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103화 (103/111)
  • #103

    “이 건방진 인간 놈이!”

    마족은 다소 건방져 보이는 셀바의 태도에 제대로 열이 받은 것처럼 보였다. 처음 정체를 드러냈을 때 예상했던 전개와는 그 방향성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상황 속에서 아직도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듯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마족의 모습을 바라보며 셀바는 코웃음을 치며 그 심기를 더더욱 거슬리게 만들었다.

    “건방져? 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마족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듯 최대한의 기를 모아 만든 검은 구체를 셀바에게 날렸다. 그 안에 들어간 마력은 구체를 맞는다면 일말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소멸시켜버리는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셀바는 그것조차 가소롭다는 듯 자신의 바로 앞에서 마족이 날린 필살의 검은 구체를 멈춰 세운 뒤 그것을 천천히 소멸시켰다.

    “너, 너 정체가 뭐야.”

    모든 힘을 쏟아 만든 필살의 기술조차 허무하게 막혀버리자 마족은 드디어 상황 파악이 된 듯 말까지 더듬으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셀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엄청난 힘에 마족은 과거 여신에게 당했던 기억까지도 떠올릴 정도였다.

    “그냥 너희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천재 마법사야. 아마 나 정도의 천재는 앞으로도 안 나올걸?”

    말 그대로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셀바는 굳이 남한테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기회를 본인이 찾아서 만드는 귀찮음을 셀바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평소 스테판 저택에 머무를 때면 그냥 달콤한 간식을 좋아하는 어리광쟁이 식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저택의 사용인들이 지금의 셀바를 본다면 턱없이 놀랄 정도로 저택에서의 모습과 지금 자신의 힘을 증명해내는 셀바의 모습은 차원이 달랐으니 말이다.

    “원래 귀찮은 일에 손을 대지 않는 타입인데. 내 제자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그 배후에 마족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자, 잠깐만. 아까 그 제안 받아들일게. 뭐든 말해 봐.”

    마족은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며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그것이 자신의 최후를 알리는 마지막 신호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마족은 결국 하찮게 여겼던 인간인 셀바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미 늦었어.”

    그 말을 끝으로 셀바는 자비가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저주의 말을 퍼붓는 마족을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

    “저희 정말 큰일 날 뻔한 거네요.”

    신전에서 발견된 마족의 시체는 샐리의 일행에 의해 빠르게 대륙 전체로 소문이 퍼졌다. 처음 마족의 시체와 더불어 정체불명의 고치가 발견되었을 때의 신관들과 성기사들의 절망적인 표정을 샐리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러게요. 신전이 엮여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족이 섞여 있었을 줄이야.”

    샐리 역시도 신전이 마족이라는 존재와 엮여있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그것보다도 혼자서 강력한 마족을 제압한 셀바의 실력에 대해 다시 보게 된 부분도 있었지만, 어쨌든 상대에게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들이닥친 것이 주효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이에요?”

    “이걸 밝힌 게 저희 제국이니 대륙에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죠. 이미 큰 사건이라 소문이 쫙 퍼지기는 했겠지만, 지금 진행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좋네요.”

    황제라는 한 나라의 중심이 없음에도 지금의 제국은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리며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나 제국의 미래를 위해 기존 제국이 가지고 있던 좋지 않은 이미지들을 탈피하기 위해 샐리는 부단한 노력을 퍼붓는 중이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베푼 것도 그렇고 기존에 대립하며 야만족이라고 무시하던 이들도 포용하는 것을 보여주며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신전에서의 사건은 샐리의 계획에 박차를 가할 아주 좋은 명분이었다.

    “신전 쪽에서는 아직도 대답이 없나요?”

    “그러게요.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아직 별다른 기미조차 보이지 않네요.”

    입을 꾹 다문 채 폭풍의 시기가 그저 지나가기를 바라는 듯한 신전의 무책임한 태도는 샐리로 하여금 공분을 샀다. 제대로 건수를 물었기에 제국은 신전에 제공하던 막대한 지원도 끊으면서도 여신의 뜻을 받드는 정의로운 국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신전이 꽉 잡고 있는 신권을 조금이나마 양도받을 수 있었다.

    “클로에 당신의 존재가 참 고마워요.”

    “네?”

    클로에는 자신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샐리를 보고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성녀의 존재 덕분에 제국 쪽에서도 여신을 기리는 구조물을 지을 수 있게 됐잖아요.”

    “아, 그 말이었군요.”

    클로에는 자기가 뭘 했냐는 듯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클로에가 없었다면 일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을 텐데.”

    샐리가 말한 대로 성녀는 그 존재만으로도 값어치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각 대륙의 사절단이 대륙횡단 열차 건으로 며칠 전 황궁에 방문했을 때도 클로에는 샐리가 먼저 제안하지 않았음에도 본인의 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싶다고 발 벗고 나섰다.

    그 결과 성녀의 치유력을 확인한 사절단들은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제국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 토대는 신전의 비리를 밝혀낸 샐리의 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는 했다.

    “2 황자님께서는 좀 괜찮은가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일로 상심하실 분은 아니니까요.”

    “다행이네요.”

    “어쨌든 이제는 시간을 더 끄는 건 힘들 것 같아요.”

    차기 황제에 대한 논쟁은 그 주제가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장 뜨거운 화두로 자리 잡았다. 샐리의 입에서 헨리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의견이 천차만별로 갈렸다.

    오죽하면 그 단합이 잘 되던 신진 귀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며 분위기가 험악해졌을까.

    지금 평화로운 분위기의 황궁도 언제 전쟁터로 변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2 황자인 토니는 일관된 침묵으로 제대로 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헨리 경께서는 어떠신가요?”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긴 해요.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자리이다 보니.”

    샐리는 헨리에게 너무 많은 짐을 준 것 같아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있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더라도 가면 갈수록 수척해지는 얼굴에서 그가 얼마나 앞으로의 일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 전부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덩달아 샐리 역시도 고심이 깊어졌다.

    다른 문제 때문이 아니라 헨리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줄 이벤트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도중인데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군요.”

    최근 들어 안색이 안 좋아지는 헨리 때문에 고민이라는 말을 듣고 클로에 역시도 제이스 때문에 앓던 두통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클로에도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수다를 떨던 이가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며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에서 샐리는 곧바로 클로에에게도 무언가 고민이 있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챘다.

    “혹시 괜찮다면 제 고민도 들어주실래요?”

    “물론이죠. 그렇게라도 클로에의 도움이 된다면 저는 기쁠 거예요.”

    “만약 샐리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옳지 않은 길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 그 얘기군요.”

    샐리는 클로에가 고민하는 내용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성녀의 시종이라는 역할을 자처하며 그녀의 곁을 지키는 한 남자에 대한 고민임이 분명해 보였다. 다른 것보다 헨리와 만날 때마다 서로 으르렁대는 것에서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지금 클로에가 고민하는 이유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은 없어요.”

    말 그대로 샐리는 클로에와 같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헨리야말로 본인이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량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건 클로에가 선택할 일 같아요.”

    “그렇겠죠.”

    클로에가 지금 이 고민을 샐리에게 털어놓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최근 제이스는 갈팡질팡하며 방황하는 듯 보였다. 샐리가 이끌어나가는 제국은 현재 클로에가 이곳 제국에 오기 전 제이스와 약속했던 바가 차츰차츰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제이스는 지금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샐리라면 제이스가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해줄 수 있나요.”

    “그건 나한테 달린 문제가 아니에요.”

    샐리가 말한 대로 이곳 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는 이제는 헨리가 관리하는 영역이었다.

    “하아,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이러려고 샐리와 약속을 잡은 게 아닌데.”

    “그러지 말아요. 친구 사이에 이 정도 고민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 앞으로도 남한테 상담하고 싶은 고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요.”

    샐리는 말로 완전히 표현하지 않을 뿐 클로에에게 고마운 점이 참으로 많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남편인 헨리를 제외한 타인들 중에서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샐리가 클로에를 그만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클로에가 과거에 겪었던 참혹한 일과 그 일을 계기로 제국으로 올라와 성녀를 자처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클로에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최근 차기 황제와 관련된 논쟁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한 귀족들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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