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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100화 (100/111)
  • #100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큰일을 겪고 나면 머릿속이 하얘지며 이미 탈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샐리의 총명한 두뇌 회전은 위험한 상황을 넘긴 지금 그 회전속도가 더 빨라졌다.

    “어쨌든 내가 방안에 가만히 쉬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알겠어요. 하지만 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신전에 한 번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어때요?”

    “나 역시 동의하오. 어차피 우리의 표적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시간을 끌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헨리에게 있어서 불안한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손 한번 못 써보고 잃을 뻔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고, 언제 어디서 샐리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를 더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신전에 갈 생각이라면 나도 가야겠소.”

    헨리는 혼자서 신전에 갈 생각이라면 방문을 직접 막아둔 채로 샐리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며 말했다.

    “당연히 같이 가야죠.”

    “당연히 그래야지. 응? 잠깐. 지금 같이 간다고 했소?”

    “뭘 그렇게 놀라요. 당연히 당신이랑 같이 가야죠. 혼자 적진을 갈 정도로 절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그게 아니라. 절대 그런 뜻이 아니오. 내가 샐리 그대를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지 않소. 다 걱정되어서 그러는 것이오.”

    “아하하, 알고 있어요.”

    샐리는 오늘따라 유독 더 당황하여 말이 장황해지는 헨리를 보며 대차게 웃었다. 다른 무엇보다 오늘 겪은 상황이 있기에 본인의 신경이 더 날카로웠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부분을 노려 헨리를 놀린 것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샐리가 예상한 대로 말투에 약간의 날카로움만 가미했을 뿐인데도 평소보다 더 당황하여 혀까지 깨물며 입이 꼬인 모습이었다.

    “말했잖아요. 이제는 당신한테 의지하고 싶다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당신이 언제나 말하라고 했었죠?”

    “물론이오. 나한테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하시오. 그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도 당신이 원한다면 난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소.”

    “후훗, 정말 그렇게 말해도 괜찮겠어요? 그러다 내가 별이라도 따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한껏 신바람을 내며 다소 오버하는 듯한 헨리를 보고 있자니 샐리는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릿한 피 냄새와 날카로운 비명으로 가득하던 살육의 현장에서 빠져나온 셈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참사를 겪은 사람답지 않게 샐리는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그 끔찍한 기억을 잠시나마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도 최대한 노력하겠소.”

    “그렇게까지 하지 말아요. 그러다가 내가 어리광쟁이로 변해버리면 어쩌려고.”

    “그럼 더 좋지.”

    헨리는 엉큼한 얼굴로 샐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포갰다 떼며 말했다.

    “다, 당신.”

    “그대만 놀리는 건 불공평하지 않소. 이 정도는 애교로 봐주시오.”

    “귀여우니까 봐줄게요.”

    “흐음, 피곤해 보이는 데 이만 쉬시오.”

    얼굴에 번져가는 미소에도 샐리의 얼굴에 여전히 남아있는 피곤한 기색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편히 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일어섰다. 아무래도 옆에 누군가 있어 인기척 때문에 거슬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헨리가 발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미약한 손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대?”

    “다른 이유가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옆에 있어 주면 안 되나요? 당신이 피곤한 것도 알지만 그냥 잠들 때까지 만이라도 있어 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소매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그녀가 애써 괜찮은 척 숨기던 약한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었다. 헨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샐리는 강한 사람이었다. 무사히 위기를 넘어서며 스스로가 생각해도 조금은 더럽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써가면서까지 이 자리에 올라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듯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결국에는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샐리는 여전히 자신을 덮치려는 무수한 남자들의 손과 더불어 그들의 음흉한 눈빛이 아직까지도 따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 어두운 방에 혼자 남아있게 된다면 그 악몽과도 같은 기억에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샐리는 자기도 모르게 소심하게 헨리의 소매를 부여잡으며 우는 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었다.

    “아까 말했지 않소. 그대가 부탁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원한다면 그대의 손까지도 잡아줄 수 있소. 그대가 안심이 된다면야 그 정도도 못 해줄까.”

    “그건 당신이 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뭐든 어떻소. 서로서로 좋은 일에 상부상조하는 것이지.”

    헨리는 자신의 소매를 잡고 있던 샐리의 손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싸잡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네요.”

    샐리는 빙긋 웃으며 헨리의 장단에 맞췄다. 확실히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서 오는 든든함은 한시라도 빨리 잊고 싶었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주며 편안한 숙면에 도움을 줬다.

    “뭐야, 그 꼴은.”

    1 황자인 오언은 거친 호흡과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쪽 팔을 싸맨 채 들어오는 마법사를 보며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어 본인의 실력을 치켜세우던 이가 제 몸 하나 못 가누며 비틀대는 것을 보니 오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가 지금 사병을 양성하며 제국의 수도를 치려는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적인 인물인 만큼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의 수는 마법사의 부재가 주된 원인이 될 터였으니 말이다.

    “저쪽에도 마법사가 있어.”

    “뭐라고?”

    예상치 못했던 마법사의 존재가 언급되자 오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지며 미간이 구겨졌다. 지금은 비록 제국에게 쫓기는 범죄자의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리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을 망하게 만든 샐리와 헨리를 향한 증오심에 이가 부득 갈리는 것은 많았지만, 이쪽에도 남아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기에 여전히 전체적인 계획의 틀 자체가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성녀와 스테판 공작의 납치를 계획하고, 그 계획의 성공에 대해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인 마법사에 대한 기대감에 오언은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럼 성녀와 그 건방진 스테판 공작년은 어떻게 된 건데.”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질문이 나와?”

    “이런 멍청한! 네가 자신 있다고 세운 계획이었잖아.”

    오언은 단순히 계획이 보기 좋게 실패했다는 소식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실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뻔뻔하게 변수가 발생해 실패했다는 변명을 대는 태도에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매서워진 눈매와 함께 언성이 처음 마법사의 몰골을 봤을 때보다 더 높아졌다.

    “그럼 뭐 어쩌라고. 지금 제일 짜증 나는 건 나거든. 가뜩이나 잘린 팔도 아파죽겠는데 오자마자 눈치를 줘야겠어? 됐으니까 빨리 의사나 불러줘.”

    “추적자는 없었나.”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것 같냐. 됐으니까 의사나 부르라고.”

    두 사람은 과연 둘의 동맹이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로 서로가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의 위치가 들키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거지.”

    “그래, 아직도 날 못 믿어? 내 덕분에 제국의 황제를 죽였잖아. 그 정도 일을 해줬는데도 아직도 믿음이 없다니 섭섭하네.”

    마법사는 전보다는 유해진 말투로 오언을 진정시켰다. 애초에 본인의 실책이니 다른 곳에 책임을 물을 곳도 없었고, 굳이 실패하더라도 원래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길 문제도 아니니 굳이 더 걸고넘어지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어쨌든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해.”

    “그래, 그래. 파트너를 따뜻하게 감싸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런 게 다 군주의 미덕 아니겠어?”

    “쯧.”

    오언은 혀를 차면서도 마법사가 말한 것처럼 그가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일들과 앞으로 이루어야 할 계획들을 생각하며 밖에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시켜 의사를 불렀다.

    ***

    “그래서 내 아내에게 채워져 있던 목줄은 도대체 뭐지.”

    “그게 어지간히도 거슬렸나 보네.”

    “당연한 거 아닌가? 그 보석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운부터 시작해서 그 효과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 걱정되는 게 뭐가 이상하지?”

    “그냥 그렇단 거야. 뭘 그리 열을 내고 있어.”

    “그러는 그쪽도 스승으로서 꽤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셀바 역시도 지금 여유로운 겉모습과는 달리 아끼는 제자가 당한 일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다. 헨리와 제이스가 날뛰어서 본인의 차례가 오지 않았을 뿐. 기회가 왔다면 마력의 소모가 크더라도 그 들판 자체를 날려버릴 생각마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게 뭔지나 말해.”

    “여신의 힘을 억제하는 마석이야.”

    “마석?”

    “그래 쉽게 말해서. 마족의 힘이 깃든 돌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걸 도대체 그 마법사가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마족이라면 이미 멸족하지 않았나.”

    “글쎄,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 것들이 남아있나 보지.”

    셀바도 생각지도 못한 골칫거리가 등장했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어쨌든 단순한 마석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아. 다만, 마정석에도 종류가 있는 것처럼 마석에도 종류가 있지.”

    “그럼 샐리에게 채워졌던 목줄은 힘을 봉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는 건가.”

    “맞아, 하지만 내 제자가 보통 마법사와는 근본부터가 다르잖아. 단순한 마력이 아닌 여신에게 직접 부여받은 힘이란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아마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결국 마석의 효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긴 하지.”

    “마석을 사용한다는 것부터가 문제야. 그것도 여신의 힘을 일시적으로나마 봉인할 수 있는 힘이 있다니.”

    마석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을 정도로 테이블에 놓여있는 잘 다듬어진 돌조각에 헨리는 혐오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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