들. 이 몸이 친히 너희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 왔으니 감사 인사나 하라고. 물론 거기 너는 살려둘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알아둬.”

오언은 손가락을 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뭘 할 수 있는데?”

“하하, 그렇게 건방지게 말해도 되나?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부터가 너희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렇긴 한데. 내 입장에서는 당신이 이렇게 와준 게 고마운 입장이야. 안 그래도 내 오빠였던 녀석이 입을 안 열어서 고생 중이었거든.”

샐리는 역시나 기세에서 지고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보였다. 실제로 레너드의 끈질긴 반항 속에서 1 황자인 오언의 거처를 찾는 데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따지고 보면 오언은 적진 한가운데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 준 것이었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건방진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잖아. 이렇게 적진 한가운데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멍청한 우두머리가 세상에 어딨어. 네 밑에 있는 부하들은 그럼 얼마나 멍청한 거야.”

“아까부터 이 계집년이.”

예상했던 대로 약간의 자극만 줬을 뿐인데도 오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과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이 없었기에 샐리 역시도 언령으로 그를 구속한 다음에 이곳에 나타난 목적을 밝혀볼 심산으로 입을 떼려 했다.

콰앙!

“뭐, 뭐죠?”

분명히 들린 황궁 안에서의 굉음. 폭발적인 굉음에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곧 그녀의 눈에는 2 황자궁에서부터 자욱하게 올라오는 검은 연기가 포착되었다.

“설마….”

거대한 연기의 시작점이 2 황자궁이란 것을 안 순간 샐리의 등에도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방금까지 부들대며 얼굴을 구기고 있던 오언의 얼굴이 어느샌가 풀어지며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샐리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안감이 서서히 사실에 가까워짐이 느껴졌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게 맞아. 설마 내가 너희들이랑 오순도순 수다나 떨려고 여기 왔겠냐?”

“클로에, 2 황자께서 오늘 외출 계획 같은 건 없으셨나요.”

“없었어요.”

사색이 되어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에서 한 점의 거짓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즉, 2 황자 토니는 조금 전까지 폭발음이 들린 황자궁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무슨 짓이긴. 원래 내 자리가 되었어야 하는 걸 되찾으러 온 것뿐인데. 어차피 저놈은 진작에 죽었어야 할 놈이라고, 성녀만 아니었어도 내 계획이 훨씬 수월해졌을 테고 저런 마법사와는 손을 잡지 않았어도 되는 데 말이야.”

“입 닥치고 물구나무나 서!”

샐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오언은 그대로 입을 다문 채 물구나무를 섰다.

“읍, 으읍.”

오언은 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지 어떻게든 접착제를 붙이기라도 한 듯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려 노력했다. 또한 물구나무를 선 채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미 언령이 제대로 먹힌 순간부터 오언은 샐리에게 신체의 자유를 뺏긴 뒤였다.

“우리가 정신 차리고 해결해야 해요.”

황자궁에서 들린 폭발음이 일종의 신호탄이라도 된 것인지 황궁의 곳곳에서는 굵직한 함성과 더불어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생각했던 대로 오언은 무턱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히 오언이 개인적으로 양성하던 사병이 움직인 것이었다.

그것도 셀바와 헨리가 신전의 내부를 조사하기 시작한 절묘한 시기에 맞춰서 온 것을 보아하니 내부에 아직 찾지 못했던 첩자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시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충격적인 사태에 사색이 되어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던 클로에는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비장한 눈빛으로 샐리에게 계획을 물었다. 지금 이 장소는 더 이상 두 사람에게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당신의 기사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그럼 절 따라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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