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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99화 (99/111)
  • #99

    제대로 된 흔적을 찾자마자 셀바는 헨리와 제이스를 데리고 추적 마법과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을 동시에 시전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클로에와 마법사가 타고 있던 한 마차였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던 마법사는 마차의 짐칸에서 느껴진 괴이하고 악랄한 마력에 곧바로 반응했지만, 셀바는 순식간에 그 마법사를 제압해버렸다.

    [짜증나는 재주를 부려줬겠다.]

    [너, 너는.]

    [날 알아? 나는 널 오늘에서야 처음 보는데.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하니 마족의 쭉정이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마탑에 숨어들었나 보구나.]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음에도 셀바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뭐, 너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아보면 되니까 상관없어. 참고로 저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순간 사지가 찢어질 테니 말이야.]

    이 살벌한 협박이 단순히 허세가 아니란 걸 셀바의 힘에 눌리고 있는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 허무하게 잡히는 건 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태워 결국 팔 한쪽을 내어주는 것으로 그 자리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대 정말로 괜찮은 게 맞소.”

    헨리는 자신의 품에서 안착된 가녀린 체구가 느껴지자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괜찮을 뻔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와줘서 고마워요.”

    샐리는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공포감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손을 바들바들 떨며 겨우 입을 뗐다. 언제나 강인하던 아내가 이토록 약해져 무서워하는 모습은 헨리에게는 안쓰럽다는 생각과 동시에 당장 자신이 사랑하는 샐리를 이렇게 만든 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이 동시에 잡혔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금방 끝내고 올 테니.”

    샐리는 떨림이 멈추지 않던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겨우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뭣들하고 있어. 저것들 당장 죽여. 안 그럼 여기서 다 끝이라고!”

    레너드의 다급한 외침은 그가 지금 어떤 정신 상태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 그대로 드러났다. 원래라면 적에게 자신의 심리상태를 내비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원체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기도 하고 지금같이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 반전된 와중에 그에게 있어서 침착함이라는 단어는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잡히면 그가 상상해오던 복수도 여기서 끝이었다. 복수는커녕 오히려 그토록 증오하던 상대방에게 역으로 심문을 당할 수도 있으니 다급하게 지금 이 상황을 탈출하려는 방안을 어떻게든 모색해야 했다.

    “저 말이 맞아. 어차피 여길 뚫어내지 못하면 답도 없다고.”

    “하지만 지금이라도 흩어져서 도망치면 어떻게 될 지도 모르잖아.”

    무능한 사령관 아래에는 무능한 부하밖에 없다는 말이 찰떡같이 어울렸다. 레너드의 외침에도 병사들은 갈팡질팡하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미 결심을 한 듯 무기까지 꺼내 보였으면서도 막상 마주한 세 남자의 존재감에 압도라도 된 것인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이들도 몇몇 있었다.

    “이 멍청이들아, 도망칠 거였으면 난 진즉에 이 자리를 떴다고. 이 망할 것들아! 저 녀석들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그 대단해 보이던 마법사도 꽁무니를 뺐는데 우리라고 뭐 다르겠어? 그냥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그게 우리가 살길이야.”

    레너드가 한 말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헨리와 제이스는 물론이거니와 셀바 역시도 이번 납치극에 가담한 이들을 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 한 사람.

    더 뒤에 있는 배후들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너드 정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똘마니들에게는 일말의 자비조차 베풀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고민이 된다면 내가 조금 덜어줄게.”

    “뭐? 커억!”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언제 남자들 틈에 끼어든 것인지 제이스는 미리 준비해둔 단검으로 순식간에 무리들 중 한 남자를 베어버렸고, 순식간에 조용하던 들판은 피의 학살 현장으로 변해버렸다.

    “저런 건 볼 필요 없어.”

    셀바는 마법으로 만든 안대로 샐리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헨리의 경우에는 원래 했던 대로 단칼에 적들을 베어버렸다. 말 그대로 깔끔하게 적을 저승으로 보내는 담백한 검술을 선보였다면 제이스의 경우가 셀바가 마법의 안대를 만든 이유였다.

    화려하면서도 폭발적인 검술은 사람의 눈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답고 우아한 동작 속에 존재하는 잔혹함은 푸른 들판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이는 장본인의 역할을 했다.

    일부러 급소를 피해 공격하며 상대를 농락하는 모습에서 그는 적들의 피를 더더욱 원하는 듯 보였다.

    “귀마개는 없나요?”

    끔찍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사람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퍼지기 시작했다. 안대를 쓰고 있어 앞이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앞에 선하게 보였다.

    “어이, 빨리들 끝내. 아가씨들을 이런 들판에 계속 내버려 둘 거야?”

    보다 못한 셀바는 제이스와 헨리를 말리기 위해 한 마디 거들었다. 헨리 역시도 무덤덤하게 적들을 베어내는 것 치고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 것이 서서히 되바라진 것들을 좀 더 손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누구의 말도 들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을 멈출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샐리와 클로에였다.

    클로에의 경우 마법사가 사용한 수면가루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샐리 역시도 큰일을 겪고 난 뒤라 얼른 저택으로 데려가 안정을 취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 사실을 셀바가 인지시켜주자 아무렇게나 날뛰던 두 사람은 호흡을 한 번 가다듬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검기를 사용하여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저, 저리 가.”

    샐리와는 다르게 학살 현장을 똑똑히 목격한 레너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겁을 집어먹었다.

    “지금 당장 널 죽여 버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만 알아둬. 내가 베푸는 건 자비가 아니야.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도록 해. 혹시 알아? 그렇다면 자네의 여동생이 조금이라도 자비를 베풀지.”

    그 말을 끝으로 헨리는 레너드를 기절시켰고, 제국의 역사에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될만한 황궁에서 대놓고 벌어진 납치사건의 결말이 맺어졌다.

    ***

    “따뜻한 우유 한잔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죠, 아가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올게요.”

    저택 내에서 오늘 있었던 크나큰 사건에 대해 어림짐작으로 눈치를 챈 메리는 창백한 안색으로 평소 찾지 않는 따뜻한 우유를 주문한 샐리를 위해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다른 이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미지의 사건이었지만, 오랜 세월 함께 시간을 보낸 메리의 눈을 속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이것이 헨리에게 안겨 저택으로 들어온 샐리를 본 메리의 첫 마디였다. 그 뒤로 굳이 자세한 사정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 주인의 안색을 살펴 적절한 대처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것이 관록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참 대단한 사람이오.”

    “메리 말인가요?”

    “그렇소. 평소의 그대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눈치가 빠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확실히 함께 한 시간이 길기는 한가 보오.”

    “같은 시간을 공유했죠.”

    샐리는 헨리의 말을 살짝 거들며 메리와의 관계가 단순히 특별하다는 것을 넘어선 사이라는 걸 어필했다. 샐리가 언급한 같은 시간을 공유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내며 서로를 의지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메리한테는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이렇게 보여도 숨기는 게 많으니까.”

    “저 정도 눈치면 그 정도도 대충 감을 잡았을 것이오. 그저 티를 내지 않고 있을 뿐이지.”

    “그러게요.”

    “오늘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푹 쉬시오. 그대에게 필요한 건 다른 것도 아닌 절대적인 안정이니.”

    자신을 침대에 눕히며 단호하게 자신의 다짐을 밝히는 헨리를 보며 샐리는 독에 당해 아팠던 때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분간은 침실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을 것 같은 굳은 의지가 담긴 눈빛과 말투는 지금까지 헨리가 느꼈던 압박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당신도 쉬어야죠.”

    숨기지 못하는 피곤한 기색에서 오늘 하루가 정말 고단하고도 길었으리라는 것이 고스란히 눈에 보였다. 샐리는 순간의 방심이 불러온 화에 피곤했을 헨리에게 끝내 정말 큰일을 당하기 전에 구하러 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폐를 끼친 것 같은 미안한 감정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대가 지금 하는 생각을 맞춰볼까?”

    “뭔데요.”

    “지금 당신은 나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이런 식으로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말이야.”

    “그게 맞기는 하니까….”

    “지난번에 했던 대화는 벌써 잊은 건가.”

    “알아요. 난 지금도 당신한테 충분히 의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날 구하러 와줬을 때 정말 고맙고 든든했다구요. 그냥 지금은 나 자신한테 약간 화가 난 것뿐이에요.”

    헨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굳이 부연 설명을 추가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러나 샐리는 지금 단순히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만으로 시무룩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해서는 안 되는 위기를 겪어버린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그대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없는 일 아니오. 저쪽에서 이리 빨리 행동할 줄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아무도 몰랐소. 게다가 성녀까지 노리고 있을 줄은 더더욱 알지 못했고.”

    “그래도 이번 일 덕분에 실마리는 풀렸네요.”

    샐리의 말에 헨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정말 강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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