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102화 (102/111)
  • #102

    ‘언제부터 뒤에 있던 거지.’

    나름 신바람을 내며 숙청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긴장감을 늦추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바로 뒤에 있는 존재에 대한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야닉은 잠시나마 놓고 있던 긴장의 끈을 다시 굳세게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왜 하던 일을 멈춰.”

    “네 부하들이 아닌 건가.”

    “맞아.”

    “그런데도 부하들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는 건가?”

    야닉은 쓰러진 길드원들을 무덤덤한 눈빛으로 둘러보면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듯이 말을 하는 제이스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네.”

    “그게 무슨 소리지?”

    “여긴 너희와 달리 끈끈하게 뭉친다는 개념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그냥 자기 몫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놈들이란 거야. 그런 놈들이 그냥 혼자서 하기 힘든 큰 건수를 건지기 위해 잠시 뭉치는 것이 이곳 길드라는 존재인 거고.”

    이런 뒷골목의 범죄조직은 그 개념이 일반적인 것들과는 달랐다. 친목과 우정을 다지며 서로의 등을 맡기는 그런 낭만은 이런 더러운 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군.”

    야닉은 제이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야닉은 제이스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둔감한 부분이 있다고 하는 그라고 하더라도 굉장히 익숙한 얼굴에서 흐르는 이질감 넘치는 살기는 보통 생각이란 걸 먼저 하지 않는 그에게 머리를 굴리도록 만들었다.

    “우리 어디선가 본 적이 있나?”

    “그쪽이라면 전쟁터 이곳저곳을 누비느라 많은 사람들을 봐왔을 텐데 거기서 나랑 비슷한 얼굴을 봤을 수도 있지.”

    “그런가?”

    “그래.”

    제이스는 야닉과 이런 멍청한 대화를 더 하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더 깊은 사정은 말해줄 수 없는 거야?]

    [미안.]

    [내가 듣고 싶은 게 그 말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더 줄 수 없을까.]

    차마 사람을 죽였다는 얘기를 클로에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다. 별 생각 없이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벌인 일인데도 끝내 소중한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것을 보아하니 제이스 본인도 스스로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지금의 시기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사실은 틀린 것이었다니.

    현재 샐리의 행보도 그렇고 그런 샐리를 지지한 클로에를 보니 제이스는 더 이상 본인이 나서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샐리가 나한테 그랬어. 과거 선대황제와 함께 과오를 벌인 이들도 단죄할 거라고. 그러니 그냥 믿고 기다리자. 물론 손 놓고 기다리자는 말은 아니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굳건한 믿음이 담긴 클로에의 눈이 떠오르니 제이스는 집어 든 검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 뭐야, 어디 가.”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야닉은 갑자기 어디론가 달아나는 제이스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갑자기 다 죽어가는 시체처럼 누워있던 길드원들의 습격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여신을 모신다는 신전이란 곳이 더럽기 짝이 없군.”

    매캐한 연기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의 악취가 흐르는 여신상의 건물 깊은 지하. 샐리와 헨리의 도움으로 신전에 몰래 잠입한 셀바는 신전 내부에 들어오자마자 느껴진 불쾌한 기운을 따라 지금 이 건물에 도착했다.

    여신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거대한 석상을 모시는 건물.

    이 건물은 여신의 신탁이 떨어진다는 신성한 건물로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신경 써서 관리하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셀바는 그들의 눈을 어렵지 않게 피한 뒤 여신상의 건물로 들어왔고, 밑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건물 내부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중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찾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비밀 통로를 통해 도착한 지하에서 셀바를 맞이한 것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강한 독기로 가득한 방이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거대한 고치처럼 생긴 무언가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셀바조차도 이 이상 앞에 보이는 정체불명의 고치로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마법으로 보호막을 펼쳐 봐도, 마력을 방출하여 앞을 뚫어보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모든 것이 막혔다. 이런 난관을 살면서 거의 겪어본 적이 없는 셀바였기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결국 그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든든한 제자가 함께 있었다.

    “역시 쥐새끼가 숨어들었군.”

    그래서 셀바는 결국 차선책인 샐리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마법으로 전서구를 만들려던 찰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외우던 주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여긴 어떻게 왔지?”

    “대놓고 불쾌한 기운이 느껴지길래 와봤을 뿐인데.”

    “앞에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지키고 있어서 함부로 들어올 수가 없었을 텐데.”

    “그런 머저리들을 따돌리는 일이야 이 몸에게는 쉽지. 그런데 그쪽은 누구지? 보아하니 저 괴물 같은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흐음, 신전을 관리하는 대신관으로서 이런 건 나도 처음 보는군. 어쨌든 신전에 무단으로 침입한 죄가 있으니 얌전히 따라오시오.”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범상치 않은 마력과 늙어 보이는 외관으로 봤을 때 셀바는 눈앞에 있는 이가 신전의 관리자쯤 된다는 것을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신전의 최고 관리자인 대신관이 되는 사람이 이런 역한 기운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인제 와서 모른 척하는 것이 어이가 없고 역겨워 셀바는 헛웃음을 치며 어림도 없다는 듯이 대신관을 노려봤다.

    “신관들이랑 성기사들도 눈치채지 못한 걸 안 걸 보니 감각이 보통 예민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자네 나랑 같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볼 생각이 없나? 난 탐나는 인재는 그냥 놔두지 않거든.”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 뭔지는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기 보이는 흉측한 고치랑 연관된 것 같은데.”

    “큭큭, 이럼 대충 알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셀바의 눈앞에는 더 이상 노년한 인간 형체의 생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던 뿔이 달린 건장한 체격의 마족이 셀바의 앞에 늠름하게 서서 씨익 웃어 보였다. 셀바는 지금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던 것인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신이 괜히 직접 개입한 게 아니었군.’

    샐리에게 들었던 여신이 직접 나타나 신탁을 내려준 이야기. 그 이야기를 셀바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샐리가 가지고 있는 마력과 개화된 능력을 본다면 그녀의 말이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특히나 신전의 존재가 현재 유지되면서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데는 여신의 신탁과 연관이 있었다.

    과거 마족과의 전투를 끝으로 여신의 존재는 인간들의 세상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없었다. 전쟁 당시 자신의 수족이던 이들을 남겨두고 그들에게 세상을 널리 이롭게 만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라는 것이 기록서에 기록되어 있는 기록이었다.

    “신전이 빈껍데기가 됐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네.”

    인간의 껍데기를 벗고 본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과 결판을 내겠다는 의도였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던가 그것이 아니면 목숨을 빼앗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래서 대답은?”

    “대답?”

    셀바는 굳이 말로 해야 알겠냐는 듯 곧바로 눈앞의 마족을 향해 충격파를 날렸다.

    “크윽!”

    “무슨 자신감으로 내 앞에서 대놓고 정체를 드러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겠지?”

    세상만사 어떻게 되던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마탑에 틀어박혀 지내던 셀바였다. 과거의 자신이 지금 이 광경을 본다면 아마 왜 이런 힘든 일을 하면서 사서 고생을 하냐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줄 터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자리에서 제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싹을 잘라야 하는 사명감을 주는 인물들이 있었다.

    소중함이란 걸 깨닫지 못하던 그에게도 소중한 보금자리가 생겼고, 그 보금자리는 셀바로 하여금 지금 이렇게 신전 내부를 야금야금 파먹으며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품고 있던 마족을 상대하게 만들었다.

    “젠장, 너 역시도 여신의 힘을 받은 인간이냐.”

    “여신의 힘이라면 대륙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지. 여신이라는 숭고한 존재가 인간들로 하여금 풍족하고 아름다운 터전을 가꾸어나가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눈앞의 마족은 여신의 힘을 받은 단 한 명의 인간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셀바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황궁에서 있었던 샐리와 클로에가 납치되었던 사건을 바로 떠올렸다.

    “흐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군. 그렇다면 네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나도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셀바는 다른 특별한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력을 담은 충격파를 몇 번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하게 정체를 드러냈던 마족은 이미 거의 너덜너덜해져 거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분명 상대방에서 느껴지는 기백으로 만만치 않을 상대라는 것을 그 역시도 인지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자신감에 넘쳤다는 것은 어느 정도 본인이 생각하는 견적과 근거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바뀌게 되는 데는 얼마 정도의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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